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1

2004.04.22

‘트렌드’ 콕 집으면 ‘불황탈출’ 찜!

‘유행 예감’선점이 경영의 바로미터 부상 … 대기업들 트렌드 연구·분석에 각별한 노력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4-14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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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렌드’ 콕 집으면 ‘불황탈출’ 찜!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2003년 히트상품들.

    ‘트렌드 파파라치’. 말 그대로 트렌드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기록하는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TTL 광고로 유명한 광고제작사 ‘화이트’가 지난해 8월 개설한 사이트 ‘티파파닷컴’(www.tpapa.com)이 주무대다. 이들은 생활 곳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것, 재미있는 것들을 티파파닷컴을 통해 알리고 그 대가로 현금 교환이 가능한 PA(티파파닷컴에서 통용되는 현금단위)를 받는다. 그래서 티파파닷컴 사이트에는 온갖 ‘유행 예감’이 넘쳐난다.

    그러나 ‘화이트’가 자랑하는 진짜 경쟁력은 소수 정예로 구성된 ‘오프라인 티파파’들이다. ‘화이트’ 강수현 이사는 “이미 9년 전부터 시작한 일이다. 광고, 문화 쪽에 관심 있는 대학생들을 뽑아 교육 겸 토론 작업을 계속해왔다. 비전문인력이라 트렌드 분석까지 하는 건 무리지만 생생한 정보를 발빠르게 주워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삼성경제硏·LG애드 등 가장 앞서가

    ‘화이트’는 현재 20대 중심으로 구성된 티파파닷컴 사이트를 전(全) 세대 트렌드 리더 커뮤니티로 발전시키고자 일시 폐쇄를 단행할 예정이다. 강이사는 “광고회사에서 문화 콘텐츠 에이전시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 시점에 맞춰 더 폭넓은 세대의 문화산업 리더들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장으로 탈바꿈하려 한다. 어떤 사업을 하든 소비자의 정확한 ‘니즈(Needs)’를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꼭 광고회사, 문화기업이 아니어도 정확한 트렌드 분석은 이제 경영의 ‘알파요, 오메가’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시장 변화를 읽는 역량에 따라 기업 실적도 양극화하는 현상이 전 업종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 각 기업의 트렌드 분석 역량은 아직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균값’과 ‘보편적 성향’을 중시하는 정량적 방법(전화, 우편, 인터넷 등을 활용한 대량·저비용 조사)에 대한 의존도가 여전히 높은 데다, 트렌드 분석을 그저 ‘유행은 좀 빨리 아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경영자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순화 수석연구원은 “경기 침체 속에서도 고급품에 대한 수요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주관에 따라 구매를 결정하는 개성 및 가치 중시 소비 성향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요즘 소비자들은 구매 결정시 제품의 기능적 속성보다 감성적 특성, 브랜드의 상징성 등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트렌드 분석이 고객 요구에 대한 논리적 설명뿐 아니라 정서적, 감각적 이해를 병행하는 방향으로 더욱 정교화·심층화돼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설명했다.

    LG애드 오명렬 브랜드전략연구소장도 “2000년대의 한국사회는 극단적 다양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 나이, 성별, 학력, 소득 수준 등의 변수만으로는 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유형을 짐작할 수 없다. 앞으로의 트렌드 분석은 바로 이 같은 문제의식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트렌드’ 콕 집으면 ‘불황탈출’ 찜!

    ‘티파파닷컴’에서 활동 중인 트렌드 파파라치들.

    ‘추세’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는 ‘트렌드’란, 단편적 현상이 어떻든 전체로서의 대세가 어떤 한 방향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단기변수를 넘어 지속되는 장기적 경향을 의미하는 것. 그런 만큼 포착하기도,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쉽지 않다. 오소장은 “이미 수치화할 수 있거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트렌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컬러 팬티가 있다 하자. 이전에 컬러 팬티는 목욕관리사들이나 입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입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만약 컬러 팬티가 ‘목욕탕용’이던 시절에 향후 그것이 ‘주류’가 될 것임을 잡아냈다면,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트렌드 분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미시’, ‘몸짱’ 등의 말을 초기에 끄집어낸 팀은 트렌드 분석에 성공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트렌드 분석에 가장 앞서가고 있다고 평가받는 집단은 삼성경제연구소, 제일기획, LG애드, 제일모직, LG경제연구원, 신세계백화점 등이다. 나름의 공신력을 획득한 이들의 트렌드 연구는 기업 활동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분석틀을 제공하고 유행을 창출하는 등 다방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모두 삼성그룹과 LG그룹 계열사들인 점이 이채롭다.

    국내기업들 아직은 표면적 의견 청취 치중

    삼성경제연구소는 매해 12월 마지막 주에 한 해의 트렌드를 정리하는 ‘10대 히트상품’ 보고서를 내고, 매해 1월 첫 주에는 ‘새해 10대 트렌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신현암·최순화·황인성 수석연구원, 이정호 연구원 등이 ‘대표 선수’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연구소가 발행하는 CEO 인포메이션 등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트렌드’ 콕 집으면 ‘불황탈출’ 찜!

    ‘모토로라’의 신제품 출시 기념 패션쇼에 등장한 모델.

    제일기획의 트렌드 연구 부문을 이끄는 건 브랜드마케팅연구소다. 김익태 소장은 “클라이언트와 직접 대면하는 25명의 어카운트 플래너(AP)들이 특정 제품권 내의 트렌드 분석에 힘을 기울인다면, 15명의 연구원이 있는 연구소는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크고 지속적인 변화를 잡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P세대’나 ‘와인세대’의 등장을 예견한다든가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LG애드의 트렌드 분석 핵심부는 브랜드전략연구소다. 제일기획의 AP에 해당하는 6개 조직 30명의 컨슈머 스페셜(CS)들과 긴밀히 협조해 유의미한 트렌드를 짚어낸다. 2002년 11월 발표한 ‘1318 따라잡기’ 등이 연구소가 생산해낸 대표 리포트다.

    제일모직이 매 분기 발표하는 패션 트렌드 보고서는 관련 업계는 물론 소비재 산업에 종사자들한테서 인기가 높다. 제일모직 내 삼성패션연구소 서정미 수석연구원은 “연구 결과는 300만원의 회비를 낸 회원들에게만 공개한다. 매 분기 설명회 때는 1300명 이상의 회원이 참가해 성황을 이룬다. 패션은 트렌드가 가장 빨리, 구체적으로 반영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타 업종 경영진의 관심도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들 트렌드 분석 리더들은 하나같이 “정량적 방법만으로는 더 이상 고객의 진정한 ‘니즈’를 밝혀낼 수 없다. 태도 관찰, 심층 인터뷰 등 정성적 마케팅 조사기법의 적극적 도입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정성적 기법에는 지메트(고객의 ‘니즈’를 비언어적,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은유적으로 유도, 파악하는 분석 방법), 사다리기법(제품의 물리적 특성과 고객 가치 간의 연결관계를 파악, 심리지도를 그리는 조사 방법), 민속학·인류학 연구방법론을 원용한 참여관찰, 전문가 모니터링, 포커스그룹 인터뷰 등이 있다. 삼성전자 마케팅연구소 조은정 부장은 “하버드 경영대 잘트만 교수는 말로 표현되는 고객의 ‘니즈’는 5%에 그친다는 주장을 폈다.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무의식적 ‘니즈’까지 고려하는 것이 정성적 기법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통계의 오류를 극복하고 다양한 소비 변화를 정확히 집어내는 해석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순화 수석연구원은 “선진기업들은 ‘잠재 니즈 발굴’에 주목하는 반면, 국내 기업은 표면적 의견 청취에만 치중한다. 현재의 취약한 고객분석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점검해야만 고객 이해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성적 기법에 근거한 잠재 니즈 발굴, 인문·사회 및 기초과학 분야 전문인력 스카우트를 통한 새 조사방법론 개발, 소비자와의 접점을 최대화하는 현장 지향 체질로의 전환, 마케팅 리서치 전담 부서 설치 등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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