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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권력의 핵 ’청와대’

대한민국 넘버1 … 그대 이름은 ‘대통령’

인사·정보·사정 장악 ‘무소불위 파워’ … 근거리 세력 덩달아 위세 부리다 구설 오르기도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대한민국 넘버1 … 그대 이름은 ‘대통령’

대한민국 넘버1 …  그대 이름은 ‘대통령’
”죄송합니다.”

1999년 9월10일 대한항공 특별기 안. 한 인사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출국하던 김대중 대통령 앞에 나타나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어렵사리 한마디 꺼냈다. 주인공은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묵묵부답은 조회장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당초 그는 김대통령의 당시 해외 순방에 수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통령이 자사 항공기를 특별기로 이용할 때 항공사 오너가 수행하는 게 관례지만 당시 국세청이 한진그룹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심이택 사장을 보낼 생각이었던 것. 그러나 “대통령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나섰다고 한다.

조회장 주변 사람들의 이런 권유는 말할 것도 없이 대통령을 만나면 뭔가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 당시 조회장에게 대통령과의 동행을 권유했던 한 기업인은 “김대통령을 만나 바지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력히 권유했다”면서 “대통령에게는 한 기업인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대통령 집무실 문고리 많이 잡는 사람이 실세?



대한민국 넘버1 …  그대 이름은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왼쪽)이 98년 3월3일 오후 청와대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서리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조회장 주변 사람들의 이런 권유는 한진그룹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 자체가 대통령의 ‘결심’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계의 시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대통령이 특정 재벌에게 특혜를 줄 수는 없지만 한진그룹의 경우에서 보듯 그래도 대통령이 마음만 먹는다면 재벌에게 손해를 입힐 수는 있는 것 아니냐”면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재계가 대선 때마다 대선 판도에 큰 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물론 당시 청와대나 국세청은 한진그룹 특별 세무조사는 정기 법인세 조사의 일환이었고, 국세청이 청와대와 조율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청와대와 국세청이 명시적으로 조율은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적어도 이심전심으로 대통령의 뜻이 국세청 쪽에 전달되지 않았겠느냐고 보고 있다.

대통령의 힘은 특별 세무조사에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조수호 한진해운 사장 등 3부자에 대한 사법처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당시 검찰은 수사 결과 국세청 고발 혐의를 대부분 확인하고 3부자에 대한 처리 방안을 청와대에 보고했다”면서 “대통령 재가 과정에 조중훈 회장이 고령인 점이 고려돼 조중훈 회장은 구속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재벌 총수 구속 여부가 결정됐던 셈.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은 국가를 대표하고 행정부의 수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현실적 권한은 무엇보다 대통령제라는 제도 자체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공무원 임명권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각종 정보기관에서 올라온 정보를 독점할 수 있도록 보장돼 있다는 것. 또 무엇보다 각종 사정기관도 인사권을 통해 장악하고 있다.

대통령의 힘이 크다 보니 대통령 집무실 문고리를 누가 많이 잡느냐에 따라 실세 여부가 판가름나기도 한다. 대통령을 자주 만난다는 것은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이는 그대로 그 인사의 영향력으로 나타났던 것.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했던 한 인사의 말.

“처음에는 몰랐는데 대통령을 만나고 나올 때는 항상 웃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특히 대통령에게 질책을 받았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은 얼굴을 찡그리고 나왔더니 부처 내 공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관료들은 자기 부처 장관이 대통령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만 장관에게 충성을 하는 것 같더라.”

그러나 우리 대통령제도 대통령에게 제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 철학을 법적으로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국회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 현직 비서관은 “김대통령이 그렇게 개정하고자 했던 국가보안법도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그렇게 보면 대통령에게는 힘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대한민국 넘버1 …  그대 이름은 ‘대통령’

1998년 6월1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기강확립대책 실무협의회에서 각 부처 관계자들이 향후 사정방향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왜 역대 대통령이 여당 의원 공천권을 통해 국회를 장악하려고 하는지를 설명해준다. 공천권이 대통령에게 있는 한 여당 의원들은 대통령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게 정치권 인사들의 일치된 견해. 김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대통령은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을 통해 공천권을 행사했다. 권 전 고문의 핵심 측근의 말.

“당시 김대통령은 권 전 고문에게 김상현 김봉호 김인곤 의원 등 세 의원을 공천에서 탈락시키라고 한 것으로 안다. 권 전 고문은 그 후 사석에서 ‘김상현 의원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고, 김봉호 의원도 상당히 반발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인곤 의원 정도는 주저앉힐 수 있을 것 같다’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김대통령이 국회를 장악하지 못했다고 해서 ‘힘없는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면 이는 오산이다. 가령 재벌 총수 구속만 해도 법적으로만 따진다면 독립된 수사기관인 검사가 결정하게 돼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대통령 재가가 필요한 사항이다.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나 재벌 총수 등 유력 인사에 대한 사법 처리는 관례적으로 청와대와의 ‘조율’을 거치도록 돼 있기 때문. 이 경우 대통령과 검찰 사이에 창구 역할을 한 사람이 역대 민정(사정)수석비서관이다.

민정수석은 검찰이나 국가정보원, 감사원 등 사정기관으로부터 올라온 각종 비리 정보를 종합,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자리다. 뿐만 아니라 고위 공직자들의 인사 검증도 겸하고 있어 힘이 쏠릴 수밖에 없다. 또 대통령의 친인척도 집중 관리해 이래저래 힘있는 자리로 통한다. 어떤 의미에서 대통령의 힘은 상당 부분 민정수석을 통해 발휘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산하에 사정·공직기강·민원·민정 비서관을 두고 있다. 이 가운데 사정비서관 자리는 서로 차지하고 싶어하는 요직 중의 요직이다. 특히 검사들에게는 고속승진이 보장되는 선망의 대상인 자리다. 그러나 워낙 힘이 있다 보니 구설에도 자주 올랐고, 경우에 따라서는 권력의 최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현 정부 들어 옷 로비 사건으로 구속된 박주선 법무비서관이 대표적이다.

사정비서관과 발맞춰 사정작업을 벌이고 있는 곳은 정부 부처에서 파견된 인원 10명이 근무하는 공직기강비서관실이다. 기본 업무가 공직 인사, 공직 감찰활동으로 공무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곳이다. 장·차관급은 물론 대학교수, 언론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인물 파일인 ‘존안카드’도 관리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김영삼 정부로부터 넘겨받은 존안카드는 3000여명 분. 지금은 숫자가 더 늘어났을 것이라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직기강비서관실이 공직사회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 이유는 대통령의 또 다른 힘의 원천인 인사권을 뒷받침하는 곳이기 때문. 3급 이상 고위 공직자들의 인사를 사전에 스크린하는 곳이 공직기강비서관실이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관리하는 존안카드에 한번 부정적인 의견이 기록되면 어느 정권에서도 고위 공직에 중용되기 힘들다고 보면 된다.

여야 정치인 등 유력인사 동향 ‘일일 보고’

대한민국 넘버1 …  그대 이름은 ‘대통령’
지금은 한나라당에서 ‘경제통’으로 통하는 이모 의원. 그는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그룹이 휘청거리자 금융통화위원을 희망해 청와대에 이력서를 제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공직기강비서관실의 스크린 과정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고, 방향을 돌려 한나라당 행을 택함으로써 전국구 의원이 되는 ‘행운’을 잡았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나 할까.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위치도 청와대 비서실 건물에서 떨어져 있다. 삼청동 감사원 건물을 끼고 왼쪽으로 난 편도 1차선 도로를 따라 200여m 가면 왼쪽에 단층 건물이 나타나는데, 바로 이 건물이 공직기강비서관실이다. 공직기강비서관실 관계자는 “존안파일도 따로 보관해야 하는 데다 때로는 청와대 비서실 관계자들도 인사 대상이 되기 때문에 보안을 위해 독립된 건물로 나와 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에게는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 첩보만 집중되는 게 아니다. 여야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 등 유력 인사들의 ‘동향’도 일일이 보고된다. 특히 국정원 정보가 그런 내용이다. 말하자면 대통령은 국정원을 통해 유력 인사들의 동향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 7월 중순 정가를 시끄럽게 했던 ‘이인제 괴문서’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인제 괴문서’는 그해 7월10일 당시 민주당 서영훈 대표가 의원총회에서 “이인제 고문이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참관을 위해 협조를 요청했고, 이고문의 측근 인사가 외교통상부 간부에게 ‘형편상 어렵다고 하는데 이러면 문제가 생긴다’고 압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문서를 읽는 장면이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잡히면서 알려지게 됐다.

당시 ‘이인제 괴문서’의 출처를 두고 여러 설이 나돌았지만 ‘주간동아’는 그 문서가 청와대 정무비서관실 김모 국장이 김덕배 당시 대표비서실장에게 전달한 것으로 확인했다. 김국장은 당시 “정무비서실에는 정부기관 증권가 기업 등 여러 곳에서 보고서가 입수된다. 그 문서가 이 가운데 어느 곳 문서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국정원에서 올린 보고서에 들어 있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대통령의 통치권을 보좌하는 기관들이 많아도 역대 대통령들이 임기 말에는 ‘식물 대통령’ 신세가 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 점에서 보면 힘있는 대통령은 여론의 지지를 받을 때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주간동아 2002.12.26 365호 (p26~29)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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