주간동아 511

2005.11.22

“강간이 무죄, 도대체 말이 되냐”

호주 법원 다른 범죄보다 지나친 관용 … 여론 강한 반발에 ‘중형’ 판결 법안 추진

  • 애들레이드=최용진/ 통신원 jin0070428@hanmail.net

    입력2005-11-16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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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간이 무죄, 도대체 말이 되냐”

    10대 소녀를 강간한 혐의를 받은 세 명의 남성이 무죄선고를 받자 호주 언론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법원이 도대체 누구 편인지 모르겠다.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강간범을 대하는 법원의 지나친 ‘관용’에 호주 시민들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한다. 최근 호주에서는 3대 흉악 범죄(살인, 강도, 강간) 중 하나인 강간이 다른 범죄들보다 유독 가볍게 다뤄져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형량을 가볍게 내리거나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있는 것.

    지난해 한 호주 여성이 클럽에서 만난 남자들로부터 윤간을 당했는데도 법원은 10월 가해자들에게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판결의 배경은 피해 여성이 남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 성 관계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 하지만 처음엔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바뀌어 성관계 직전에 거부했고, 그럼에도 강제로 성관계가 이뤄졌다면 이는 분명한 성폭행이라는 게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다. 호주의 여성단체들은 “당시 사건 현장에는 가해 남성 4명과 피해 여성 1명만 있었기 때문에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최종 판결을 내린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해자에게 행운 빌어주는 해프닝

    ‘데이비드 심스’ 사건은 호주 법원의 성폭행범에 대한 관용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해 8월 멜번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데이비드 심스는 술과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옆집에 사는 22세의 시그리드를 강간했다. 당시 시그리드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함께 사는 친구가 현관문을 열어놓은 채 집을 나가자 심스가 몰래 들어와 강간했던 것. 심스는 평소 시그리드를 좋아했다며 자신의 범죄를 애정 행각으로 둔갑시키려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맡은 빅토리아 법원은 지난해 말 집행유예 3년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담당 판사인 빅토리아 주 법원의 토니 던케트는 “심스가 사건 당시 술과 약물에 취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었으며 이전에 특별한 범법 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장래를 생각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판결을 마치며 심스의 장래에 대한 행운을 빌어주는 해프닝까지 펼쳤다.

    이에 시그리드는 빅토리아 주 총리의 아내인 테리 블랙에게 편지를 써 항의했으며, 올 초에는 1만여명의 시민들과 함께 빅토리아 주 의회 의사당 앞에서 잘못된 판결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처럼 강간범들이 다른 범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형량을 받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강간범들은 이런 법정 시스템을 이용하기까지 한다. 피해자들은 되도록 빠른 판결이 빨리 내려지길 바라는 것과 달리 가해자들은 판결이 최대한 늦어지도록 하면서 감형을 유도하는 경우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강간이 무죄, 도대체 말이 되냐”

    잇따른 강간범의 무죄선고로 논란의 중심에 선 호주 법원.

    또 사건을 맡은 경찰이 가해자의 처지를 더 고려하는 경우도 많다. 2002년 시드니에서는 10대 백인 여성들만을 골라 윤간을 한 4명의 파키스탄 청년이 검거됐다. 당시 강간범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법 집행을 더디게 하기 위해 변호사를 특별한 이유 없이 해고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종교까지 이용했다. 라마단 기간에는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법정에 앉아 있기도 힘들다며 법정 출두를 거부해 추가 재판이 아홉 차례나 진행된 것. 그러면서 형 집행이 3년 동안 연기됐다.

    “확정 실형 마치는 경우는 1%”

    7월에는 63세의 여인을 정기적으로 강간한 혐의자가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결이 나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셀라는 2002년 한 해 동안 이웃집에 살고 있는 한 청년에게 지속적으로 강간을 당했다. 하지만 셀라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경찰 신고를 차일피일 미뤘다. 성폭행 후유증으로 우울증에 걸린 그는 결국 우울증 약을 과다 복용해 자살을 시도했다. 병원에서 깨어난 그는 담당 의사에게 자신이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고백했던 것.

    하지만 경찰은 그가 오랫동안 우울증 약을 복용했던 사실을 문제 삼으며 셀라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범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셀라가 이웃집 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합의 아래 성관계를 한 것으로 결론 내렸고, 이는 결국 재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경찰은 재판이 진행될 때마다 셀라의 성폭행 혐의자가 전과가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강간이 무죄, 도대체 말이 되냐”

    강간범에 대한 호주 법원의 지나친 관용은 언론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강간 피해자들과 가해자의 변호인(맨 오른쪽)이 방송에 나와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강간 사건들이 정죄(定罪)되지 않자, 호주 내 인권단체들은 현 법률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인권 변호사 데이비드 갈발리는 한 방송에서 “많은 강간 사건들이 신고가 돼도 피해자들이 자신의 신원이 밝혀지기를 꺼리고 경찰 또한 사건의 정황을 자세히 공개하지 않아 사건 자체가 미해결로 남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또 “빅토리아 주의 경우 전체 성폭행 사건 중 범인이 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받는 비율은 25%에 불과하고,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며 “처음에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해도 상당수는 감형되기 때문에 처음에 확정된 실형 기간을 모두 마치는 경우는 전체의 1%도 안 된다”고 덧붙였다.

    모나시 대학 법대 교수인 알리 프라이버그는 “이처럼 법정에서 강간범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다 보면, 일반인들에게 강간이 범죄이긴 하지만 과중한 처벌은 면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강간범들에게 좀더 과중한 형량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강간범들에 대한 법원의 무죄판결이 커다란 반발을 사자, 호주 정부는 강간 사건에 대한 형량을 이전보다 무겁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조만간 개정될 법안에 따르면 “일반 강간 사건의 경우 최소 형량을 5년으로, 아동 성폭행의 경우 13년으로 정한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강간 사건은 개정된 형량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또 강간 피해자들이 법정에 출두해 가해자 앞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이 심적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 사전 비디오 진술도 인정될 예정이다.

    하지만 법적인 개선보다도 강간이 살인 못지않은 흉악한 범죄라는 사실을 모든 남성들이 가슴속에 새기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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