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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퍽…” 살 떨렸던 ‘홍대괴담’

여성 1명 사망 7명 중상 ‘퍽치기’ 범인 검거 … 소리 없이 접근 막무가내 쇠몽둥이 휘둘러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비오는 날 퍽…” 살 떨렸던 ‘홍대괴담’

“비오는 날 퍽…” 살 떨렸던 ‘홍대괴담’
9월14일 새벽 4시50분경, 홍익대(이하 홍대) 4학년 한모씨(23·여)는 고향집에서 추석 연휴를 보내고 서울 마포구 동교동 경의선 철길 인근의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새벽녘의 철길 주위는 너무나 고요했다.

한씨가 주차해 있는 차량 뒤에서 정체불명의 사내가 뛰어나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사내는 묵직한 쇠몽둥이로 한씨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한씨에게 두 차례나 더 흉기를 휘두른 다음 한씨의 가방과 휴대전화를 챙겨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그는 경의선 철길을 걸으며 가방을 뒤져 현금 10만원과 카드 2장을 챙기고 불필요한 물건은 철길 옆에다 버렸다.

병원으로 옮겨진 한씨가 끝내 숨지고 만 9월16일, 홍대 주변에는 ‘괴담’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홍대 칼침괴담’. 괴한이 아무런 이유 없이 홍대 미대 여학생만을 골라 살해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며칠 전에 홍대 ○○과 99학번 여학생이 살해당했습니다. 어제 뼛가루를 뿌렸다더군요. 강도에게 목 뒤를 칼로 찔려서 그만… (홍대 미대생 두 명이 더 죽었습니다). 피해자가 저랑 같은 학교에 다니고 나이도 비슷하며 전공도 비슷한 여학생들이라 너무 무섭습니다.”

괴담의 근거로 제시된 이 여학생 사망사건은 칼에 찔렸다는 부분만 빼면 엄연한 사실이다(나머지는 유언비어로 밝혀졌다). 이후 홍대 여학생들은 한동안 밤거리를 다니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떨어야 했다.



두 달간 연쇄범행 여대생들 ‘공포’

“비오는 날 퍽…” 살 떨렸던 ‘홍대괴담’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홍대괴담` 역시 비 오는 밤에 여성만을 범행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홍대괴담’은 여학생 사망사건이 우연히 단 한 차례 일어난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연쇄범죄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 큰 충격을 주었다.

한씨가 변을 당하기 두 달 전인 7월, 서울 연희동과 북아현동 인근에서는 6건의 유사한 ‘퍽치기’ 사건이 일어났다. 인적이 드문 새벽녘, 경의선 철로 인근, 비슷한 연령대의 피해 여성, 유사한 신체 부위에 난 상처. 이들 사건은 너무나 흡사했고, 피해 정도도 모두 중상이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확신했지만 범인이 연희동 인근에 사는 젊은 남자일 것으로 추측만 했을 뿐 어떠한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 와중에 한씨 피살사건이 일어나 퍽치기와 홍대 주변 유흥가를 둘러싼 흥미성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자 경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비오는 날 퍽…” 살 떨렸던 ‘홍대괴담’

범행에 쓰인 무게 5kg이 넘는 쇠몽둥이를 들어 보이는 마포경찰서 강력반 형사.

수사를 담당했던 마포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는 ‘홍대괴담’ 사실을 부인하자니 주민들에게 사전에 위험을 경고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연쇄 퍽치기 사건을 밝히고 공개수사에 나서자니 영구 미제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때부터 경찰은 용의자를 잡기 위한 철야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매일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서대문경찰서와 마포경찰서 강력반 소속 형사 전원이 사건 발생 예상 지점에 투입됐다.

기나긴 잠복의 밤이 거듭되던 중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0월1일 새벽, 연세대 뒤쪽에서 또다시 퍽치기 사건이 발생했다.

“비 오는 날! 그렇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다.”

올해 대박을 터뜨린 ‘살인의 추억’은 비 오는 날 밤에 벌어진 끔찍한 연쇄 살인사건을 세세하게 복원해놓은 영화. 홍대 인근에서 두 달간 벌어진 8건의 퍽치기 사건 중 5건이 비 오는 날 새벽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살인의 추억’이나 쇠공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내용이 담긴 ‘와일드카드’를 본 남성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연희동을 중심으로 두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본 독신남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 자장면을 한 그릇만 시킨 사람, 최근 출소자, 동일 범행 전과자 등 무려 800여명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범인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결국 탐문수사도 실패로 끝났다. 이제 경찰이 기댈 것은 잠복수사밖에 없었다. 연희동과 동교동 인근 주요 골목에서 여자를 뒤따라가는 남성은 모두 추적 대상이 되었다. 증거가 확보돼 있지 않은 만큼, 흉기를 꺼내 범행을 저지르려는 순간 현행범으로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형사들을 짓눌렀다.

한씨가 습격당한 지 정확하게 한 달이 되는 10월14일,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분명히 놈이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 마포경찰서 강력반 형사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복에 들어간 형사들은 잠시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돈 몇 푼 때문에 잔혹, 끔찍한 범죄

새벽 4시40분경 동교동 로터리. 강력1반 김문상 경사의 눈에 어색하게 가방을 둘러멘 젊은 사내가 걸어오다 말고 차 뒤에 숨는 광경이 포착됐다. 때마침 한 여성이 혼자 걸어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형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급박하게 서로 연락을 취했다. 최대한 피해를 막되 현행범으로 체포해야 하는 까닭이다.

사내가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손에 쥐고는 여성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형사들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때 우유배달 하는 소년이 나타나는 바람에 잠시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잠깐 동안의 깊은 침묵. 우유배달 소년이 지나가자 다시 사내는 여성 쪽으로 달려가 은색 야구방망이를 쳐들었다. 동시에 형사들이 사내를 향해 달려든다.

“야! 이 ××야!”

100여m 간격을 두고 추격전이 벌어졌지만 이미 주변에는 경찰의 포위망이 쳐져 있는 상태였다.

‘묻지마 범죄’의 결론은 허무했다. 용의자 김모씨(32)는 동대문에서 재단일을 크게 벌이다 2억5000만원의 빚을 지고 채권자에게 쫓기는 몸이었다. 아내와 별거한 뒤 연희동 한 옥탑방에서 애인과 함께 생활하던 중 7년 전 구치소에서 배운 퍽치기 기술을 이용해 돈을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김씨가 한 여성을 죽음으로 내몰고 7명을 중태에 빠뜨림으로써 얻은 것은 현금 69만원과 10만원권 수표 2장뿐이었다.

아직도 남는 의문점은 그가 휘두른 5kg을 넘는 쇠몽둥이의 출처. 종로 세운상가 인근 철공소에서 6만원을 주고 2개를 주문제작했다는 이 흉물은 쥐어본 사람만이 그 끔찍함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아직도 이 쇠몽둥이를 제작한 철공소는 밝히지 않고 있다.

“강도는 양반에 속해요. 적어도 칼을 들이밀고 협상은 하잖아요. 성폭행도 증거가 남으니까 수사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 그러나 퍽치기는 막무가내야. 난 당신과 대화할 필요도 없다 이거지. 지갑에 든 돈 몇 푼 때문에 순식간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니 얼마나 끔찍해요….”

수사에 참여했던 한 형사는 퍽치기의 잔혹함에 대해 얘기하며 치를 떨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마포경찰서 형사 두 명이 일계급 특진했다. 현재 서울 전 지역에서 퍽치기 사건의 범인을 쫓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형사들이 적지 않다며 한 형사는 이렇게 말했다.

“살인의 추억이 아닌 잠복의 고통만 남았다.”





주간동아 407호 (p44~45)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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