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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칼럼

밭은 결코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 정찬주 / 소설가

밭은 결코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밭은 결코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산중 처소 입구에는 인사를 아주 잘하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처소를 찾는 손님 모두에게 “안녕하십니까?” 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감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감나무가 컨디션이 안 좋은지 잎들이 시들하다. 잎들은 바람이 세게 불면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만다.

병이 든 것 같지는 않은데 몸 어딘가가 불편한 듯하다. 묵은 밭에서 옮겨온 지도 어느새 2년이 다 됐는데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나 보다. 어제는 장맛비가 오려고 해서 일단 감나무 주위에 무성하게 자란 코스모스를 뒷밭으로 가는 길목에 옮겨 심었다. 코스모스가 감나무 뿌리로 갈 영양분을 가로채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오늘은 감나무 주위에 고랑을 판 뒤 퇴비를 듬뿍 묻어주고 나니 가랑비가 내린다. 농부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 내리는 비는 비료와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어린 벼들을 쑥쑥 자라게 하는 비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키가 무럭무럭 잘 자란다고 하여 노란색의 원기소를 먹은 적이 있다. 비위 상하는 냄새 때문에 먹는 척하다가 어른들 몰래 버린 적이 많지만 오늘 나무에게 준 퇴비 역시 정(情)이 담긴 원기소 같은 것이리라.

부지런히 땀 흘려야만 열매 거둘 수 있는 치열한 현장



개가 코가 축축하지 않고 말라 있으면 병이 생긴 것이듯 식물도 잎이 싱싱하지 않고 맥이 풀려 있으면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그럴 수 있으니 더 세심하게 보살펴주어야 한다. 감나무 뿌리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코스모스를 뽑아내고 퇴비를 묻어주었으니 응급조치는 한 셈이다.

코스모스를 뽑으며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코스모스가 가녀리다고만 알고 있는데 잘못된 선입관이 아닐 수 없다. 녀석을 뽑아보니 줄기는 의외로 질겼고 땅속으로 뻗어간 뿌리는 어찌나 악착같은지 마치 문어의 빨판 같았던 것이다. 겉은 부드러우나 안으로는 한없이 강한 식물이 있다면 바로 코스모스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코스모스에게 외유내강의 지혜를 배운다.

산중 처소의 가족들이 나에게 걱정만 주는 것은 아니다. 밭에서 가져오는, 농약을 치지 않은 채소들은 나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준다. 상추와 쑥갓은 먹고 남아 초파일에는 아래 절에 보시까지 했다. 상추는 지금껏 좋은 반찬이 되고 있지만 쑥갓은 너무 자라 먹을 수 없다. 그래도 국화처럼 생긴 꽃이 예뻐서 뽑지 않고 밭에 그냥 둔 채 틈날 때마다 감상한다.

감자는 긴 두둑에 세 군데나 심었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은 것 같다. 두 바구니 정도밖에 수확을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감자 잎이 노래지면서 캘 때가 됐다고 땅속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하지 감자’란 말을 듣고 자랐는데 실제로 하지 절기를 전후해서 캤던 것이다.

다람쥐가 파먹어 다시 심곤 했던 땅콩도 이제는 잎이 제법 밭을 덮고 있다. 싱거운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왜 땅콩인지 산중에 와서야 알았다. 땅속에서 나는 콩이라 땅콩인 것이다.

더덕은 곡예사처럼 줄기 옆에 꽂아둔 나뭇가지를 타고 오르는 중이고, 수박은 열 모종을 심었는데 벌써 주먹만한 열매를 달고 있다. 농부가 열두 마디 이후에 연 수박만 키우라고 하지만 초보 농사꾼은 아깝고 귀여워서 차마 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크고 맛 좋은 수박을 얻기 위해서는 기회를 보아가며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이미 나온 작은 열매들을 딸 생각이다. 고구마도 많은 줄기를 잘라서 꺾꽂이했으니 가을에는 수확을 제법 할 터고, 겨울이면 두고두고 아궁이에 구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밭이 낭만적이고 정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땀을 흘려야만 적기에 씨 뿌리고 열매를 거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밭은 결코 식물이 얌전하게 자라는 곳이 아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의 저잣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운동선수들이 격전을 치르는 운동장처럼 땀이 뚝뚝 떨어지는 곳이다. 식물도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면 주전으로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교체되고 만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괭이를 들고 밭을 갈아본 이라면 나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 믿는다.



주간동아 392호 (p104~104)

정찬주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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