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9

2004.11.11

울창한 소나무 양팔 환영 라트비아 E67번 국도

인구 적어 별장 같은 집 띄엄띄엄 … 65살 자전거 여행자 ‘보며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 확인

  • 글·사진=행창/ 승려 haengchang17@yahoo.co.kr

    입력2004-11-04 18: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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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창한 소나무 양팔 환영 라트비아 E67번 국도

    리가의 옛 시청사.

    대지 가득 깔린 석양 속 라트비아 국경검문소. 간단한 입국카드를 작성하는 것으로 수속이 끝났다. 다가오는 어둠을 안고 국경지대로 접어드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치안이 안전한 유럽에서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

    라트비아 국경에서 수도 리가까지는 80km 남짓 거리. 하루면 충분하다. 국경을 지나 도로변의 민가에 양해를 구하고는 텐트를 쳤다. 사람들의 얼굴이 옆 나라 리투아니아보다 한층 밝다. 라트비아의 경우 발틱 부족으로 불리는 원주민이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이곳에 뿌리를 내려왔다. 명실상부한 발틱의 주인이다.

    전체 인구 240만여명 가운데 약 60%인 150만명가량이 라트비아인이고, 나머지 90만여명은 이 지역이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시절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이다. 발틱3국이 힘을 합쳐 옛 소련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룩한 지 10여년밖에 경과하지 않아, 식민지 시기의 잔재인 러시아어가 아직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역사의 청산이란 말이 있지만, 역사는 쉽게 이루어져도 청산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한두 세대의 희생쯤은 가볍게 요구하는 것이 역사의 잔인한 습성이다.

    독립 10여년 수도는 ‘리가’ … 러시아어 아직 사용

    라트비아에 입국한 다음날 오전 4시 기상.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과 요가로 30분, 세면, 가벼운 아침식사, 짐 정리와 텐트 접기, 마지막으로 자전거에 타기까지, 매일 하는 출발 준비에 2시간가량이 걸린다. 목적지가 대도시일 경우, 일찍 출발해야 한다. 교통량이 많고 길이 복잡한 도시에 진입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뿐 아니라 대개 도시 외각에 있는 캠핑장까지의 이동시간 등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20~30m 높이의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진 국도 E67번. 상쾌한 아침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끝없이 달려도 국도 주변 풍경에는 변화 하나 없다. 가지치기를 한 소나무 숲 사이 햇살 아래,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선명한 자연의 색상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저 소나무 숲이 이어지는 공간이건만 지루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정오쯤, 숲 속을 빠져나와 평원 위로 난 국도 저편에서 자전거 여행자가 달려오고 있는 게 보인다. 헬멧 안 쓴 머리가 하얗다. 길을 건너 다가가니 할아버지! 자전거로 장기 여행을 할 수 있는 나이는 40대 초반까지라고 생각했던 내 상식이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65살이란다. 프랑스 출신으로 파리를 출발해 북극권의 노르드캅까지 갔다가, 핀란드와 발틱3국을 거쳐 파리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충격에 충격을 더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산악지대 해안도로로 이어지는 노르웨이 종단 코스는 자전거 고수들도 피해가는 길이다. 구식 자전거와 색이 완전히 바랜 장비들을 보고 언제 적 것인가 물었다. “30년 전 것들.” 내 이번 여정의 동반자인 체코산 중고 자전거가 20년 전 것인데 장비로 10년, 인생으로는 25년 대선배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아직 현역인 선배님을.

    얼마 전에 한쪽 팔로 자전거 여행을 하는 폴란드 친구를 만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찾아온 충격으로 내 ‘작은 하드디스크’는 정리가 되지 않았다. 기존의 사고가 완전히 깨지면서, 난 새로운 화두를 얻었다.

    울창한 소나무 양팔 환영 라트비아 E67번 국도

    곧게 뻗은 나무가 유럽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라트비아의 숲 풍경.

    한국 출신의 한 경영인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지만, 나는 자전거 여행 과정에서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깨우침을 얻는다.

    국도를 따라 이어지던 숲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탁 트인 강줄기 위에 100m는 족히 돼 보이는 거대한 현대식 다리가 뻗어 있다. 다리 너머에 활기가 넘쳐 흐르는 도시, ‘발틱의 수도’라는 애칭이 붙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가 펼쳐져 있다. 아직 긴 태양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간대다. 벽돌길로 이어지는 옛 시가지에 접어들어 자전거를 끌면서 동화 속에 나오는 듯한 아름다운 옛 시청사 광장까지 전진했다. 빠르고 생기 넘치는 사람들 사이로 항구도시 특유의 역동감까지 뒤섞여 있다.

    텅 빈 주머니, 한국 식당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존재’

    시 서쪽 작은 섬의 야영장은 관광안내소에서 2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유럽의 캠핑족들을 위해 큰 전시장 뒤쪽 잔디밭을 여름 한철 야영장으로 운영하는 곳인데, 가격이 상당히 비쌌다.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은 20유로(3만원 정도)가 전부. 원고료가 들어오는 다음주까지는 어떻게든 이 돈으로 연명해야 한다. 사정을 설명하고는 반값에 할인을 받았다. 먼저 텐트를 치고 짐을 집어넣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면 몰라도, 물가가 서유럽 수준인 대도시에서 더 머무는 것은 자폭행위나 다름없다. 짧은 시간 안에 옛 시가지를 돌아보고 빠져나갈 수밖에.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도 잘 어울리는 옛 시가지의 중세풍 거리를 한 바퀴 돌고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짊어진 채 캠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섬이 바라다보이는 옛 시가지 옆길을 막 도는 순간, 유리창 너머에서 한글로 쓰인 표구로 장식된 한국 식당과 마주쳤다. 리가에 사는 고려인(카레이스키)이 경영하는 한국 음식점이 있다는 이야기는 얼마 전 만난 한 한국 여행자한테서 들은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음식다운 한국 음식을 맛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그러나 인생을 막 살 수는 없다. 한국 식당, 현재의 나에게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존재다. 열린 식당문 앞을 스쳐 지나가는데 코끝을 자극하는 한국 내음, 순간 내가 처한 현실에 가슴이 찡해졌다. 검은 물결이 이는 강과 바다가 맞닿는 지점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텐트로 향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끊이질 않는다. 주머니 사정상 하루 더 머물 형편이 아니라 비에 젖은 텐트를 정리하고 출발했다. 동서로 길게 펼쳐진 시내를 벗어나, 다시금 국도 E67번에 올랐다. 여정을 계획할 때는 수도 리가 동부쪽 70km 지점에, ‘라트비아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가우야 국립공원을 통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루에 한 끼만 계산해도 겨우 2~3일 식량을 구입할 수 있을 만큼의 경비만 남은 상태라 선택의 여지 없이, 해안선을 따라 에스토니아로 바로 들어가는 단거리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지는 국도 중간 중간, 왼편으로 검푸른 발틱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틱 나라들의 경우, 국토면적은 그리 큰 편이 아니지만 인구가 워낙 적은 터라 1km 간격의 숲 속에 마치 작은 별장 같은 집들이 띄엄띄엄 있다. 완전히 자연 속에 묻혀 살 수 있는 환상적인 환경이다.

    울창한 소나무 양팔 환영 라트비아 E67번 국도
    북쪽 에스토니아에서 내려오는 자전거 여행자들이 몇 명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두 명의 여성 자전거 여행자가 달려오고 있는 게 보인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멀리 뉴질랜드에서 온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와 50대 중반의 아주머니로 모녀 사이다. 스웨덴에서 출발해 폴란드를 향하고 있단다. 건장한 남자도 하기 힘든 자전거 여행인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리가 시내지도와 캠핑장 위치를 알려주고는 바다 건너 뉴질랜드에 한번 들르라는 그들을 떠나보내고 또 출발이다. 자신들의 길을 달려가는 사람들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시장통 거리에서, 또 달리는 국도 위에서 삶과 인생에 대한 화두를 얻고 그 답을 찾아 길을 달리는 여정이다.

    리가를 출발한 지 이틀째 정오, 핀란드만을 접하는 발틱3국의 가장 북쪽 에스토니아로 접어드는 라트비아-에스토니아 국경선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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