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6

2004.10.21

광양항 죽어야 부산항 산다고?

외국 선주 눈에는 ‘하나의 항구’ … 경쟁보다는 동반자로 ‘시너지 효과’ 노려야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10-14 10: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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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과 광양은 모두 ‘철의 실크로드’의 기착 및 종착지를 꿈꾼다. 육ㆍ해ㆍ공을 아우르는 종합물류 기지로 거듭나겠다는 구상이다. 두 곳 모두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광양항 죽어야 부산항 산다고?
    50년 동안 1m2에 광양은 360원, 부산은 480원에 땅을 내드리겠습니다.”

    5월27일 ‘부산·광양항 투자유치설명회’가 열린 일본 후쿠오카시 뉴오타니 호텔. 설명회 주최자인 해양수산부(이하 해수부) 관계자들은 비싼 땅값으로 고민하는 일본 기업인들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을 쏟아냈다. 최종 가공라인이나 물류센터를 부산 혹은 광양에 두는 게 비용이 덜 든다는 해수부 측의 설명에 장내는 술렁였다. 헐값에 부지를 제공한다는 ‘달콤한 제안’에 ‘계산서’를 뽑기 위한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부산과 광양이 항만 세일즈에 혈안이 돼 있다. 배후단지에 해외업체를 입주시키지 못하면 동북아 물류 중심이 되겠다는 ‘포부’가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 다행스럽게도 일본을 중심으로 해외기업들이 하나둘씩 부산과 광양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경쟁력 확보를 위해 대형 컨테이너선에 물류를 실어 일단 부산이나 광양으로 옮긴 뒤 한국에서 포장 및 가공 과정을 거쳐 작은 배를 이용해 소비처인 중국 각지로 보낸다”는 시나리오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는 것.

    “선석 추가 건설 재검토”에 광양항 어수선

    그런데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며 해외기업 유치와 물류확보에 나서고 있는 부산과 달리 광양은 요즘 분위기가 어수선하기만 하다. 5월 일본으로 투자유치설명회를 떠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 국무총리 산하 국무조정실과 국회 예산정책처가 잇따라 ‘비용 대비 효과’를 내세우면서 광양항에 추가로 선석을 건설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친 데다, 이를 근거로 한나라당 부산지역 의원들이 “부산항에 ‘선택과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광양을 압박하고 있는 것.



    부산과 광양은 모두 ‘철의 ’의 기착 및 종착지를 꿈꾼실크로드거듭나겠다는 구상이다. 두 곳 모두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부산과 광양은 유럽-싱가포르-홍콩-부산, 광양-일본-미국을 잇는 ‘해양실크로드’와 부산·광양-중국, 러시아-독일-네덜란드를 잇는 육상실크로드의 접점에 자리잡고 있다. 유럽의 허브항구인 네덜란드 로테르담항과 함께 기착 및 종착지 구실을 할 수 있는 것. 선박을 이용한 부산에서 로테르담까지의 해상 운송거리는 1만9800km에 이르나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하면 9400km 넘게 단축된다.

    부산항, 광양항은 전두환 정부의 결정에 따라 1987년부터 양항(兩港·두 개의 항구) 정책에 의해 동시에 투자돼왔다. 80년대 중반까지는 부산에 ‘선택과 집중’해 부산항을 동북아 중심 항구로 키우겠다는 게 한국의 항만 정책이었다. 국토균형발전론이 힘을 얻으면서 80년대 후반 부산항과 광양항을 함께 개발하는 ‘투포트 시스템’이 설득력을 얻었다. 하지만 동북아 물류 허브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가던 광양은 김영삼 정부 시절 첫 번째 시련을 맞는다. 김 전 대통령이 부산신항 건설을 들고 나오면서 예산이 부산에 집중된 것. 이후 김대중 정부 때 다시 투포트 시스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광양항은 정권에 따라 ‘울고 웃었다’.

    광양항 죽어야 부산항 산다고?

    물동량 기준으로 세계 5위인 부산항.

    물류 중심지로 천혜의 조건 갖춰

    이렇듯 정부의 일관되지 못한 정책 탓에 오락가락하던 광양항이 또다시 시련을 겪고 있다. 국무총리 산하 국무조정실이 최근 광양항 선석 추가 건설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 국무조정실은 광양항의 물동량 처리 능력이 예상보다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연평균 27.1%씩의 증가를 전제로 2011년까지 33선석을 개발할 계획이었으나 2003년 말 현재 처리 실적(118만TEU·1TEU는 길이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이 하역능력(201만TEU)의 59%에 그친다는 분석에 근거한 것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항만에 투입된 투자비는 회수가 불가능하다”면서 투포트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같은 지적에 힘을 얻은 부산은 “시설 부족으로 인해 부산항의 경쟁력 약화가 가시화하고 있다”면서 “부산신항 건설에 역량을 집중하고 부산 제2신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관계자는 “투자 재원의 분산으로 부산항이 세계 5위로 추락했다”면서 “더 늦기 전에 부산항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산발전연구원 최도석 선임연구원도 “투자가 부산과 광양으로 분산돼 부산항까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면서 “물동량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광양에 쓸 돈을 부산신항으로 돌리는 등 예산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

    광양항의 물동량이 현재까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의 ‘비용 대비 효과’만으로 투포트 시스템에 대한 평가를 내려서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많다. 일부 전문가들은 김영삼 정부 시절 제대로 투자가 이뤄졌고, 역대 정부가 물동량 확보의 지원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광양항의 현재 모습은 달랐을 거라고 말한다. 또한 광양항 개발 재검토는 광양항뿐 아니라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광양만권 경제자유구역 활성화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일각에선 “항만 관련 산업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부산 인맥’이 광양항을 죽이려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광양항 물동량이 증가세를 나타내는 시점에서 재검토 주장이 쏟아져나오는 게 의심스럽다는 것. 실제로 해양 관련 전문집단의 상당수가 ‘부산 인맥’으로 분류된다. 물동량에서 광양항은 올 들어 22%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나, 부산항은 5%에 그치고 있다. 게다가 광양항과 부산항의 상호 역할 분담에 의한 효율적 대안 제시가 없는 등 재검토 평가의 전문성에도 의문이 제기된다는 지적이다.

    광양항은 물류 중심지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가 반경 1200km 안에 50여개에 이르고, 자연 재해로 인한 피해 가능성이 낮은 데다 수심(22m)이 대형 선박이 드나들기에 적합하다. 게다가 부산과 같은 ‘대형 도시’가 아니라는 점도 장점이 될 수 있으며, 투포트나 스리포트 시스템을 갖추는 게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또 한국무역협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화물의 80.7%가 집중되고 있는 부산항의 기능을 20%가량 광양으로 옮기면 연간 400억원의 물류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광양항이 당초 목표 물동량을 달성하지 못한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지목된다. 하나는 배후단지와 도로·철도·항만 등 인프라가 보강되지 못했다는 점이고, 역대 정권과 정부의 오락가락 행보로 인한 불확실성의 증대로 선주들이 확신을 갖고 광양항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게 또 다른 하나다. 광양은 “투포트 시스템을 추진한다면서 실제로는 부산항 위주의 정책이 이뤄졌다”고 여긴다. 이에 따라 정부가 나서서 체선(滯船) 체화(滯貨)에 시달리고 있는 부산항의 물동량을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해수부 “당초 계획대로 개발 계속”

    ‘부산항-광양항 논쟁’은 곧잘 지역주의 행태를 나타내면서 진행된다. 하지만 지역주의에 근거한 논쟁은 협소한 시각에서 기인했다는 분석이다. 부산항과 광양항의 거리는 130km가 조금 넘는다. 한국에서는 ‘두 개의 포트’이지만, 해상실크로드에선 사실상 ‘하나의 포트’다. 컨테이너선이 부산에 들어오건 광양에 들어오건 외국 선주 처지에선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부산항과 부산신항도 별개로 떨어져 있는 서로 다른 항구다. 국지적으로 부산항과 부산신항도 부산항 광양항처럼 서로 다른 포트인 셈이다. 광양항, 부산항, 부산신항 3개의 포트가 1개의 권역으로 묶여질 수 있다는 얘기다. 광양항과 부산항이 서로 경쟁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동북아 물류중심 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동반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

    중앙대 방희석 교수(무역학·한국무역학회 회장)는 “광양항이 죽어야 부산항이 사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산항이 죽어야 광양항이 사는 것도 아니다. 지역 이기주의 관점에서 부산항과 광양항 문제를 봐서는 안 된다. 부산항, 부산신항, 광양항 3개의 항구가 1개의 권역으로 묶여지는 형태로 발전시켜야 한다. 광양항은 배후 시설 개발이 더디게 이뤄지고 있지만 여러 면에서 우수한 조건을 갖고 있다. 투포트 시스템을 구상할 당시의 기본 계획대로 일관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게 두 항구가 모두 사는 길이다”고 지적했다.

    국무총리실의 재검토 지적에도 해수부는 당초 계획대로 광양항 개발을 계속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광양항 3-1단계 4선석(2006년 완공) 및 3-2단계 3선석(2008년 완공)을 추진키로 했고 배후단지 내 기업 유치와 철도·도로 등도 개발키로 한 것. 열린우리당도 일단은 해수부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향후 광양항의 물동량 추세 등에 따라 부산항에 ‘선택과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끊임없이 제기될 전망이다. 일관성 없는 정책에 ‘울고 웃은’ 광양항은 ‘불확실성의 터널’을 지나 부산항과 함께 신(新)실크로드의 기착 및 종착지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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