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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속도를 지배하는 자

‘속도 권력’ 몸까지 굴복 시켰다

핵무기 위협 MD 구축 ‘총성 없는 전쟁 중’ … 저항 근거지 잇따른 소탕 인간 설 곳 상실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속도 권력’ 몸까지 굴복 시켰다

‘속도 권력’ 몸까지 굴복 시켰다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주한미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다고 했을 때, ‘한미동맹의 약화’라 말하며 그 책임이 현 정권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미군의 이동은 전 세계 미군의 전략적 재편 문제이지, 한미관계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이 ‘공간적인’ 것에서 ‘시간적인’ 것으로 바뀌어 왔다. 그 흐름에 맞춰 전 세계 미군은 주둔군에서 신속배치군으로 변모하고 있을 뿐이다.

정작 우려할 게 있다면, 외려 주한미군의 주둔 목적에 생긴 변화다. 과거 미군은 남한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에 주둔했다면, 오늘날 미군은 동아시아 전체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이 땅에 머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미동맹의 선에 이끌려 우리나라가 한반도 밖에서 벌어지는 분쟁(가령 대만과 중국 사이의 군사적 충돌)에 휘말릴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이게 아닐까?

폴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에는 이런 변화의 배경이 잘 설명되어 있다. 이른바 ‘질주학’으로 유명한 비릴리오는 문명의 역사를 ‘속도’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에 맞춰 이 책은 군사, 정치, 행정 등 여러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속도혁명의 양상을 추적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측면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여기서는 군사적 측면만을 주목해보자.

공성전과 방성전

고대에 전쟁이란 곧 성(城)을 함락하거나 방어하는 것이었다. ‘트로이 목마’의 전설은 당시 전쟁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카르타고와 예루살렘 등 고대 도시의 운명은 성곽을 돌파당할 때 결정되었다. 이는 중세에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고대에는 성곽이 도시 전체를 감싸는 거주의 공간이었다면, 중세의 성곽은 군사적 요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오사카 성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에게 도성(都城)은 거주의 공간을, 산성(山城)은 군사적 요새를 의미했다면, 오사카 성은 거주 공간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성, 즉 요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도성이든 산성이든, 과거의 전쟁은 성의 함락, 혹은 성의 방어와 더불어 끝났다. 그때만 해도 전쟁은 철저히 ‘공간’의 점령으로 이해됐던 것이다.

하지만 공성전의 시대도 지나간다. 포화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시대에, 고립된 공간에 스스로 갇히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리라. 이때부터 전쟁은 점점 더 기동전으로 성격을 바꿔가기 시작한다. 전쟁에서 속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은 손자일 것이다. 손자의 생각은 훗날 ‘전력(戰力)=병력×속도’라는 나폴레옹의 전쟁 개념으로 이어진다.

기동전은 물론 고대에도 있었다. 마차가 끄는 전차부대는 고대 전쟁터에서도 승리의 보장이었다. 중세 유럽을 공포 속에 몰아넣은 칭기즈칸의 병사들이 서양 기사들보다 더 잘 무장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한 속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웃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은 종종 몽골 기병대보다 늦게 도착하곤 했다.

‘속도 권력’ 몸까지 굴복 시켰다

일본의 오사카 성.

하지만 속도가 전쟁의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그 전만 해도 전쟁의 속도는 보병의 걸음걸이요, 빨라 봤자 기병의 이동 속도였다. 아직까지도 속도는 자연적 한계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차대전 이후 전쟁은 인마의 근육이라는 한계를 넘어 기계의 속도에 도달한다. 병력은 기차로 수송되고, 정찰은 항공기로 수행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여전히 ‘전선’이라는 공간적 개념에 묶여 있었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생각해보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참호전의 공간적 교착상태는 새로 모습을 드러낸 기동력에 의해 깨진다. 영국의 전차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독일군의 참호를 무력화해버린 것이다.

전선은 돌파되었다. 독일은 항복한다. 이 찬란한 승리에 도취한 프랑스는 종전 후 독일군의 재침을 막는답시고 이른바 ‘마지노선’을 구축한다. 여전히 참호전의 기억에, 말하자면 전쟁의 공간적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차대전에서 전차를 목격한 독일군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 개념을 창출했다. 전차와 항공기로 강력한 방어선을 우회함으로써 마지노선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번개처럼 빠른 전쟁’, 즉 ‘전격전’이다. 전격전은 전쟁의 개념을 공간적인 것에서 시간적인 것으로 바꿔놓았다. 게다가 전선 위를 마음대로 넘나드는 폭격기는 전후방의 공간적 구별마저 지워버렸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 공간을 지배한다. 권력은 이제 속도에서 나온다.

‘속도 권력’ 몸까지 굴복 시켰다
그렇다면 시간을 빼앗기고, 권력도 빼앗긴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공간과 시간에서 사라져버리면 된다. 그것이 바로 ‘게릴라전’이다. 게릴라전은 시간과 공간을 빼앗긴 자들의 군사적 플래시 몹이다. 일찍이 스페인의 인민들이 나폴레옹에게 ‘영토 없는 저항’을 한 데서 게릴라라는 말이 나왔다. 베트남의 인민들은 땅속으로 사라져 ‘신체 없는 저항’을 했다. 손자는 자기가 원할 때 집결해 원할 때 흩어질 수 있는 군대가 가장 이상적인 군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속도의 영점

오늘날 전쟁은 거의 전기적 속도에 도달했다. 소련이 미국을 향해 미사일을 쏠 경우,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에 허용된 시간은 단 8분이라고 한다. 미국 대통령이 늘 핵 가방 지참한 수행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케네디가 쿠바의 핵 기지를 묵과하지 못했던 것도, 대비할 시간이 8분에서 2분으로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전쟁은 속도의 영점(零點)에 도달한다.

‘속도 권력’ 몸까지 굴복 시켰다
미사일이 날아오면, 그게 핵미사일인지 재래식 미사일인지, 의도적 공격인지 우발적 실수인지를 신속히 판단해 대응해야 한다.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결정을 내리는 데 허용된 시간이 단 몇 분이라니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그 판단을 아예 컴퓨터에 맡겨버리면 어떨까?

그 경우 우리는 영화 ‘터미네이터’에서처럼 기계의 반란을 우려해야 한다. 영화에서 기계들은 인간들에게 서로 핵 공격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인간 없는 세상의 지배자가 된다.

전쟁이 공간적이었을 때의 위기상황은 ‘포위상태’였다. 전쟁이 시간적인 것으로 변하자 ‘비상사태’가 위기상황이 되었다. 핵 감축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탄두의 수를 줄이는 게 아니다. 아무리 탄두의 수를 줄여도 지구를 절멸시킬 만큼의 탄두는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릴리오는 상대의 의도를 신속히 확인할 ‘핫라인’ 개설이야말로 핵감축 협상의 요체라고 본다. 전쟁을 억제하는 것은, 거의 광속에 가까운 속도 앞에서 다만 몇 분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총성 없는 전쟁

언젠가 독일 TV에서 본 한 노인의 말이 기억난다. 2차대전 때 여러 전선을 전전했던 그는 “다른 나라 군대와 달리 미군과 싸울 때는 인간이 아니라 물자와 싸우는 느낌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이미 1·2차 대전부터 전쟁은 전방과 후방,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 없이 모두 동원되는 이른바 ‘총력전’이었다. 태평양전쟁 초기에 미국은 일본의 기습에 고전했다. 하지만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이 나라는 완전한 전쟁국가로 탈바꿈해 막강한 파괴력을 과시하게 된다.

클라우제비치의 말대로 전쟁의 본질이 ‘자신의 의지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데 있다면, 거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1) 무기 성능의 위협, (2) 무기 사용의 위협, (3) 실제로 무기의 사용.

서로 핵무기로 무장한 오늘날 전쟁은-적어도 강대국들 사이에서는-실제로 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하겠다는 위협이 아니라, 무기의 성능을 가지고 상대를 위협하는 잠재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른바 ‘총성 없는 전쟁’인 셈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미사일을 무력화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MD를 구축하려 한다. 그러자 러시아가 그 어떤 방공망도 뚫을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 역시 유인우주선을 발사하며, 미국의 MD를 무력화할 모종의 실험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총성 한 방 울리지 않지만 전쟁은 이렇게 소리 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 전쟁은 군과 민간의 구별이 없다. 아니, 군과 민간이 한 몸이 되어 수행한다.

폴 비릴리오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에는 세 번의 혁명이 있었다. 하나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수송수단의 혁명이다. 기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유럽의 어느 유명한 문인은 “이제 유럽에서 공간은 사라졌다”고 단언했다. 다른 하나는 통신수단의 혁명이다. 지구 건너편의 사건을 실황으로 중계받고, 클릭 한 번에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시대에 이르면, 시간마저 사라지기 시작한다. 오늘날 속도의 혁명은 광속에 도달했다.

빛보다 빠를 수는 없기에, 비릴리오는 제3의 혁명은 속도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다. 다음은 바로 ‘이식혁명’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미래파들이 꿈꾸던 ‘인간 신체의 금속화’는 전자 센서와 금속성 무기로 무장한 전투 헬기의 조종사 속에서 실현되었다. 나아가 BT(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정복을 시작했다.

푸코의 권력이 지식에서 나온다면, 비릴리오의 권력은 속도에서 나온다. 속도는 공간을 지배한다. 속도로써 모든 공간과 시간을 식민화한 권력은 이제 우리의 몸을 식민화하기 시작한다. 비릴리오는 속도에 맞서 저항을 꿈꾼다. 시간을 빼앗기고, 공간을 빼앗기고, 몸마저 빼앗기고, 저항의 근거지는 여기저기서 소탕당하고 있다. 아직도 남은 저항의 여지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속도는 미쳐 날뛰고, 저항은 무력해 보인다.



주간동아 2005.11.15 510호 (p80~82)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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