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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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밑천으로 ‘가난 탈출에 베팅’

석유동맹국 ‘예멘’을 가다 … LNG 사업도 활기 ‘한국에 강한 러브콜’

  • 예멘=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4-01 12: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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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 밑천으로 ‘가난 탈출에 베팅’

    경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마리브 광구와 유전 내 주요 시설(작은 사진).

    아랍에미리트공화국 두바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지 두 시간. 현지 시각으로 정확히 오전 8시30분 예멘의 수도 사나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중동의 작열하는 태양’을 처음 만난다는 생각에 내심 긴장했다. 그러나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는 순간 처음 든 느낌은 ‘상쾌하다’는 것이었다. 공기는 비스킷처럼 바삭했고 하늘은 청명했다. 사나는 해발 23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다. 일반적으로 고온다습한 중동 지역 기후와 달리 연평균 0~25℃의 쾌적하고도 건조한 날씨를 유지한다.

    예멘은 아라비아반도 남서쪽 끝에 있는 나라다. 성경에 나오는 ‘시바의 여왕’이 살던 땅으로, 3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중동 지역 문명 발상지 중 하나다. BC 12~AD 6세기, 인도와 아프리카를 잇는 무역로로 번성을 누리며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예멘은 가난하다. 사막과 준사막이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척박한 국토. 1990년 북예멘(예멘아랍공화국)과 남예멘(예멘인민민주공화국)의 통일로 예멘공화국이 설립됐으나 경제 발전을 향한 도정은 멀기만 하다. 그래도 이들을 살게 하는 건 바로 그 사막에서 터져나온 원유와 천연가스다.

    한국은 이런 예멘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다. 1984년 SK(15.925%), 삼환(3.675%), 현대종합상사(2.45%), 한국석유공사(2.45%) 등은 예멘 최대 유전인 마리브 광구에 총 24.5%의 지분을 투자했다. 그리고 97~98년, SK컨소시엄(SK, 삼환, 한국석유공사)과 현대종합상사는 예멘의 ‘건국 이래 최대 국책사업’이라는 예멘LNG(천연액화가스) 프로젝트에 주주사로 참여했다. 마리브 광구에서 원유뿐 아니라 확인매장량만 10.2Tcf(10조2000억 세제곱피트)에 달하는 가스가 발견된 까닭이다. 마리브 광구를 우리나라 에너지 자주개발의 상징이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한 해 LNG 수입량은 1Tcf(약 1700만t)이다.

    국내기업들 마리브 광구 투자로 ‘짭짤’



    에너지 밑천으로 ‘가난 탈출에 베팅’
    입국 다음날 아침, 북부 사막지대 한가운데에 있는 마리브 광구를 찾았다. 사나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쯤 날아가니 모래 바람 속에 거대한 육상 유전 겸 가스전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유전 시찰에 앞서 마리브 유전 프로젝트의 주관사인 미국 헌트오일 현지 책임자 브루스씨로부터 유전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생산하는 원유는 황, 염분 등 불필요한 성분의 함량이 낮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며 “마리브 유전 개발은 헌트와 한국 주주사들에게 큰 이익을 돌려주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SK, 삼환, 현대종합상사 등 한국 주주사들은 마리브 유전 투자를 통해 2002년까지 8941만2000배럴의 원유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투자액 7억2874만7000달러의 두 배에 달하는 15억9295만9000달러의 이익을 실현했다.

    차를 타고 방대한 규모의 시설을 둘러보는 동안 동행한 예멘LNG 마케팅 부문 책임자 위그 몽매이어씨로부터 마리브 가스전에 대한 더욱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예멘LNG 최대 주주인 프랑스 토탈사 임원이기도 한 그는 “마리브에서 향후 25년간 매년 최소 620만t의 LNG를 생산할 계획이다. 프로젝트는 기존 가스전 생산설비 정비 및 가스 액화공장이 들어설 발하프 해역까지의 파이프라인 공사, 수출용 액화가스 선적을 위한 항구 건설 등으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현재 예멘LNG가 가장 유력한 판매처로 고려하고 있는 곳은 한국과 인도. 인도국영발전사업자인 NTPC와의 연 300만t 규모 구매 협상은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나, 한국과의 거래는 성사 여부가 불투명하다. 한국 내의 전력·가스 산업구조개편 문제와 맞물려 대규모 장기 LNG 구매에 대한 정책 결정이 내려지지 않은 때문이다. 국내 에너지업계의 한 인사는 “현재 국제 LNG 수요의 80%는 일본 한국 대만 등 동북아시아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2010년 무렵에는 중국, 유럽, 미국 시장의 폭발적 성장으로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지금이야 2007년 이후 공급 가능한 사할린Ⅱ, 호주 코르곤, 인도네시아 탕구르, 예멘 LNG, 이란 NIOC 등이 각종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자칫 머뭇거리다간 ‘바이어 마켓(수요자 우위 시장)’의 과실마저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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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자 아랍 3대 유물 중 하나인 사나 시내 ‘올드 사나’ 지역. 수천년 된 주거지에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왼쪽). 전통 복장을 입고 자택 ‘카트 룸(Qat Room)’에서 카트 잎을 고르고 있는 예멘LNG 대외협력 책임자 나쉐르씨. 카트는 예멘 남성들이 매우 즐기는 일종의 기호식품이다.

    상황이 이런 까닭에 요즘 한국은 세계 주요 LNG 생산국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이후에만 이란 가스수출공사 사장, 카타르 에너지산업성 장관, 사할린에너지 사장, 예멘LNG 사장 등이 한국을 찾았고 주한 오만 대사, 호주 대사 등 외교관들의 세일즈 외교도 불꽃을 튀기고 있다.

    유전 방문 다음날 가진 인터뷰에서 예멘LNG 장 프랑코 다가노 사장은 “예멘LNG의 수출항이 들어설 발하프는 동북아는 물론 인도, 유럽 등으로의 진출이 쉬워 한국이 원하는 방식의 수급조절 계약에 능동적으로 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계약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에 약 10%의 지분을 제의할 용의가 있다. 아울러 한국 기업에 25억 달러 규모의 엔지니어링 및 건설 분야 참여 기회를 제공하겠다. 5~6대의 LNG 수송선(10억 달러 규모)도 발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예멘LNG가 한국과의 계약을 낙관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정부가 에너지 도입선 다변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변화 정책의 핵심은 중동에 집중된 수입처를 타지역으로 분산한다는 것. 이에 대해 다가노 사장은 “한국의 LNG 소비가 증가 추세에 있는 만큼 예멘LNG를 들여간다 해도 중동 지역 비중은 크게 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중동처럼 큰 생산지를 외면하면 유리한 도입 조건과 선택권을 제한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너지 밑천으로 ‘가난 탈출에 베팅’
    또 하나의 문제는 안전성. 이에 대해 예멘LNG 대외협력 책임자 아메드 나쉐르씨는 “마리브 유전에서 20여년간 원유를 수출하고 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공급선이 끊긴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국내 정치 또한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강력한 영도하에 그 어떤 중동국가보다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나흘간 경험한 사나 및 인근 지역 치안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취재 마지막 날 해발 3500m 고지에 있는 고도(古都) ‘부쿠’를 찾았다. 구름이 저만치 발 아래 깔린, 그래서 타지 사람은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그곳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양과 곡식들이 자라고 있었다. 꼬마들은 난생 처음 보는 한국인들을 따라다니며 “꼬레아 풋볼, 풋볼!”을 외쳤다. 오랜 인연에도 불구하고 아직 ‘풋볼’ 정도로만 서로를 기억하는 예멘과 한국은 LNG 도입을 통해 새로운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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