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3

2005.07.12

그린의 오뚝이 “무명 설움이여 안녕”

US여자오픈 우승 김주연, 고난의 미국 생활 화제 5년간 부상·경제적 빈곤 탓 ‘지긋지긋한 시련’

  • 이종현/ 골프칼럼니스트

    입력2005-07-07 17: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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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27일(한국시간) 새벽 국내 골프 팬과 국민은 또 한번 눈과 귀를 의심할 만한 대사건을 경험했다. ‘버디 킴(Birdie Kim)’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의 한국 낭자가 미국 LPGA(여자프로골프협회) 메이저타이틀인 US여자오픈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기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지막 18홀 동타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벙커에서 마지막 샷을 극적 버디로 작성하며 우승을 일궈내,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극적 반전의 짜릿한 감동을 가져다 주었다. 최종 라운드 1오버파 72타, 합계 3오버파 287타로 정상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5000만 국민을 흥분시킨 것은 ‘버디 킴’이 한국에서 유망주로 평가받았던 김주연 선수였다는 사실과 만 4년 동안 매스컴에 거의 등장하지 않아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그렇고 그런 선수였다는 점 때문이다.

    비행기값도 친지에게서 얻어 … “니들이 눈물 젖은 빵 맛을 알아”

    그러나 그녀는 벙커 샷 단 한 방으로 전성기의 박세리 인기와 부를 움켜쥐는 선수로 거듭났다. 이것을 그녀는 지난해 자신의 이름을 골프와 연관된 ‘버디 킴’으로 바꾸고 나서 찾아온 행운으로 믿는다. 사실 2005년 US여자오픈은 경기 시작 전만 해도 소렌스탐의 3연패와 미셸 위의 성적, 박세리가 슬럼프에서 탈출할지에 관심이 쏠렸다. 그리고 대회가 시작되고 4라운드가 진행되는 순간까지만 해도 누구도 김주연이 우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미셸 위가 과연 프리셀이나 터플스를 누르고 우승할 수 있을지에 모든 매스컴과 골프 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김주연은 착실하게 버디 찬스가 오면 반드시 성공시켰고 1타를 잃으면 다음 홀에서 버디를 뽑아내는 강한 집중력을 보였다.

    김주연은 ‘진흙 속에 감춰진 진주’란 표현이 적절하다. 아버지 김용진 씨와 어머니 오현옥(44) 씨 사이에서 4녀 중 장녀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인 열두 살 때 골프에 입문했다. 당시 골프숍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고향친구인 김일권(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 출신) 씨가 적극적으로 권유해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중 골프 명문인 서문여중에 진학하면서 3학년 때 중고연맹 주최 회장배 및 주니어선수권 우승 등 그해 최다승 기록인 4승을 올리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서문여고에 진학하면서 국가 상비군에 발탁되었고, 고2 때는 고향인 청주 상당고에서 골프팀을 창단하자 주저 없이 전학 와 국가대표로 장정, 조경희와 함께 활약했다. 97년 스포츠서울오픈에서 박희정과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쉬운 준우승을 기록하며 성인무대서 김주연이란 이름을 각인시켰고, 98년 아시아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킹스컵 2승, 일본 문부대신배 2연패 등 통산 아마추어 18승을 따내는 저력을 발휘하며 차세대 유망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김주연은 고려대에 여자선수로는 최초로 체육특기자로 입학했지만, 대학생활을 즐기기보다는 미국 무대 진출을 앞당기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미국에 건너갈 비행기 값을 비롯한 생활비를 친지에게서 얻어 장도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무대는 그녀를 순순히 받아주질 않았다. 2000년 첫해 자신의 기량을 미국 무대에서 펼쳐 보이기도 전에 Q스쿨 테스트 3일을 앞두고 연습 도중 카트에서 떨어져 손목 골절상을 당하는 불운이 닥쳤다. 이 때문에 1년을 쉰 그녀는 2002년 2부 투어인 퓨처스로 미국 무대 재도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금액 210달러 차이로 4위에 머물러 3위까지 주어지는 자동 출전권 확보에 실패, 또 한번의 좌절을 맛봐야 했다. 210달러 차이 역시 돈 때문에 1개 대회를 출전하지 못해 나타난 결과였다.

    김주연은 2003년 그동안의 실패와 좌절을 딛고 ‘지옥의 사투’인 Q스쿨에 도전, 4년 만에 4위로 Q스쿨을 통과해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심리적인 압박감과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너무 앞서서일까, 경기마다 신통치 않은 성적을 내며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잃은 김주연은 결국 상금랭킹 160위, 총상금 9897달러를 손에 쥐고 다시 중앙무대에서 밀려나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몸고생, 마음고생 해가며 어렵게 따낸 라이선스가 수포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천성적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밝은 성격의 김주연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다시 Q스쿨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가끔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앞날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서서히 잃어버렸던 자신감도 되찾았다. 김주연은 마치 오뚝이처럼 Q스쿨 재도전에 성공, 더 이상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겠다는 독한 결심을 했다. 풀시드권을 다시 확보한 직후 엄마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김주연은 2004년 미 LPGA 퀄리파잉을 통과한 뒤 가장 먼저 한 말이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요”였다. 무명의 설움, 변방으로 다니며 아무도 봐주지 않는 2부 투어의 생활, 지긋지긋한 햄버거와 모텔 생활…. 그렇기에 올해 그녀가 1부 투어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던 것이다. 그녀의 18홀 벙커 샷이 단지 행운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5년간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김주연이기에 그 어떤 대회의 순간보다도 강한 정신력과 집중력으로 버디를 만들어 자신의 이름 ‘버디 킴’을 각인시켰다.

    김주연은 이번 대회 우승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녀가 2003년도 1부 투어에서 벌어들인 상금은 1만 달러도 안 된다. 그러나 이번 대회 우승상금(56만 달러)만으로도 2003년 총상금의 56배에 달하며 올 상금랭킹 10위에 진입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것이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KTF로부터 2억원의 보너스를 받게 되며 브리티시여자오픈, 에비앙마스터스, 삼성월드챔피언십, 미첼컴퍼니LPGA토너먼트오브챔피언스, ADT챔피언십 등 초청대회에 모두 참가할 수 있어 활약에 따라 1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KTF는 김주연에게 전담 현장 매니저 한 명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동안은 여동생과 함께 투어 생활을 해왔으며, 아버지 김용진(49) 씨가 간간이 딸의 경기를 도와왔다. 이외에도 각종 CF 출연 섭외가 들어오고 초청료 및 LPGA 대우가 달라져 특A급 선수 대우를 받게 된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신데렐라로 변신한 것이다.

    부와 명예 한몸에 … 자고 나니 신데렐라

    김주연은 US여자오픈 우승으로 코리아 빅 3에 부상했다. 메이저타이틀을 거머쥔 박세리, 박지은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아직 스물네 살의 어린 나이기 때문에 코리아 넘버1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아버지 김용진 씨는 2000년 Q스쿨서 자신이 운전하던 중 김주연이 손목 부상을 당해 지금껏 죄인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고질병이었던 손목 부상이 완쾌되면서 270야드를 넘나드는 강력한 드라이브 샷과 아이언 샷 정확도가 향상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차 있다. 여기에 최근 퍼터를 교체한 뒤 퍼팅감까지 살아나고 있어 올 나머지 대회 돌풍의 중심에 서 있다. 176cm, 68kg의 당당한 신체 조건은 외국 선수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으며, 동계훈련 기간 하루 연습량이 평균 10시간을 넘을 만큼 연습벌레로도 통한다. 언어소통을 위해 영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덕에 지금은 인터뷰를 완벽하게 소화해낼 만큼 원활해졌다.

    김주연은 골프를 시작하는 후배들의 희망이며, 오랫동안 경기 불황을 겪고 있는 한국민들에게 제2의 박세리로 평가받고 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을 인내한 결과로 우승을 일궈냈기에 그녀의 ‘벙커 샷’ 한 방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감동과 희망을 주고 있다.

    정상에 서기까지 쇼핑은커녕 화장조차 즐기지 않고 오로지 골프를 위해 노력해온 당찬 스물네 살의 김주연은 모처럼 만에 국내에 밝은 웃음을 던져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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