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7

2003.08.14

‘비운으로 끝난 황태자’ … 현대 어디로 가나

정몽헌 회장 투신자살 충격과 경악 … 남북경협 차질·현대 계열사 구심점도 잃어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08-06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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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으로 끝난 황태자’ … 현대 어디로 가나

    고 정몽헌 회장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사옥 12층엔 엄격한 통제 속에 극소수의 인원만 출입하는 방이 하나 있다. 이 방의 주인은 현대그룹의 ‘적통’을 이어받은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다. 정회장은 무슨 고민이 있는지 뒷문으로 회사를 출입하며 직원들 앞에서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고 한다. 정회장의 사무실은 서쪽으로 청와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서울 도심을 관망할 수 있도록 설계된 ‘명당’이다. 이 명당은 8월4일 새벽 정회장이 비운의 삶을 마감한 장소로 변모했다. 선친의 유업과 선친에 의해 올라선 황태자의 자리가 비운의 부메랑이 되어 정회장을 옥죈 것이다.

    정회장이 자살을 선택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7월4일 대북송금사건 1차 공판에 출석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8월1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법정에 출석해야 했다. 또 150억원 비자금 사건으로 검찰조사를 받아왔다. 정회장은 법정과 검찰에 출석을 거듭하면서도 금강산 육로관광 재개를 위해 북한을 방문하는 등 대북사업 추진에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현대그룹과 대북경제협력 사업은 그를 황태자라 불리게 했지만 그것이 정회장에게 ‘업보’가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햇볕정책·남북관계 실질적 창구

    ‘비운으로 끝난 황태자’ … 현대 어디로 가나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투신현장에 모여든 취재진.

    2월5일 개통된 동해선 임시도로는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북한측과 대북사업의향서를 체결한 지 14년 만에 이뤄진 성과였다. 정회장은 이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선친의 유업이 큰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으로 최근의 경의선 동해선 연결, 개성공단 사업까지 그동안 대북경협에서 정회장이 이끈 현대는 독보적 역할을 해왔다. 정회장은 햇볕정책과 남북경협의 선두주자요, 핵심 추진 주체였다. 선친의 생존 당시에도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사실상 정회장이 주도했다.

    정회장은 심각한 자금난을 겪으면서도 대북 투자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투자자를 물색해왔다. 정회장은 유서에서도 김윤규 사장에게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개성공단 용지조성이 끝나는 대로 공사에 들어가 내년 하반기부터 업체들을 입주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회장의 바람과 달리 대북사업은 당분간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건설 관련 실무협의 등이 무기한 연기될 전망이다. 전문가들도 현대가 대북사업 진행의 동력을 잃을 것이라는 분석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회장의 죽음은 대북사업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정회장의 도움을 받아 꽃피운 ‘DJ식 햇볕정책’의 침몰을 예고하는 사건이다. 남북전략연구소 여영무 소장은 “정회장의 빈자리를 메울 사람이 없다. 정회장의 죽음이 남북관계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경협이 늦어지면 인도적인 남북교류도 차질을 빚게 된다”면서 “이번 사건으로 DJ식 햇볕정책에 대한 전면 재평가 논의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풀이했다.

    ‘비운으로 끝난 황태자’ … 현대 어디로 가나

    정몽헌 회장이 투신자살한 후 현대 직원들이 계동 현대사옥 1층 현관 밖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앙대 이상만 교수는 “남북관계의 실질적 창구 역할을 해왔던 정회장의 죽음으로 대북사업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어떤 방식으로든 현대는 대북사업의 전면에서 퇴장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현대가 대북사업의 전면에서 물러날지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하지만 경협의 측면에서 볼 때 일단 속도조절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북측은 그동안 “금강산 관광 재개 여부는 정회장이 방북한 뒤 논의하자”고 제안하는 등 정부간 공식채널보다 정회장과의 대화를 더 선호하는 인상이었다. 북측은 정회장과 ‘7대 경협합의서’를 맺고 남북경협의 전권을 사실상 현대아산에 넘겨줬으며 현대를 유일한 사업 파트너로 여겨왔다. 따라서 정회장의 죽음은 남북을 잇는 굵은 파이프 라인 하나가 없어진 것이다. 특검 수사과정에서 사정당국이 출국금지 상태였던 정회장의 방북을 남북관계를 고려해 허용했을 정도로 남북경협에서 정회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또 개성공단이 착공되고 8월 중순 평양체육관 준공식을 앞둔 상황에서 맞은 정회장의 죽음은 북한으로 하여금 상당한 의혹을 갖게 할 수 있다. 특히 북측이 남북관계를 방해하기 위해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S경제연구소 북한팀장은 “원래 대북사업에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참 많았다. 정회장의 죽음으로 그런 것들이 모두 아무런 인수인계 과정 없이 역사에 묻혀버리게 됐다”면서 “보이지 않는 선이 가동되지 않음으로써 대북사업이 과거처럼 진행되기 힘들게 됐을 뿐 아니라 북한이 오해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개성공단 사업의 주도권이 한국토지공사에 넘어가는 등 대북사업의 무게중심이 현대 일변도에서 다양화된 만큼 대북경협이 차질 없이 추진될 것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금강산 관광 사업엔 한국관광공사가 주도적으로 개입돼 있고 개성공단의 경우는 한국토지공사가 참여하고 있어 별 문제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이수언 대변인도 “남북이 함께하는 8·15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금 지연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업이 전면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실 현대가 대북사업의 전면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던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또 특검의 수사를 받고 경영상태도 좋지 않은 기업이 무슨 대북사업이냐는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대북사업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흐려진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북사업의 주체들이 직접 북한과 접촉하게 되면 오히려 통로가 간단해지는 측면도 생길 수 있다. 정부가 대북사업 전반에 대한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다는 것. 이상만 교수는 “대북경협 전반에 위기와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성공단의 경우 시공과 자금을 실질적으로 부담하는 한국토지공사가 뒤로 밀려남으로써 사업이 어렵게 풀린 면도 있다. 장기적으로 남북경협 사업은 남북 당국이 중심이 돼 계속 전개될 것이다”고 말했다.

    ‘비운으로 끝난 황태자’ … 현대 어디로 가나

    8월4일 오후 정몽헌 회장의 아들과 부인이 정회장 빈소가 마련된 서울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어미’를 잃은 현대그룹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계열사 89개, 자산 규모 124조원(1999년 기준)으로 재계 1위의 아성을 지키던 현대그룹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대북사업이 한창이던 1999년부터다. 유동성 위기로 비틀거리던 현대에 구조조정 압력이 거세졌고 현대는 자구책으로 그룹 분할을 선택하게 된다. 정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왕자의 난’은 현대그룹의 분할을 가속화했고 급기야 그룹은 세 동강이 났다.

    문제는 사건 이후 정회장만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몽구 회장이 차지한 자동차그룹과 정몽준 고문의 중공업그룹은 이후 빠르게 정상화됐지만 정회장이 이끈 계열사들은 재무구조 악화로 하나둘씩 정회장의 손을 떠나기 시작했다.

    계열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현대건설은 채권단에 넘어가면서 계열에서 분리됐고 LG반도체와 합병했던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도 경영이 악화돼 2001년 5월 현대그룹을 떠났다. 현대증권 현대투신 등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제1의 명성을 자랑했던 현대그룹은 현재 재계 서열 15위의 ‘작은’ 그룹으로 전락했다. 이 과정에서 정회장의 경영능력과 무리한 대북사업 추진이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됐다.

    현재 현대그룹의 주요 계열사는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택배, 현대아산이다. 그러나 현대그룹 안에 남아 있는 이들 계열사의 경영성적도 신통치 않다. 대북사업을 맡은 현대아산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고, 정회장이 재기의 디딤돌로 삼으려 했던 현대상선도 자구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경영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7월23일 현대그룹의 수출창구 역할을 담당해온 현대종합상사까지 정회장의 그늘을 벗어나면서 계열사 수는 더 줄어들었다.

    사실 정회장의 현대그룹 지분은 1.3%(5개)로 현대상선 지분(4.9%), 현대투신 비상장 지분(0.78%) 등이 고작이다. 현대건설, 현대전자, 현대종합상사 등 핵심 계열사를 모두 잃어버린 정회장은 현대상선 등기이사로서 현대그룹을 관리하고 있었다. 정회장은 현대상선 지분을 4.9% 보유하고 있으나, 장모 김문희 여사가 대주주(18.6% 보유)인 현대엘리베이터가 갖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15.2%)를 더해 현대상선을 지배하고 있었다. 현대상선은 다른 현대그룹 계열사의 지분을 갖고 있는 사실상의 지주회사다.

    지배구조 전환 불가피 … 그룹 완전 해체 가능성도

    따라서 정회장의 사망으로 현대그룹은 지배구조의 일대 전환이 불가피하게 됐으며, 더 나아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설립한 ‘현대’의 완전한 해체로 귀결될 가능성도 있다. 느슨한 구조로 서로 연결돼 있는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구심점을 잃게 됐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외국인 지분이 50%가 넘는 계열사가 많아 친인척이 다시 주식을 매집해 경영권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또 계열사 중 하나가 지분을 확보해 법인 자격으로 그룹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현대그룹은 한국적 의미의 재벌 총수가 존재하지 않는 기업집단이 된다.

    일부에선 정회장의 사망이 계열분리된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이상만 교수는 “현대그룹은 이미 분리됐지만 현대라는 브랜드는 여전하다. 때문에 이번 사건이 현대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할 것이다”며 “정회장이 직접 경영하고 있던 계열사의 피해뿐 아니라 지금 잘나가고 있는 자동차, 중공업에까지 타격을 줄 수 있다. 독자 회생이 불가능한 계열사는 다른 곳에 인수되거나 부도 처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구조조정이 빨라지고 일대 격변이 있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정회장의 자살이 대외신인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 한국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푸르덴셜과 양해각서가 체결된 현투증권의 매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이 투신자살한 사건 뒤에 무엇인가 엄청난 정치 경제적인 난맥상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하며 우리 경제 전반을 불신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하대 경제학과 강병구 교수는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정경 유착, 재벌제도의 문제점 등은 이미 외국에서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 사건이 대외신인도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며 “이를 계기로 기업인에게 그룹 전체의 운명을 떠맡기고 정치권과의 관계 유지를 강요하는 등 부조리한 한국의 재벌문화가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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