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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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 많은 ‘디자이너’ 꿈 많은 ‘삼성맨’

올봄 제일모직에 영입된 정구호 상무, 내셔널 브랜드 ‘구호’로 여성복 시장 평정 선언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3-07-03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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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 많은 ‘디자이너’ 꿈  많은 ‘삼성맨’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나이…, 마흔하나죠.”

    올봄 제일모직 상무로 취임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디자이너’ 정구호씨와의 인터뷰를 끝내며 마지막으로 나이를 질문했을 때,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국내 최고 재벌 삼성 계열사 임원으로 스카우트된 사람의 겸손함, 여전히 소년 같은 표정으로 상대에게 마흔이란 나이를 이해시켜야 하는 당혹스러움, 그리고 마흔을 넘기도록 미혼인 남자의 쑥스러움이 대답을 주저하게 했나 보다.

    뉴욕 파슨스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가난한 유학생이 15년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때가 1996년도니, 그가 한국에서 활동한 기간은 불과 8년이다. 그동안 그는 다른 사람이 18년 동안 해도 해내지 못할 만큼의 일을 해왔다. 그러고도 그는 ‘아직’ 마흔한 살이다.



    영화 ‘정사’ 의상 맡으며 ‘유명’ 대열 합류

    그를 발탁한 사람이 제일모직에서 3세 경영을 시작한 삼성 이건희 회장의 차녀 이서현 부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최근 이회장이 찾는 ‘천재’의 조건-‘끼 있고 놀기도 잘하고 공부도 효율적으로 잘하며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에 정상무처럼 잘 맞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이미 뉴욕에서 레스토랑 운영과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재능을 인정받은 정구호 상무는 서울에 돌아와 청담동에 ‘구호(KUHO)’란 이름의 작은 부티크를 내자마자 패션 리더들 사이에서 단숨에 화제가 됐다. 절개선만을 이용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몸의 선을 드러낸 그의 옷들이 ‘선(zen)’이라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새로운 컨셉트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개 패션디자인을 ‘한국적인 것’이거나 혹은 뭔가 독특하고 장식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옷이 ‘정신’을 대변해준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이미숙, 이정재 주연의 영화 ‘정사’의 미술감독을 맡으면서다. 주인공의 삶을 상징하는 텅 빈 공간 연출과 흑백으로만 표현된 이미숙의 의상은 정구호를 하루아침에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하나로 만들었으며, 이후 트렌드의 주류를 미니멀리즘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이어서 ‘텔미섬씽’ ‘순애보’ ‘쓰리’ 등 몇 편의 영화와 연극에서 의상 혹은 아트디렉터를 맡았고 ‘륭’ 등 청담동 레스토랑의 컨설턴트를 맡기도 했다. 2000년에는 중견의류업체 ㈜NSF와 손잡고 개인 부티크로 운영하던 ‘구호’를 내셔널 브랜드로 확대했으며, 지난해 패션업체 ㈜쌈지의 CEO(최고 경영책임자)로 영입돼 쌈지의 인사동 프로젝트와 의류사업을 병행해 진행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그가 내셔널 브랜드 ‘구호’의 옷을 디자인한 것은 단 한 시즌뿐이다. 사업 파트너와 생각이 달라 바로 손을 뗐기 때문이다.

    끼 많은 ‘디자이너’ 꿈  많은 ‘삼성맨’

    정구호 제일모직 상무(왼쪽)는 “‘구호’와 제일모직에 도움이 된다면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할 것” 이라고 말했다. 오는 10월에는 그가 의상과 가구 디자인을 맡은 영화 ‘스캔들’(왼쪽)과 새로운 ‘구호’의 옷이 동시에 공개된다.

    제일모직은 이번에 그를 상무로 영입하면서 ‘구호’까지 인수했다. 그는 거의 4년 만에 자신의 브랜드 ‘구호’를 되찾은 셈이다. 15개 백화점 매장과 디자인실, 기획실 직원들이 모두 제일모직으로 옮겨왔다. “‘구호’를 다시 만난 건 정말 감격스러워요. 어쩔 수 없이 떠났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제일모직으로 오는 것과 별도로 ‘구호’의 인수가 논의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새 여성복 브랜드를 만들려다 ‘구호’를 인수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거죠.”

    ‘빈폴’ ‘갤럭시’ ‘FUBU’ 등 남성복이나 캐주얼 브랜드에 비해 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여성복 브랜드의 경쟁력을 ‘구호’를 통해 살려보겠다는 것이 제일모직의 전략이다.

    “밖에서 듣던 것보다 문제가 어렵지도, 심각하지도 않았어요. MD(머천다이징 디렉터) 중심의 시스템이 너무 잘 돼 있어서 오히려 감성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던 점이 여성복을 만드는 회사로서의 약점이었다고 할 수 있죠. 경영 쪽에 직접 비주얼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제일모직만큼 컨설팅이나 정보를 잘 활용하고, 생산이나 물류 체계가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회사를 보지 못했어요.”

    루이뷔통 같은 세계적 기업 성장 ‘야심’

    그는 올 가을 일부 자신이 디자인한 옷과 새로운 광고디자인, 리뉴얼한 인테리어의 매장을 내고 반응을 살펴볼 계획이다.

    “현재 ‘구호’의 1년 매출이 100억원 정도인데, 앞으로 매출 목표를 더욱 높게 잡을 거예요. 하지만 올해엔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어떤 회사인지 알 만큼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고, 안정적인 틀을 만드는 데 주력하려고 해요.”

    이를 위해 그는 너무나 능숙하게 다루던 검은색과 짙은 감색 대신 붉은색을 테마로 무용수의 역동적인 몸과 움직임을 강조한 광고를 만들었다. 그 광고를 위해 그가 디자인한 텍스타일과 디자인은 초기 ‘구호’ 마니아들까지 충분히 기쁘게 할 것 같다.

    “제가 ‘구호’에서 손을 뗀 동안 편지나 메일로 섭섭함이나 그리움을 표시한 분들이 많았어요. 예전 마니아들을 돌아오게 하면서 현재의 ‘구호’에서 소비자 반응이 좋은 부분은 유지해야죠. 기업으로선 이익을 남기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구호’의 현재 가격선을 지키면서 그 안에 고급 라인을 만들 계획입니다.”

    흔히 삼성의 기업문화를 은유적으로 말할 때 “삼성에 들어간 사람은 곧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고 한다. ‘삼성맨’으로 변신하든가, 사표를 쓰든가. 정상무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지금까지 관계한 어느 회사보다 체질적으로 잘 맞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질투에 가까운 심정으로 자유롭고 사적인 ‘디자이너’ 정구호의 프로젝트를 보고 싶어하는 팬들이 있다.

    “사실은 10월에 개봉하는 영화 ‘스캔들’을 작업했어요. 사극이라 한복과 고가구를 디자인했죠. ‘정사’의 이재용 감독과 다시 일하는 건데 이미숙, 전도연, 배용준씨 등이 나와요.”

    그는 ‘구호’의 미래에 대해서, 회사로부터 전적인 신뢰와 지원을 받고 있으며 제일모직에 도움이 된다면 자신의 이름을 건 개인적 프로젝트를 앞으로도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구호’는 매우 창조적이며, 동시에 매우 잘 팔리는 상품을 의미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일모직과 자신, ‘구호’의 결합에서 루이뷔통 같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디자이너 하우스 ‘구호’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이제 겨우 마흔한 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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