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7

2004.03.25

“들풀도 벌레도 모두 소중한 음식재료”

자연음식 전문점 ‘산당’ 주인 임지호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3-18 16:1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들풀도 벌레도 모두 소중한 음식재료”

    직접 담근 장맛을 보기 위해 장독 앞에 서 있는 임지호씨. 마늘 새순을 곁들인 연어샐러드(아래 왼쪽). 포도당과 녹차가루를 가미한 들풀자반.

    눈이 채 녹지 않은 보리밭에서 나물을 캔다. 냉이, 씀바귀, 별꽃나물. 코를 연신 훌쩍이며 호미질에 열중하는데, 같이 나온 동네 언니가 짝 소리 나게 등을 후려친다.

    “그카믄 어떻케여! 보리꺼정 다 캐삐겠네!”

    아닌 게 아니라 홀딱 뒤집어진 보리 싹을 누가 볼 세라 손가락으로 콕콕 되박아넣은 것이 벌써 몇 번. 그렇게 나물 한 소쿠리를 해가면, 어머니는 냉이만 골라 멸치다시마물에 콩가루를 후히 풀어 국을 끓였다. 그러면 정말 봄인가 했다. 봄은 사립문 너머 퍼져가는 냉잇국 냄새로 왔다.

    경기 양평군 팔당호 부근, 웬 유별나다는 밥집 주인을 찾아가며 20년도 훨씬 전 그 냉잇국 냄새를 떠올렸다. 들풀도 매미 껍질도 식재료로 쓴다는 그 밥집에선 어떤 냄새로 봄을 부르고 무슨 음식으로 객(客)을 사로잡을까.

    낯선 재료로 음식 만드는 ‘미다스 손’



    자연음식 전문점 ‘산당(山堂)’의 주인은 임지호씨(48)다. 그를 소개해준 가수 장사익씨는 그가 “너무 예쁘고 너무 맛있어 차마 먹어버리기 송구한 음식”을 만든다 했다. “똑같은 상을 두 번 차리지 않는다, 자연에서 난 모든 것을 재료로 삼는다”는 말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임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 명인 중 한 명임이 틀림없다. 지난해 12월1~12일, 그는 주(駐)뉴욕 한국문화원이 유엔본부 4층 대표단 식당에서 개최한 ‘한국음식 축제’의 주관 요리사로 일했다. 2주 동안 무려 1만여명의 각국 인사들이 그의 요리로 점심식사를 했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요리를 사랑하는 이들은 많다. 정기적으로 그를 찾는 동호인 클럽만도 수십 개다.

    요리 하나로 수많은 ‘추종세력’을 몰고 다니는 그는 언뜻 보면 산적 같고 또 언뜻 보면 스님만 같기도 하다. 말하는 폼새도 그러하여, 요리사인지 수도자인지, 그도 아니면 예술가인지 감 잡기가 쉽지 않다. 그가 10, 20분 만에 촬영용으로 뚝딱 만들어온 ‘작품’ 두 가지를 시식하며 살아온 얘기를 캐물었다. 봄나물 소스와 동양란 흰 꽃으로 마무리한 대하찜은 입안 가득 바다 본연의 향취를 내뿜었고, 유자·석류 소스를 얹은 마늘 순 연어 샐러드는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케 했다.

    그의 고향은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다. 아버지가 예순 넘어 본 2대 독자. 연로한 아버지는 엄한 분이었다.

    “들풀도 벌레도 모두 소중한 음식재료”

    난초 꽃잎과 돗나물로 마무리한 대하냉채.

    “덕분에 일찍 천자문을 뗐어요. 어쩌다 외울 것을 다 못 외우면 벌을 주셨는데, 대여섯 살 때부터 몸에 꼭 맞는 지게를 지워 산에 나무하러 보냈지요. 같이 다니는 동네 형들한테서 어리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어요. 어스름녘, 형들이 저만 놔두고 다 사라져버리면 모르는 길을 헤매고 더듬어 밤중에야 겨우 집에 도착할 때도 많았어요. 그러면서 담력이 커졌나봐요.”

    그는 집이 싫었다. 왠지 자꾸 밖으로 떠돌고만 싶었다. 하루 종일 흐르는 개울물만 쳐다보다 한밤중 집에 들어가면, 기다리다 지친 부모님은 모진 매를 내렸다. 그러면 또 그는 집을 나와 옆집 마루청 밑에 기어 들어가서는 잠을 잤다. 짐승도 귀신도 무섭지 않았다.

    “여덟 살 때 집을 나왔어요. 무슨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도라꾸(트럭)가 지나가기에 그냥 올라탔지요. 그리고 전국을 떠돌았어요. 빌어먹고 빌어자면서.”

    숙식을 해결하기는 식당이 제격이었다. 중식집, 한식집, 요정, 분식집, 양식집 할 것 없이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역마살이 끼었나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라 “그냥 재미로” 그랬단다.

    “굶기도 많이 굶었지요. 왜,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배고픈 상태에서 시골역 대합실에 앉아 있잖아요. 그럼 여행객들이 둘러앉아 사과 같은 걸 깎아 먹어요. 그 사람들이 자리를 뜨면 얼른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껍질을 주워먹지요. 그게 얼마나 맛이 있던지…. 전 굶주림의 깊이만큼 인격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많이 보고 많이 걷고 많은 사람을 만나며 산지식을 쌓았다.

    “들풀도 벌레도 모두 소중한 음식재료”

    재료를 찾아 산속을 헤집고 다닌 까닭에 그의 손은 매우 거칠다.

    “전 혼자잖아요. 자칫 나쁜 길로 빠지면 도와줄 이도 살려줄 이도 없지요. 그러니 잘 살아야 할밖에요. 한때는 가방 들고 다니는 사람이 부러워 야간학교에도 가봤어요. 그런데 얼마 못 가 깨달았지요. 책보다 거지들한테 배울 게 더 많다는 걸요. 그 불쌍한 인생을 보며 새삼 다짐했어요.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다른 건 몰라도 인간으로서 실패하지는 말아야지….”

    요리를 정식 직업으로 삼은 건 20대 중반 서울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결혼도 했지만 여기저기 떠도는 생활을 아주 멈추지는 못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으로 갔다. 근로자 2000여 명의 세 끼 밥을 책임졌다.

    “그때부터 식재료로 잘 쓰이지 않는 것들을 활용하기 시작했어요. 그곳 재료로 한국음식 맛을 내주고 싶었거든요. 석류, 야생화, 선인장…. 먹어서 죽지 않을 거면 뭐든 써먹었지요. 연구만 한 게 아니라 근로자들이 뭔가 먹을 걸 필요로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만들어줬어요. 사흘 밤 사흘 낮을 내리 일한 적도 있을 만큼.”

    98년 양평 정착 … 동호인 클럽도 생겨

    한국에 돌아와서는 서린호텔 한식당 주방장이 됐다. 그런데 갈수록 음식 만들기가 재미없어졌다. 하늘 아래 온갖 재료를 다 활용해, 사람의 몸과 맘을 물처럼 맑게 해주는 음식들을 만들고 싶었다. 호텔을 박차고 나와 전국을 떠돌았다. 일년에 네댓 달은 산속, 바닷가에 머물며 새 재료를 구했다. 처음 보는 풀을 맛보다 독이 퍼져 혼수상태에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 가운데 이제껏 제대로 된 요리상에 올라본 적 없는 많은 생물들이 식재료로 재탄생했다. 들풀, 야생화, 매미껍데기, 구더기, 닭똥이며 생선 비늘까지.

    “자연히 먹고살기가 힘들었지요. 두 아들 공납금 제때 대기도 빠듯했어요. 집에 방문이 없어 친구들이 문 달아주고 쌀도 퍼주고요.”

    그가 가족을 방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 푼이라도 벌면 곧바로 집에 가져갔다.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난했다. ‘신들린 양 요리에 정진하고픈 욕심’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엔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회 오프닝 파티 음식을 많이 해줬어요. 수고비요? 한 푼도 안 받았죠. 그저 재료비만 받고, 그것도 부족하면 제 돈까지 보태가며 요리했어요. 그 작가가 태어난 고향을 찾아가 그 흙에 뿌리박고 큰 꽃, 나물, 벌레, 해산물을 잡아다 재료로 썼지요. 생명의 근원이 담긴 요리를요.”

    예술가들이 하는 몇몇 식당의 주방장, 불교방송 요리칼럼니스트, 프리랜서 요리연구가 겸 코디네이터 등으로 일하다 1998년에야 양평 이곳에 ‘산당’을 내고 비로소 정착했다. 대학 조리과 재학 중 군에 간 큰아들, 해외유학 중인 둘째 아들은 그의 꿈이자 자랑이다.

    “고생을 워낙 많이 해 세상 사람들이 좀 우습겠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고생이란 게 뭔가요. 전 고생한 기억 별로 없어요. 자학적으로 생각할 필요 있나요. 모든 것은 운명인 걸요. 부산 공사판 함바에서 일할 땐데 빵만 사놓으면 봉지를 다 뜯어놓는 도둑고양이가 있었어요. 어느 날 또 그러기에 돌멩이를 냅다 던졌죠. 아, 그런데 그놈이 그만 죽어버린 거예요. 그때 깨달았지요. 나쁘다 하는 것도 모두 내 기준일 뿐 그를 심판할 자격은 제게 없다는 걸요. 그러니 모든 사람이 두렵고 소중할밖에요.”

    그는 새로운 재료의 활용뿐 아니라 ‘이미지 요리’로도 유명하다. 먹는 이의 취향과 이미지에 따라 수십 가지 천연 조미료와 향료, 소스를 활용해 매번 다른 요리를 창안한다. 맘 담고 정성 담은 요리는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바치는 공양이나 다름없다.

    “요리사가 되길 참 잘했어요. 음식 맛은 자연이 만드는 거거든요. 또 사람의 몸과 영혼을 살게 하지요. 그래서 음식 만드는 사람은 건강해야 해요. 먹을 때만 맛있는 게 아니라, 먹고 나서 집에 갈 때도 행복한 음식. 사람들이 절 기억하느냐 못 하느냐는 중요치 않아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죠. 제 몫은 거기까지니까요.”



    사람과 삶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