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9

..

성폭행 불안에 떨고 무관심에 한숨

‘고통 두 배’ 여성 노숙자의 삶 … 남성 비해 지원체계 태부족, 주위 눈총도 엄청난 짐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4-01 16:3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어느 사회에나 밝은 부분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 그늘은 항상 존재해왔다. ‘주간동아’는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차별받고 있는 우리 사회 음지의 사람들을 조명하는 ‘차별을 넘어’ 시리즈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남성 노숙자의 그늘에 가려져 방치돼온 ‘홈리스(homeless) 여성’의 삶과 고통이다.<편집자 주>
    성폭행 불안에 떨고 무관심에 한숨

    3월26일 밤 10시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 여장을 푼 홈리스 여성 이옥경씨(가명)가 쪽지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3월25일 밤 10시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역사 중앙의 ‘만남의 광장’에 하나 둘 노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낮 승객들의 쉼터이자, 음악가들의 연주무대인 이곳은 밤이 되면 노숙자 숙소로 탈바꿈한다. 누런 종이상자로 만든 공간은 훌륭한 쪽방이 되고, 10여명의 노숙자들은 그 속에서 땟국물에 절은 담요를 덮으며 잠을 청한다. 이 자리를 메운 것은 대부분 남성 노숙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머리가 희끗한 여성 노숙자가 유독 눈에 띈다. 4년째 거리 생활을 해왔다는 이옥경씨(55·가명)는 남성 노숙자들과 거리를 두고 앉아 무언가를 쓰는 데 열심이었다.

    밤마다 남성들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

    “남자들 사이에서 불편하지 않으세요? 여기서 왜 주무세요?”

    “남자들 사이에서 무섭지. 그래도 어떡해? 남편이랑 이혼하고, 구로동에 있는 우리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데. 그래서 지금 노태우 대통령한테 빼앗아간 내 주민등록증 돌려달라고 편지를 쓰는 거야.”



    기자가 불쑥 던진 질문에 이씨는 두서없는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의 시계는 1990년 노태우 정권 시절에 멈춰 있다. 빛바랜 담요와 허름한 배낭이 그의 전 재산. 누군가의 공격이 두려운 듯 한껏 웅크린 자세엔 경계심이 풀리지 않는다. 이씨는 자신의 옆에서 잠을 청할 25살의 젊은 여자 노숙자를 기다린다고 했다.

    대한민국 홈리스 여성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노숙자 하면 으레 남성을 떠올리는 우리에게 ‘여성 노숙인’의 존재는 낯설기만 하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한 노숙자들은 대부분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린 남성’으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이씨와 같은 여성 거리 노숙인이 서울에만 50여명, 쉼터에 머무르는 홈리스 여성이 수백명을 훨씬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등 그 숫자가 지속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여성 노숙이 갖는 위험성은 남성 노숙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여성 노숙인은 여성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하지만 전체 노숙인의 3~5%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이들은 늘 관심 밖이었다. 비교적 전문화된 남성 노숙인 지원체계에 비해 홈리스 여성에 대한 지원체계는 너무나 부족한 실정이다.

    현재 오갈 데 없는 ‘홈리스 여성’이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은 서울시가 지정한 다섯 개의 쉼터와 숙박, 목욕을 해결할 수 있는 ‘여성 드롭인(Drop-in) 센터 열린집’(이하 열린집)이다. 쉼터의 경우 30~50명의 홈리스 여성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자활의 기반을 마련한다. 그러나 정신지체나 정신질환, 알코올중독을 앓고 있는 홈리스 여성은 쉼터의 공동생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거리를 떠돌기 일쑤다. 지속적 치료가 필요한 이들이 사회복지시설에 들어가는 것은 더욱 어렵다. 환자의 신분을 보장할 만한 가족 증명과 복잡한 등록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 만들어진 ‘열린집’은 홈리스 여성들이 밤에 들러서 목욕을 하고,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역시 홈리스 여성들을 지속적으로 치료하고 돌보기엔 열악한 여건이다.

    3월26일 밤 서울역 뒤편의 ‘열린집’. 밖을 떠돌던 독신 홈리스 여성들이 오후 7시부터 하나 둘 모여들었다. 컵라면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거나, 삼삼오오 모여 ‘오늘의 돈벌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열린집이 탄생하기 전까지 이들의 상당수는 영등포역이나 서울역, 을지로3가 지하도에 기거하며, ‘꽃꼬지(여성 노숙자의 구걸)’와 공공근로로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밤에 정기적으로 기거할 곳이 생겨 노숙 생활은 면한 셈. 낮에는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에 들어와 잠을 자는 것이 이곳의 수칙이다. 1년 전만 해도 서로를 경계하던 이들은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고 식사를 함께하기 시작했다. 정신지체자나 정신질환자, 알코올중독자에서 평범한 모자 가정까지 구성원들의 면면이 다양하다. 을지로입구 지하도를 주름잡았던 김금례씨(55·가명)는 알코올중독 증세 때문에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다. 우울증에 걸린 권은자씨(45·가명)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해 혼자 방 한구석에 숨어 있다. 가슴속 깊이 간직한 상처는 서로 모른 척하는 것이 불문율이지만, 말하지 않아도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

    성폭행 불안에 떨고 무관심에 한숨

    3월24일 오전, 모자 가정을 위한 전용 쉼터 ‘내일의 집’에 머무르는 이경순씨(23)가 빨래를 널고 있다(왼쪽). ‘여성 드롭인 센터 열린집’에서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서정화 실장.

    열린여성센터(열린집)의 서정화 소장은 “성폭력의 위협에 노출된 여성의 노숙 생활은 더 고통스럽게 악화된다”고 설명했다. 정신지체 2급인 김은숙씨(27·가명)는 재혼한 아버지에게서 버려져 거리 노숙 생활을 시작한 뒤 거리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해 임신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는 김씨는 아이를 입양시킬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무료로 지급되는 노숙자 급식을 먹고, 주말에는 교회를 전전하며 구제비를 버는 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또한 집단 성폭행의 경험은 홈리스 여성을 매매춘에 쉽게 접근하도록 한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정은경씨(35·가명)는 서울역 남성 노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짱’이다. 타고난 미모 덕분이다. 어린 시절 정신질환으로 가족에게 버림받은 그는 일찍 자신이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추운 밤을 따뜻하게 나기 위해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누구와도 자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녀부양의 의무’는 홈리스 여성이 짊어진 또 다른 짐이다. 노숙인다시서기 지원센터의 한 관계자는 “아동을 동반한 모자(母子) 노숙인이 증가 추세에 있다”고 밝혔다. 가정폭력과 카드빚 등 경제난으로 파생된 모자 가정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 과거의 경우 정신질환이나 정신지체로 버려진 여성들이 거리노숙인으로 전락했다면, 최근에는 극단의 가정폭력이나 가정불화 끝에 홈리스가 된 여성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모자 가정을 위한 쉼터인 ‘내일의 집’을 운영하는 성수삼일교회의 정태효 목사는 “어린 자녀가 있는 여성은 일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면서 “자녀가 딸린 홈리스 여성에 대한 양육비 지원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남성 노숙자의 3~5%밖에 되지 않는 숫자라 하더라도, 남성과 여성 노숙자에게 지원예산을 일괄 배분하는 정책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것. 양육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모자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1~2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그나마 마련된 ‘모자 쉼터’에 7살 이상의 사내 아이를 둔 어머니가 입소할 수 없는 상황은 홈리스 여성에게 더욱 불리한 사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성을 거리로 내모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02년 발표한 ‘노숙자 자활지원체계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여성이 홈리스화되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가정폭력(37%)과 가정불화(24.7%)였다. 남성 노숙자와 달리 실직, 파산 등의 경제적 문제 외에도 가정에서 살 수 없는 가족관계의 문제나 심한 정신, 정서상의 문제로 인한 홈리스가 많았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가난, 성장기 가정의 불화와 해체, 학습 및 인성교육 기회의 박탈, 낮은 임금 노동시장에로의 조기 진입, 빈번한 폭력에의 노출이 총체적으로 홈리스 여성을 만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정부, 여성 홈리스 문제 대처에 소극적

    성폭행 불안에 떨고 무관심에 한숨

    3월26일 밤 ‘열린집’에 모인 ‘홈리스 여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성 노숙자 쉼터가 시설별 특화나 전문화가 이뤄지지 않고, 여성복지시설과의 연계체제가 부족한 것은 홈리스 여성을 소외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다. 남성의 경우 알코올중독자의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비전 트레이닝센터’ 등 전문화된 지원 시스템이 존재하지만, 소수의 여성 노숙인들은 이러한 혜택에서도 배제돼 있다. 더욱이 여성 노숙자 쉼터는 보호대상이 혼재돼 생활하고 있고, 서비스 또한 단편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장애인, 노인, 정신요양시설 등의 특화된 서비스가 필요한 대상이 그저 거리로 나가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실정이다.

    노숙자 쉼터의 열악한 환경은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해주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성수삼일교회가 운영하는 ‘내일의 집’의 경우 30여평의 공간에 최대 30명의 모자 가족이 생활하고 있다. 30명의 사람들이 매일 아침 한 개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전쟁을 치를 정도로 이들의 삶은 노숙 생활만큼이나 불안정하다. 1년간 ‘내일의 집’에 머물러 온 이경순씨(23)는 “세 살배기 딸 수아가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고통스러웠다”며 “최소한 가족이 지낼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위정희 사무국장은 “홈리스 여성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주거 공간을 확보해주거나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며 “주거, 경제, 의료, 심리, 가족 등 전반적 측면의 다양한 보건복지 서비스 및 정책·제도적인 지원이 종합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제도적 한계보다 홈리스 여성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7년간 노숙 생활을 해온 김금례씨(55·가명)는 사람들의 냉대에 못 이겨 매일 술을 마신다고 했다.

    “서울역 공안들이 만날 나만 잡아. 차표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이여. 일반 사람들은 모두 지나가게 하면서 나는 왜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거여. 요즘은 잘 씻고 다니고 냄새도 안 풍기는데. 인간 취급도 못 받고 사는 거지, 뭐여.”

    열린집의 서정화 소장은 ‘극단의 빈곤’에 처한 홈리스 여성의 존재조차 부정되는 현실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한다. 소관 부처의 소극적 대응에 답답함만 쌓여갈 뿐이다.

    “홈리스 여성 문제를 다루는 부처는 모두 소극적인 입장이에요. 대개 가정폭력이나 가정불화로 여성들이 쉼터를 찾는 만큼 서울시 노숙자 대책반은 이들 문제를 ‘여성부’에서 다뤄야 한다고 발뺌합니다. 또 여성부나 여성단체는 중산층 여성의 권리 찾기에 집중할 뿐 극빈층 여성의 삶에는 관심이 없죠. 그럴수록 홈리스 여성의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에 머물고 맙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