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1

2003.11.27

盧의 변심인가, 勞의 욕심인가

盧 - 勞 전쟁 서로 “네 탓” 속 감정 악화일로 … 노동계 과열투쟁·정부 느슨한 초기대응이 전쟁 키운 셈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11-19 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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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盧의 변심인가, 勞의  욕심인가

    11월12일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오른쪽부터) 등 노동계 인사들이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왼쪽). 최근 노동자들의 분신, 구속이 잇따르면서 노동계에서는 ‘노 대통령이 노동자를 배신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있다.

    ”정부가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제 남은 것은 대정부 전면투쟁뿐이다.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정부 책임임을 밝혀둔다.”

    11월14일 오후 제5차 민주노총 중앙위원회가 열린 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 사무실에는 시종 격앙된 분위기가 흘렀다. 전날 정부가 ‘전국노동자대회’ 화염병 시위 관련자 42명을 구속하고 단병호 위원장 등 지도부 6명에게 소환장을 발부한 데 따른 것이다.

    민주노총이 내린 결론은 정면돌파다. 이날 회의에서 민주노총은 △매일 전국 각지에서 거리시위 △수요일 파업 △11월26일 위력적 총파업 실시 등 투쟁방안을 마련, ‘한판 제대로 붙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한 달을 끌어오던 한진중공업 노사분규가 다음날 타결되고, 고건 국무총리와 단위원장이 만나 노동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민주노총은 오후 거리시위를 예정대로 강행했고, 16일 한진중공업에서 열린 고 김주익, 곽재구씨의 장례식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는 “아직 노사관계의 새날은 오지 않았다. 잠자고 있는 노동자를 일깨우기 위해 목숨을 던진 두 동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국 노동자들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노동계가 세게 맞붙었다. 참여정부 출범 때만 해도 불과 9개월 만에 ‘노(盧)-노(勞)’ 관계가 이처럼 경색될 것이라고 내다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서로 총력전을 선언하고 나선 지금 상황은 가히 ‘전쟁’이라 부를 만하다.



    ‘노-노 전쟁’의 표면적 이유는 잇따르고 있는 노동자들의 자살이다. 올 1월 두산중공업 노조원 배달호씨가 손배·가압류 해제를 촉구하며 분신자살한 이후 8월에는 세원테크 이현중씨, 9월에는 태광산업 박동준씨, 10월에는 한진중공업 김주익씨와 곽재규씨, 세원테크 이해남씨, 그리고 근로복지공단 이용석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분신을 시도했다. 최근에는 ‘고용허가제’에 반발해 외국인 노동자 2명이 자살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서 노동계는 정부에 근본적 대책을 요구하고, 정부는 노동계가 과열 투쟁을 일삼는다며 비판하고 있는 양상이다.

    집권당의 정치능력 부재 … 양자간 완충 역할 못해

    그러나 이 같은 양자 충돌의 바탕에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부터 계속돼온 ‘노-노’ 간의 배신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공통된 분석이다. 노대통령은 ‘노동계가 너무 많이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노동계는 ‘대통령이 변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양자 사이의 불화는 사실 현 정부 출범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됐던 터다. 지난해 대선 당시 후보들의 공약을 분석했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김수진 교수는 “노후보의 노동 관련 공약은 지나치게 노조 지도부의 리더십과 판단력에 대한 낙관적 기대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노-노 전쟁’의 불씨로 꼽히는 두산중공업 노조원 배달호씨 분신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은 바로 한계를 드러냈다. 아직 김대중(DJ) 정부 시절이던 1월9일 배씨가 분신했을 때까지만 해도 당선자 신분이던 노대통령은 일관되게 ‘노사 갈등은 양자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어내도록 할 것이며 정부 개입은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1월22일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회사가 적극 나서 포괄적으로 풀어야 한다”며 사측 책임론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盧의 변심인가, 勞의  욕심인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올해 들어 분신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달호씨 등 6명의 사진을 들고 정부의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이 발언을 계기로 두산중공업 사태는 ‘노-사 문제’에서 ‘노-정 문제’가 됐고, 결국 참여정부에 막대한 부담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당선자가 직접 해결을 촉구한 마당에 69일째 쟁의가 계속되는 것을 어느 관계자가 두고 볼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노-사가 권기홍 노동부 장관의 중재 아래 ‘손배·가압류 철회와 해고자 복직’ 등에 합의하며 이 사건은 끝이 났다. 사측이 파업 기간 중 무단결근 처리된 노동자의 임금을 50% 지급하기로 해 사측이 ‘무노동 무임금’ 원칙까지 내줬다는 평가를 받은, ‘노동계의 대승리’였다.

    정부 관계자는 “내부에서조차 ‘이거 너무 준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당연히 언론과 정부가 ‘친노(親勞) 정권’이라며 공격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공격은 결과적으로 노대통령의 노동정책이 변하도록 하는 원인이 됐다.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을 입안했던 서울산업대 정이환 교수는 “이때서야 참여정부가 추진한 ‘사회참여적 노동정책’의 내용이 불분명했다는 것을 알았다. 정부는 노사관계에 대해 끈기 있게 대화로 해결하겠다는 기본입장만 확인해뒀을 뿐, 대화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때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다. 파업이 이어지고 언론과 재계의 비판이 잇따랐다. 그런데도 노동계는 왜 대화한다고 해놓고 공권력을 투입하느냐고 항의해왔다. 이러한 노동계에 대해 정부가 배신감을 느끼면서 결국 노-정 관계는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참여정부가 초기에 노동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했던 점도 지금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한 원인이다. 참여정부는 사실 외국인 고용허가제, 공무원노조 합법화, 주5일노동제 등 노동계 현안을 2월 국회에서 모두 처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당시 노당선자의 인기는 최고치를 치고 있었고, 인수위의 힘은 막강한 듯했다. 그러나 결국 세 법안 가운데 한 가지도 처리되지 못했고, 이것은 결국 지금까지 참여정부 노동정책의 발목을 잡는 악재가 됐다. 노동계는 공약사항이 하나도 이행되지 못한 것에 대해 ‘배신’이라고 표현하며 비판했고, 정부는 “우리는 할 만큼 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도운 적이나 있느냐”고 날을 세운 것이다.

    노-노 전쟁이 불붙은 또 다른 이유는 집권당의 정치능력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와 노동계가 정면으로 맞붙을 때 이면에서 완충 역할을 해줄 정치세력이 없다는 것은 노-노 양자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가 됐다.

    한 노동운동가는 “2001년 대우자동차에 대한 공권력 투입으로 DJ 정부와 노동계가 극한 대립 양상으로 치달았던 순간에도 민주당이 주도하는 막후 협상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시작과 함께 집권당이 와해되면서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뼈와 뼈가 맞부딪치면 한쪽이 부러지거나 둘 다 심각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안타까워했다. 노동계와 정부 사이의 거의 유일한 창구였던 박태주 노사관계 TF팀장이 ‘새만금 헬기 사건’으로 사표를 제출한 후에는 양 당사자 사이에 대화를 풀어갈 창구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상황은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파업이 많아질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경기는 나빠지는데 파업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나 여름 무렵에는 달력이 노동계의 ‘투쟁 일정’으로 새까맣게 채워질 정도였다. 정부 입장에서 한 번쯤 노동계에 경고 사인을 보내야 할 ‘위기’였다”고 말했다. 정부는 결국 6월 철도노조 파업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강수를 뒀고, 노(盧)와 노(勞)는 이를 계기로 완전히 틀어졌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노동정책이 변했다”는 평에 대해 극구 부인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친노(親勞)였던 적도, 반노(反勞)였던 적도 없었고, 불법파업을 ‘법과 원칙’대로 처리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참여정부의 노동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이들의 반응은 다르다. 한 노동운동가는 사용자의 대응권을 강화한 ‘노사관계 로드맵’이 발표된 후 정부기구를 떠났다. 산업연구원 박태주 박사 역시 현 정부의 노사정책은 정책적이든, 전술적이든 ‘권위주의적인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 분명하다고 평가한다. 분신 정국에 대한 무대응, 시위 강경진압과 노동자 구속 등이 이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盧)는 이제 노(勞)를 버린 것인가. 더 이상 ‘대화와 타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은 아니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룬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참여정부의 기조는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정부 정책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라며 “우리 사회 최대의 대중조직이자 상당한 힘을 갖고 있는 노조의 참여를 배제할 경우 참여정부의 기본 방향이 흔들린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부처간 협의에 들어가면 산업자원부와 재정경제부 쪽 관료들은 노동계에 불리할 수 있는 각종 아이템을 대통령에게 올린다. 파업 찬반투표를 회사에서 하지 못하도록 하고, 노조원 개개인이 따로 용지를 작성해 우편으로 보내도록 하자는 등의 노조 약화를 염두에 둔 정책들이다. 그런데도 일단 노대통령은 버티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의 위기상황이 계속되면 노동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노(盧)가 노(勞)를 버릴 여지가 있는,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노동계가 해야 할 일은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노동 시장을 신자유주의적으로 되돌리려는 압박을 막아내는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노동계도 이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민주노총이 좀더 전략적으로 사고하라고 충고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최소한 더 이상은 죽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싸움이 이어지는 것은 정부가 ‘민주노총이 투쟁을 벌이니 할 것도 해주기 싫어졌다’는 투로 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소한의 요구라도 수용될 경우 투쟁의 양상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민주노총의 요구사항이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요구하는 것과 원하는 것이 꼭 같은 것은 아니다. 노동계 사정을 뻔히 아는 정부가 100% 해줄 수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핑계 아니냐”고 반박했다.

    결국 공식적으로는 손배·가압류 즉각 해제, 비정규 노동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노사관계 로드맵 철회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현재 노동자가 사망한 2개 사업장 문제만 해결돼도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한진중공업의 쟁의가 잠정적으로 해결된 후 단위원장이 고총리와의 대화에 나선 것도 노동계 내의 이 같은 기류를 보여준다.

    손실장은 “우리도 전략적으로 행동하고 싶다. 지금의 총파업은 대화의 여지를 만들기 위해 불가피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노동계에 따르면 10월 말 현재 노동자가 손배·가압류에 걸려 있는 사업장이 50개 사업장에, 금액이 1495억원에 이른다. 이중 공공사업장이 제기한 가압류도 400억원에 이른다. 일단 이 문제만 풀면 노-노 관계에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민주노총의 기대다.

    노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노사문제는 2년 안에 해결 보겠다” 또는 “올여름까지 노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대안을 내놓겠다”는 등 강한 자신감을 피력해왔다. 그러나 이 욕심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노동계에 모든 문제가 당장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준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제 호흡을 고를 때’라고 충고한다. 정이환 교수는 “일거에 노사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일단은 한 가지씩이라도 차근차근 변화를 만들어가면서 결과적으로 장기적 대안은 마련할 때”라고 말했다.

    박태주 박사도 “‘고용창출’처럼 지금 노-사-정 모두에게 시급한 사안을 사회적 의제로 설정하고 ‘고용을 위한 대연대’를 구축하는 등 새로운 틀에서 노-노 갈등을 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정책을 최소한 국제기준(global standard)에 비추어 부족하지 않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등 한 가지씩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노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민주노총을 방문한 자리에서 “5년 뒤에 여러분께 박수나 장미꽃을 받고 떠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노대통령이 지금 이 초심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노동계에 손을 내밀지만, 전부를 받아들이지는 않는 ‘중용’의 자세만이 지금의 갈등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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