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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짱’ 시대 ‘꽝’ 시대

‘돈의 논리’ 앞에 트렌드 춤춘다

‘유행 권력’ 소비 자극 새 상품 창출 혈안 … 무차별 따라하기 확대 재생산 후 시대로 규정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돈의 논리’ 앞에 트렌드 춤춘다

‘돈의 논리’ 앞에 트렌드 춤춘다

세계적 트렌드인 웰빙은 기업과 언론에 의해 왜곡돼 전달되고 있다.

으쓱거리는 걸 좋아하는 대학생이 있었다. 그가 학교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난 살아 있는 물고기를 통째로 먹을 수 있다!” 그는 학교식당의 어항에서 금붕어를 꺼내 씹어 먹었다. 이렇게 시작된 물고기 삼키기는 1939년 봄 미국 대학가에 유행으로 번졌다. 한꺼번에 두 마리를 삼킨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 걸 신호탄으로 언론보도가 이어졌고 기록 경신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여섯 마리, 스물네 마리, 서른세 마리… 최고 기록은 300마리였다.

포복절도할 물고기 삼키기 열풍은 찰스 패너티가 ‘문화와 유행상품의 역사’에서 묘사한 실제로 있었던 사실(史實)이다. 역대 어느 사회나 원인을 딱부러지게 설명하기 힘든 ‘집단적 유행’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한국사회를 강타한 ‘이효리 신드롬’ ‘웰빙 트렌드’ ‘보보스족’ ‘10억 만들기 붐’ ‘성형 열풍’ 등도 기실 그리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요사이 한국 사회엔 유행에 ‘신드롬’ ‘트렌드’ ‘열풍’이라는 단어를 갖다붙이는 것도 일종의 유행이 된 듯싶다.

‘족’은 또 왜 그리 많은지, 부부만의 생활을 즐긴다는 딩크(Double Income No Kids), 자녀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려는 노부부는 통크(Two Only No Kids), 애완동물을 선호하는 커플인 딩펫(Double Income No Kids+Pet), 섹스를 안 하는 커플 딘스(Double Income No Sex)…. 여기에 뭔가 ‘쿨’하게 느껴지는 와인세대, 다른 또래보다 역동적이라는 P세대…. 어디 그뿐인가. 특정 ‘족’ ‘세대’에 딱 맞는다는 상품은 똬리를 틀고 자신과 어울리는 세대, 그리고 족을 기다린다.

당신은 지금 어떤 족(세대)이고, 앞으로는 무슨 세대(족)가 되고픈가. 삶을 개척해나가듯 족(세대)은 자기가 만들어나가는 것일까. 아니다. 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일시적인 유행’(fad)이 트렌드(장기간의 경향)로 불타 오르는 과정에서 자본과 산업의 이해가 부싯돌 노릇을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나만 하지 않으면 왕따’라는 한국인 특유의 집단의식이 덧붙여지면 트렌드는 열풍 또는 신드롬이 되어 거꾸로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자고 나면 생기는 유행어… 유행어



기업이 운영하는 경제연구소와 광고기획사 등은 트렌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유행 권력’이다. 유행 권력의 목적은 우리의 일상에 간섭해 주머니를 얄팍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근 인구에 회자되는 ‘와인세대’란 말을 만들어낸 곳은 광고기획사 J기획. 이 회사는 45~64세를 ‘와인세대’로 명명하며 새로운 소비주체라고 주장하고 나섰고, 언론은 이를 받아 비중 있게 기사화했다.

그러나 와인세대론에 대한 트렌드 헌터들의 평가는 비판적이다. 금강기획의 한 간부급 AE는 와인세대론에 대해 “사회적 기득권을 뺏겨서 일탈감을 느낀다는 전제가 터무니없고, 뭐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를 그럴싸하게 포장했다”고 혹평한다.

“사실 와인세대론은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를 원용한 것이다. 보고서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와인세대 시장을 선점하는 광고전략이 필요하므로 관련 광고를 많이 제작하라는 뜻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ㆍ장년층에게 이젠 젊은이처럼 쓰고 즐길 때가 됐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시중의 현상이 그렇다기보다는 앞으로 보톡스도 좀 맞고, 거실에 와인냉장고도 들여놓고, 값비싼 건강보조식품도 좀 먹고, 와인처럼 쿨하게 살아보라고 부추기는 거라고 보면 된다.”

‘웰빙 꿈꾸는 와인세대, 남성 갱년기 벽 뚫어라’(남성 호르몬제 관련 기사), ‘실미도 열풍의 주역은 와인세대’(영화 ‘실미도’ 관련 기사) 등으로 외연을 넓히고 있으니 와인세대는 어느덧 특정 세대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돈의 논리’ 앞에 트렌드 춤춘다

‘집단적 유행’이 사회에 몰아치는 이유는 자본과 언론이 의도적 혹은 메커니즘에 따라 잠재해 있던 사회적 흐름의 맥을 짚어 소비자들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트렌드 전문가 김경훈씨는 “기본적인 세대분석조차 엉망인 와인세대가 곳곳에서 회자되는 현실은 열풍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와인세대의 경우는 워낙 근거가 부족한 것이라 그러다 말겠지만 시대의 흐름과 같은 방향에서 누군가 적절한 지점을 짚어주면 트렌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트렌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힘을 얻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지난해 6월 모 경제연구소는 ‘키덜트족’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문화가 다양해지면서 새로운 유형의 소비자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급부상하고 있는 소비자들이 바로 키덜트족(Kidults·아이(Kids)와 어른(Adults)의 합성어)으로, 소비욕구가 가장 높은 20~30대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소비자로 인식되고 있다’는 게 키덜트족 보고서의 요지.

대부분의 ‘만들어지는’ 트렌드가 그렇듯이 키덜트족 역시 물 건너온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키덜트 지수를 측정하는 지표를 발표하는 등 선진국에선 키덜트족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수년 전부터 시도됐다. 키덜트족에 부합하는 상품은 이미 한국 시장에도 나와 있다. ‘딸기’ ‘바닐라B’, ‘조앤루이스’, ‘올리브 데 올리브’ 등의 브랜드가 그것이다.

아동복 같은 여성 의류에 키덜트족이라는 트렌드가 덧씌워짐으로써 관련 상품은 언론의 단골소재가 됐다. 모 신문은 의류매장 르포와 사례 취재를 통해 키덜트족이 뜬다는 읽을거리를 만들어냈고, 여성잡지들은 키덜트 특집을 쏟아내며 마치 굉장한 트렌드인 것처럼 다채롭게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한 스포츠신문은 한술 더 떠 키털트족을 대상으로 한 광고특집까지 만들어냈으니, 깜찍한 의류를 만들어내는 의류업체는 느닷없이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단어에 놀아나는 언론, 유행에 눈먼 소비자

경제연구소나 광고기획사가 화두를 던진 트렌드가 확대 재생산되는 데는 이처럼 언론의 역할도 상당하다. 언론 역시 유행 권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외국 사례가 수입돼 그럴싸한 이론으로 포장되고 언론이 이를 보도함으로써 소비자를 자극해 트렌드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허다하다. 사실 언론 쪽에서 권위 있는 연구소의 재미있는 보고서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한 경제연구소 연구원이 모피코트 입고 콩나물 값 깎는다는 ‘가치쇼핑족’에 대한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언론의 트렌드 기사 소재로 안성맞춤이었다. 다수의 언론이 백화점 및 고급아파트 주변상가 취재 등을 통해 기사로 전했음은 물론이다. 푼돈은 아끼면서도 명품을 구입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여성잡지들은 ‘가치쇼핑족 되는 법’이라는 기획기사까지 만들어내며 보고서에 힘을 실어줬다.

또 모 경제연구소가 ‘작은 사치’라는 제목의 트렌드 보고서를 낸 적이 있는데, ‘명품은 사고 싶되 지갑이 얄팍한 소비자들에게 작은 사치라는 트렌드가 있다. 아주 비싸지 않은 상품을 사치스럽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이 역시 다수의 언론에 의해 재미있는 기사로 만들어졌다. 일간지와 여성잡지들이 ‘적은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 명품’ 기사를 쏟아낸 것이다. 티파니의 은(Silver)제품이나, 명품 브랜드의 소품류, LG나 삼성의 프리미엄냉장고는 관련 보고서와 기사가 상당히 고마웠을 듯하다.

최근 들어 유행 권력은 웰빙과 관련된 곁가지 트렌드를 만드는 데 혈안이다. 친환경 유기농 자연주의 디톡스 환경주거… 등 웰빙 열풍의 곁가지를 살펴보면, 이들 대부분이 상업적 이해와 연결돼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인스턴트식품인 ‘××라면’ ‘××우동’이 웰빙으로 둔갑하고 건강보조식품을 먹는 게 곧 웰빙이며, 독을 제거하는 화장품을 쓰는 것은 시대적 조류이고, 이왕이면 건설업체 쪽 마진이 더 크다는 천연마감재를 쓴 아파트를 분양받아야 한다.

국민대 이창현 교수(언론학)는 좀더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한다는 웰빙의 이념이 비뚤어지고 어긋나게 된 것엔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꼬집는다. 언론이 부지불식간에 또는 의도적으로 ‘돈의 논리’가 만들어낸 트렌드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 흐름이 나타났을 때 언론이 이를 보도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본질은 외면한 채 트렌드에 의지해 물건을 판매하려는 상업적인 의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언론이 은밀한 간접광고로 트렌드에 불을 붙이는 것도 일종의 메커니즘에 근거한다. 언론의 상업화 역시 트렌드이기 때문이다. 트렌드 열풍을 꼬집는 기사 역시 ‘얼짱’ ‘몸짱’ 기사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팔겠다는 장삿속 아닌가.”



주간동아 425호 (p16~18)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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