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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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에게 꺾인 ‘아랍선교의 꿈’

가난 속에서도 꿋꿋이 지켜온 16년 소망 물거품 … 이라크행도 돈벌이 아닌 아랍어 익힐 목적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07-01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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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인에게 꺾인 ‘아랍선교의 꿈’

    고 김선일씨(위 가운데)의 군 훈련병 시절 모습.

    나비가 되어 돌아왔구나! 선일이의 혼이로구나….”연둣빛 나비가 부산의료원에 마련된 빈소를 날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화에 앉았다. ‘망자의 혼’이라는 흐느낌을 들었는지 나비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유족들은 “죽고 싶지 않다”던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아버지 김종규씨(69)는 “테러가 나쁜지 좋은지, 전쟁이 옳은지 그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미어지는 건 아무런 힘도 없고, 잘못도 없는 내 착한 아들이 그 틈바구니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고 했다.

    서른네 살의 고 김선일씨가 온몸으로 떠안아야 했던 테러집단의 야만스러운 짓은 어떤 포장된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지구상의 이교도와 싸워야 한다”는 과격 이슬람 단체의 악행은 민간인을 맹폭한 미국의 만행과 비교해 오십보백보다. 유족들은 종교와 전쟁을 모른다. 받아들일 수 없는 핏줄의 죽음이 다만 비통할 뿐이다. 그에게도 이라크 전쟁이나 한국군의 파병은 속을 태우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직 꿈을 이루기 위해 아랍어를 다듬고 싶었을 뿐.

    “난 이슬람 사람들을 위해 일할 거야. 아랍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면 한다. 그러다 순교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8년)

    중동에서 선교사로 일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집을 나와 자취를 하며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믿음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친구의 말에 드나들기 시작한 교회는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이후 16년의 짧은 삶은 아랍에서 선교활동을 하겠다던 까까머리 시절의 소망을 이뤄가는 힘겨운 과정이었다.

    허망하게도, 야만스러운 전쟁은 16년의 노력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는 무슬림에게 이교(異敎)를 전파하는 선교사도 아니었고, 미군 납품업체의 직원이라기보다 다만 아랍문화와 아랍어를 배우는 ‘어학연수생’에 가까운 신분이었다. 자신의 눈에 비친 이라크인들 역시 친절하고 마음씨 고운 친구일 따름이었다. 이라크인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것 같았다는 게 자취생활을 함께한 친구 심성대씨(35)의 전언이다.



    이라크 여성과 결혼 생각할 정도로 이슬람 문화 사랑

    그는 이슬람 문화를 사랑했다. 현지에서 사귄 이라크 여성과의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 피랍 직전엔 미군 매점(PX)에서 만난 24살 이라크인 연인의 집에 6월 초 교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들를 계획이라며 들떠 있었다고 한다. 외국어대 아랍어과 동기 박재현씨(24·여)는 “‘오빠는 중동 사람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인지 아느냐’고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

    1970년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 하리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고학생으로 삶의 절반을 보냈다. 부산 용인고를 졸업한 후 성심외국어대, 부산신학교, 한세신학대학원, 외국어대 등 모두 4군데 대학과 대학원에서 아랍어 영어 신학 선교학을 전공했다. 닥치는 대로 일감을 찾아 학비를 마련하면서 4곳이나 대학을 다닌 이유도 물론 목회자가 되겠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선일이의 삶은 시종일관 고등학교 시절의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었다. 외대 아랍어과에 편입한 것도 이슬람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라크에 간 이유도 아랍어를 가장 빨리 익히고 문화를 배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고등학교 때 부산에서 함께 자취한 친구 김화성씨·34)

    종교에 대한 신념은 깊었으나 포연이 가득한 이역만리를 겁 없이 찾아갈 만큼 의지가 강하거나 특별히 심지가 굳은 편은 아니었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다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다. 이라크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거주했던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이웃들은 “조용한 고학생이었다”고 그를 기억했다.

    아랍인에게 꺾인 ‘아랍선교의 꿈’

    6월26일 인천공항을 통해 고 김선일씨 유해가 도착하고 있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인스턴트식품을 사가던 학생이었다.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 달리 술하고 담배 사는 걸 보지 못해 바르게 자란 청년이라고 여겼다. 후에 동시통역 대학원 준비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줬다.”(친구 심씨의 자취방 인근 가게 주인 김모씨)

    이라크에 가기 전 가장 마음에 둔 것은 ‘신변 안전’이었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과 한국군 파병을 ‘남의 일’처럼 여겼을 정도로 국제정세나 국내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에 대한 생각도 또래의 친구들과 달리 매우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굳이 위험한 이라크를 선택한 이유는 학비를 벌 요량보다 오직 선교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위해서였다. 그는 이라크에 가기 직전 “형식은 취업비자지만 선교가 주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월급도 월 20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요르단 같은 곳이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망설여지지만 이라크라도 가지 않으면 중동 쪽에서 공부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다.”(2003년 6월)

    이라크 가기 전 안전한 실내근무만 하는 줄 알아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은 이라크에서의 안전을 담보했다고 한다. “PX나 안전한 실내에서만 일하게 될 테니 걱정을 놓으라”는 게 김사장의 말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포탄과 총소리에 무감각해질 정도로 자주 전장을 넘나들었다. 그는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배달 일까지 하고 있는데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경호원과 함께 가니 그래도 안전한 편이다”고 자위하면서도 “한국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했다.

    이라크에서 그는 배달 매점판매원 통역 등의 일을 했다. 일을 파하면 기독교 신자들과 바이블스터디(성경 공부)를 하고 이라크인 동료들에게 간단한 설교를 하기도 했다. 또 이라크 한인교회에도 틈나는 대로 들러 선교사의 길을 닦았다고 한다. 이라크민병대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지구촌나눔운동본부 한재광 부장은 이라크 한인교회에서 만난 김씨를 “조용하고 신앙심이 매우 깊은 신자였다”고 기억한다.

    아랍인에게 꺾인 ‘아랍선교의 꿈’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 미네르바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학생들이 고인의 넋을 기리며 합동분향을 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온몸으로 경험한 전쟁은 참혹했다. 신음하는 이라크의 현실과 미군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소름 끼치는 행동을 목격하면서 호의적이었던 미국에 대한 인식도 무너져내린다. 친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나는 미국인, 특히 부시와 럼스펠드, 미군의 만행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적었다. APTN이 입수한 동영상에서 “진짜 테러리스트는 무장단체가 아니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라고 했던 건 살아남기 위해 꾸며낸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하느님이 나를 여기 이라크에 보내신 것이 이유 없이 보내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확실히 깨달은 것은 내가 이래 가지고 선교사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턱도 없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까지 들었다. 약자에 대한 마음도 어느 정도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고… 소름 끼치는 미국의 만행을 담은 사진도 가지고 갈 거다.”(5월15일)

    그는 이제 고향 땅에 잠들었다. 아버지 김종규씨는 “결국 힘있는 사람은 살고, 힘없는 사람은 죽는 게 아니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숭고한 신앙과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된 야만스런 세상에서 참혹하게 희생된, 종교와 공부밖에 몰랐던 한 청년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수라를 지나 나비처럼 훨훨 날았으면 좋으련만 한동안 세상은 그를 놓아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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