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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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차별’ 스크린에 담다

국가인권위 지원으로 감독 6명이 제작 … 장애인·따돌림 등 주제로 내년 봄 개봉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2-12-12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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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과 차별’ 스크린에 담다

    대륙횡단만큼이나 고된 장애인의 길 건너는 광경은 여균동 감독의 단편영화 ‘대륙횡단’의 소재가 됐다.

    서울 강남의 한 이비인후과. 의사와 어린이 환자 보호자의 입씨름이 한창이다.

    “이 아이는 혀 수술을 할 필요가 없는데요?”(의사)

    “발음이 제대로 안 된다고 영어학원에서 왕따당하는데 어떡해요.”(환자 어머니)

    “엄마, 무서워. 나 수술하기 싫어.”(어린이)

    어떻게든 수술을 받게 하려는 어머니와 수술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유치원생 어린이의 실랑이가 30분 넘게 계속됐다. 평소 영어학원에서 ‘L’ 발음과 ‘R’ 발음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놀림을 받아왔던 이 어린이는 결국 설소대 성형술을 받는다. 전신마취 상태로 입을 벌리고 누운 어린이의 입으로 날카로운 메스가 클로즈업된다. 혀 아래 자리잡은 설소대는 선혈을 쏟으며 잘려나가고, 어린이의 보호자는 입 안 가득히 고인 피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박진표 감독의 새 영화 ‘오디션’에 담겨질 장면이다. ‘오디션’은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김창국·이하 인권위)의 지원을 받아 박감독이 만들고 있는 단편영화다. ‘오디션’은 박감독 외에 박광수 박찬욱 여균동 임순례 정재은 감독이 각각 10~20분 분량으로 단편영화를 찍어 한데 묶어 상영하는 옴니버스 영화 중 한 작품.

    인권위가 ‘인권영화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기획·제작에 나선 이 옴니버스 영화는 ‘차별’을 주제로 한 6개의 작품으로 이뤄져 있다. 색깔도, 세대도 다른 여섯 감독의 옴니버스 ‘인권영화’인 셈이다. 그동안 일부 영화에서 인권과 관련된 내용을 소재로 다룬 적은 있으나, 국내의 내로라하는 감독들이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집중 조명하는 영화는 인권위의 이번 시도가 처음이다.

    프랑스에서는 1991년 장 뤽 고다르, 알랭 르네, 코스타 가브라스 등 유명 감독들의 인권영화 단편 모음인 ‘잊지 않기 위해(Contre I’oubli)’가 제작된 바 있다. 인권위가 이를 벤치마킹해 인권 영화 제작에 나선 것. 영화당 5000만원의 제작비는 전액 국고에서 지원된다. 후반 작업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후원한다. 인권위 관계자는 “내년 봄 개봉이 목표”라며 “일반 상업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극장 개봉을 할 예정이며베니스영화제 등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여섯 감독 외에도 이창동 감독 등 여러 감독들이 관심을 보였으나 제작 일정이 맞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혀 늘이기 수술’ 등 언론보도 영화화

    ‘인권과 차별’ 스크린에 담다

    주간동아가 보도했던 ‘혀 늘이기 수술’과 ‘네팔 여성 찬드라 구릉’은 박진표·박찬욱 감독 영화의 소재로 등장한다.

    이들 영화 대부분은 사회 현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오디션’의 ‘혀 늘이기 수술’은 ‘주간동아’의 보도(312호 ‘영어가 아이 잡네’)를 시작으로 언론에서 한동안 주목했던 병적인 영어교육 열풍의 한 단면이다. 박감독은 “혀 늘이기 수술에 대한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면서 “무시되기 쉬운 어린이 인권과 부모의 자식 학대 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디션’ 외에도 영화가 보여주는 차별의 양상들은 다양하다.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은 뇌성마비 장애인이 광화문 네거리를 횡단한다는 내용. 지하도를 오르내릴 엄두도 못 내는 중증 장애인에게 광화문 네거리는 대륙만큼이나 넓게 느껴진다. 실제 뇌성마비 장애인인 연극배우 김문주씨(30)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에 걸렸다가 ‘우연히 나았다’는 여감독은 “주역인 김문주씨에게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은 연기가 아닌 실제상황이다. 그런 만큼 보는 이들에게 진실한 감동을 전해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고양이를 부탁해’로 화제를 모았던 정재은 감독의 ‘그 남자의 사정(事情)’은 신상이 공개된 성범죄 사범의 이야기다. “인권 하면 소수자들을 먼저 떠올리고 가해자나 범죄인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보장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정감독은 이 같은 소재를 택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 남자의 사정’은 12월6일 촬영이 끝나 현재 편집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인권과 차별’ 스크린에 담다

    인권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여균동 박찬욱 박광수 감독(왼쪽 부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뉴욕인권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던 박광수 감독은 12월 중순 ‘주차장’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크랭크인 한다. 박감독은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표를 받는 직원과 주차하려는 사람이 벌이는 실랑이를 가벼운 터치로 담을 계획이다. “인권영화라고 해서 교육용 영화는 아니잖아요. 관객들이 유쾌하게 본 후, ‘차별’이라는 주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일약 흥행감독의 대열에 오른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가제). 이 영화는 네팔 여성 찬드라 구릉(46)이 한국에서 겪은 실제 사건을 다뤘다.

    1993년 한 섬유공장에서 보조미싱사로 일하던 찬드라는 공장 근처의 한 식당에서 라면을 시켜 먹는다. 뒤늦게 돈을 잃어버린 사실을 안 찬드라는 계산을 하지 못하고, 식당 주인은 그를 경찰에 신고한다. 한국어를 더듬는 찬드라를 경찰은 행려병자로 취급해, 결국 찬드라는 6년4개월 동안 정신병원 생활을 한다(주간동아 360호 ‘코리아 악몽, 지워지기를…’ 참조). 박감독은 찬드라의 공장 동료, 정신병원 의사, 경찰 등 사건 관계자들을 꼼꼼히 취재했고, 10월에는 네팔 현지 촬영까지 다녀왔다.

    제작비 부족으로 배우들 저가 출연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 영화 ‘미소’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임순례 감독은 인권위의 참여 권유를 고사했다가 프로젝트 완료 시점이 올해 연말에서 내년 2월로 미뤄지자 뒤늦게 합류한 경우.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한 임감독은 상고 졸업반 열여덟 살 소녀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주인공은 ‘차별 사회’의 덕목인 ‘미모’를 갖추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인물.

    임감독의 영화(세 친구·와이키키브라더스) 속 주인공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주류로부터 따돌림당하는 존재들이다. 임감독은 “못생긴 외모는 한국사회에서 차별받는 비주류에 해당된다”며 “주류에 끼지 못하고 음지와 골방을 찾아 헤매는 ‘와이키키브라더스’의 청년들과 인권영화의 주인공 소녀는 비슷한 선상에 있다”고 말했다.

    이번 인권영화 제작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제작비였다. 제작비 100억원을 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비교하면 총 제작비 3억원을 여섯 감독이 나누어 쓴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제작비는 초라한 수준. 대부분의 배우와 스태프들은 차비 수준의 개런티를 받고 일했다. 네팔 현지 촬영을 다녀온 박찬욱 감독은 제작비 부족으로 허덕이다 다행히 ‘초코파이’의 협찬을 받았다.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앞으로 점심은 무조건 초코파이로 먹자”는 농담 아닌 농담이 유행했다고 한다.

    영화 ‘제작자’인 인권위는 유명 감독들이 만든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키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조폭, 코미디 등 가벼운 소재의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이 ‘인권’이나 ‘차별’과 같은 주제의 영화를 보기 위해 7000원의 입장료를 선뜻 지불할지는 의문이다. 여균동 감독은 “장애인이나 성범죄자가 나오는 영화는 당연히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항변하는 관객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회가 정상적이라면, 이런 영화를 불편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 영화를 찍고 있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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