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3

2003.10.02

아직도 전부 ‘인터걸’로 보이십니까

러시아 여성들 ‘한국살이’ 사연 주렁주렁 … 지난해 3만여명 입국 “여전히 기회의 땅”

  • 모스크바 =김기현 동아일보 특파원 kimkihy@donga.com

    입력2003-09-25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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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전부 ‘인터걸’로 보이십니까

    수도권의 한 유흥가를 걷고 있는 러시아 여성들.

    한국행을 선택하는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출신 젊은 여성들의 수가 갈수록 늘고 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에서만 3만여명의 여성이 입국, 2001년의 2만3000여명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고려인 동포가 많이 사는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여성까지 더하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진다.

    유흥업소나 공연장 무대, 홈쇼핑 프로그램 등에서 러시아 여성들을 보게 되는 일이 다반사가 된 지 오래다. 러시아 여성이나 고려인 동포와 결혼하는 한국 남성들도 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경험한 러시아 여성들의 사연과 그들이 느낀 한국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모았다.

    # “한국 끝내줍니다”

    아직도 전부 ‘인터걸’로 보이십니까

    한국인들이 친절해서 좋다고 말하는 롯데월드의 무용수 안나 살라투프.

    롯데월드 공연장에서 스포츠댄스를 선보이고 있는 구소련 몰도바 출신의 무용수 안나 살라투프(사진·20)는 “한국을 알게 된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했다. 고향에 들렀다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모스크바에 온 그는 한국 생활이 벌써 두 번째다.

    2001년에 에버랜드에서 1년 동안 일하면서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그는 계약기간이 끝나 한국을 떠난 뒤 튀니지에서 에어로빅 강사를 하다가 올해 초 다시 한국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예전에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는 그는 몰도바의 수도 키시네프에 있는 무용학교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계 연예회사에 소속돼 유럽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 관한 소문을 듣고 얼떨결에 오디션을 보게 된 것. 동유럽 출신의 연기자와 무용수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고급 공연장이 보수와 근무여건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나는 운 좋게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돼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과 빽빽한 공연일정 때문에 힘들었지만 점차 한국 생활에 익숙해졌다. 시간이 나면 지하철을 타고 시내 구경을 하고 젓가락으로 만두와 김밥을 능숙하게 먹을 수 있게 됐다.

    혹시 한국에서 매춘을 하는 구소련 출신 여성들을 만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안나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만난 적은 없지만 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은 있다”고 대답했다. 이들이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매춘을 강요당한다는 말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만난 한국인들은 모두 친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연 때문에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를 다 다녀봤지만 한국처럼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며 계약을 연장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감금에 폭행까지…. 도저히 같은 민족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어요.”

    한국에서 11개월 동안 살다 지난해 고향으로 돌아온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베타(25)는 어두운 표정으로 “아직도 한국에서 생활했던 일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생각하기조차 싫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나 고향에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다”며 사진 촬영조차 거부했다.

    나이트클럽에서 일할 무용수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한국으로 떠났지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약서는 ‘휴지 조각’이었고 조그만 화장실 하나 딸린 뜨거운 물도 안 나오는 방 3개짜리 집에서 20명이 살아야 했다. 폭행과 매춘 강요는 ‘기본’이었다. 결국 함께 간 친구 2명과 여권도 짐도 남겨둔 채 몸만 빠져나왔다.

    ‘돈도 못 벌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불법체류를 하면서 공장과 식당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거금인 6000달러를 모아서 귀국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끝내 정을 붙이지 못했다. “한국 사람들은 놀랄 만큼 열심히 일하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 같아요. 그 점이 참 겁나요.”

    그는 고려인 동포를 한 민족이라고 생각해주는 한국인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한번은 누가 “한국말과 문화도 잘 모르면서 무슨 우리 동포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언제 조국이 우리에게 한국말과 문화에 대해 가르치려 한 적이 있느냐’는 반감이 생기더군요.”

    # “전, 한국 사람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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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나 우토치키나(사진·28)는 한국으로 유학 와 연세대에서 공부하다가 1996년 이 대학 법학과에 다니던 서영훈씨(31)와 결혼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것은 99년.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모스크바로 유학 왔기 때문이다. 러시아 변호사 자격을 얻은 남편은 현재 한국기업 현지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결혼 당시 시부모님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털어놓았다. “지금은 다정하게 대해주시지만 그때는 결혼식에도 안 오셨어요.”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없었단다. 불광동의 지하 단칸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등 고생도 하면서 제대로 ‘한국살이’를 겪었다.

    동네 아줌마들끼리 모여 수다도 떨고 김치도 나눠먹던 한국 생활이 그립고 한국 궁중요리를 러시아 요리보다 잘하지만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 문화도 있다.

    “한국에서는 남편이 매일 직장동료들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속이 많이 상했어요.”

    그는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친절하다지만 사람을 가려서 대한다는 따끔한 지적도 했다. 구청이나 출입국관리사무소 공무원들이 미국인에게는 쩔쩔매면서 러시아인 앞에서는 큰소리 치더라는 것. “유학할 때 교정에서 어떤 한국 학생이 영어로 말을 걸어와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러시아에서 왔다고 했더니 말도 없이 훌쩍 가버린 적도 있어요.”

    우토치키나씨는 “러시아 여성은 무조건 ‘인터걸’로 보는 시선이 가장 황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매춘여성의 실태를 과장해서 보도한 한 방송사에 직접 항의전화를 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각은 여전한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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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유흥업소에서 일했던 나타샤는 한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말했다.

    “그리 떳떳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국은 기회의 땅이었어요.”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부산의 나이트클럽에서 1년 3개월 동안 일하고 지난해 돌아온 나타샤(사진·24). 타슈켄트에서 경리로 일하다가 한국에서 일할 댄서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나타샤는 당시 러시아 남자와 결혼해 딸을 낳은 후 남편이 도망가다시피 해 이혼하고 월급 20달러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한국행이 한창 유행일 때였다. 무용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어차피 형식에 불과한 오디션을 통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10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에 와 나이트클럽을 옮겨다니며 일했다. 숙소는 업소에서 잡아준 모텔이나 아파트. 월급은 고향에서 받았던 것의 20배인 400달러였다.

    그러나 ‘진짜 수입’은 손님들이 주는 ‘팁’으로 올렸다. 춤을 추고 무대에서 내려와 손님과 합석해 술을 따르고 잠깐 앉아 있기만 해도 손님들이 2만원 정도씩 쥐어주었다. 팁만 10만원을 받은 적도 있다. 이는 불법이지만 어느 업소에서도 막지 않았다. 그는 “업소에서 손님과의 ‘2차’를 강요하기는커녕 외박하는 것조차 금지했기 때문에 매춘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아직도 전부 ‘인터걸’로 보이십니까

    러시아 교회에서 한국 남성과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러시아 여성.

    하지만 나타샤는 “우연히 만난 구소련 출신 여성들로부터 ‘매춘을 강요당하고 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조그만 아파트를 산 후 다시 한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자국 여성의 해외 연예 관련 직종 취업을 전면 금지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좋은 편이라고 말하는 그는 “무능한 러시아 남자와는 다시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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