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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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만한 영화, 척 보면 압니다”

시사회 통한 흥행 감별사 ‘극장 프로그래머’ … 사회적 감각·자신만의 ‘감’으로 상영작 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2-12-11 12: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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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될 만한 영화, 척 보면 압니다”

    흥행 영화 사냥의 귀재인 각 극장 프로그래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중앙시네마 강기명, 명보극장 김상신, 센트럴 6 시네마 오미선 팀장(왼쪽부터).

    12월5일 오후 4시 서울 명보극장 로비. 개봉을 앞둔 영화 ‘시몬’(앤드류 니콜 감독)의 기자 및 배급 시사회가 끝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극장 밖으로 몰려나왔다.

    “영화 어때?” “괜찮긴 한데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에 비하면 약한 것 같지 않아?” “맞아. 아무리 알 파치노가 주연이라고 해도 지금은 어렵겠어. 개봉을 좀 늦추는 게 좋겠는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방금 본 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10분 뒤 인근 중앙시네마에서 열리는 심리 스릴러물 ‘H’(이종혁 감독) 시사회에 늦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루에 두세 편씩 영화를 보며 영화의 흥행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들, 이들이 ‘극장 프로그래머’다.

    극장 프로그래머는 극장에서 어떤 영화를 상영할지 결정하는 사람이다. 매일 쏟아지는 숱한 영화 중에서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골라내고 자신들의 극장에 걸 영화를 선택한다. 일단 개봉한 영화의 상영 기간과 교체 시기를 결정하는 것도 이들의 몫. 이 결정이 조금만 어긋나도 극장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극장 프로그래머의 흥행에 대한 감각은 ‘도사급’이어야 한다. 몇몇 베테랑들은 “감독과 배우, 줄거리만 알면 관객수와 분포도가 대충 그려진다”고 말할 정도.



    이날 시사회를 연 ‘시몬’의 배급사도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를 피해야 유리하다는 이들의 의견에 따라 12월19일로 예정돼 있던 영화 개봉을 결국 내년 1월17일로 늦췄다.

    한국 영화계에서 극장 프로그래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부터. 때문에 현재 극장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3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다. 평범한 회사원 출신에서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할리우드 키드’에 이르기까지 이력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영화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영화판을 읽는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30대 초·중반의 영화광 ‘공통점’

    “될 만한 영화, 척 보면 압니다”

    극장 프로그래머들은 좋은 영화를 고르기 위해 하루에 두세 번씩 시사회에 참석하기도 한다. 5일 열린 ‘H’ 시사회 모습.

    서울 명보극장 5개 관의 상영작을 결정하는 극장 프로그래머 김상신 팀장(30)은 “1년에 수백회의 시사회가 열리기 때문에 하루에 영화 서너 편씩을 내리 봐야 할 때가 많다”며 “밥 굶어가며, 게다가 필름이 돌아가는 내내 ‘과연 이게 흥행이 될까’ ‘이걸 걸려면 어느 영화를 내려야 하는지’까지 고민하면서 영화를 봐야 하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웬만한 애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건 첫째 영화가 좋기 때문이고, 둘째 자신의 영화에 대한 판단이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질 때 오는 ‘짜릿함’ 때문이라는 것.

    이들이 영화의 흥행성을 가늠하는 코드는 다양하다. 계절과 경제 상황, 사회 분위기 등은 물론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가장 절대적인 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 영화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이건 너무 앞서갔네’ ‘야, 이거 되겠는걸’ 하는 느낌이다. 사실 흥행성을 판단하는 결정적 요소는 바로 이런 주관적 판단이라는 게 극장 프로그래머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때문에 이들은 젊은층에 인기 있는 만화책을 빠짐없이 읽거나 살사 댄스를 배우고 국제영화제에 꾸준히 참석하는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 프로그래머 1세대로 경력 13년의 베테랑인 황인옥 코아토탈시스템 이사(49)의 감각은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1996년 ‘왕가위 신드롬’을 일으킨 영화 ‘중경삼림’ 열풍이 바로 황이사의 작품. 당시 왕가위는 전작 ‘아비정전’과 ‘동사서독’이 모두 흥행에 참패하면서 홍콩에서조차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15만 달러에 수입된 이 영화를 본 순간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은 황이사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코아아트홀 상영을 결정했다. 황이사의 예감은 적중, 개봉 첫날부터 관객들이 극장을 겹겹이 둘러쌀 정도로 몰려들며 이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에 환호했다.

    “될 만한 영화, 척 보면 압니다”

    명보극장 전경.

    그러나 프로그래머가 독자적으로 내린 판단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 중앙시네마 강기명 팀장(31)에게는 최근 흥행에 참패한 ‘남자 태어나다’가 뼈아픈 기억이다. 시사회에서 ‘남자…’를 본 후 강팀장은 ‘잘 만든 영화’라고 판단하고 극장에 내걸었고, 영화의 초반 흥행이 저조해 많은 극장이 간판을 바꿔달았을 때도 ‘언젠가는 관객이 들 것’이라며 일주일을 버텼다고 한다. 그러나 주말 전 회 관객이 50명에도 못 미치는 영화를 혼자만의 힘으로 지킬 수는 없었다.

    “제가 흥행이 될 거라고 본 영화를 관객들이 외면하니 ‘이제는 내 감각이 떨어졌구나. 더 이상 프로그래머로 활동할 수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자괴감까지 들었어요. 차라리 남들 따라 대작 위주로 편하게 고를 걸 하는 후회도 들었고요.”

    프로그래머들은 이처럼 영화의 흥행 성적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겪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고 토로한다. 관객과 극장주가 원하는 ‘재미있는’ 영화, ‘될 만한’ 영화를 고르느라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걸지 못할 때 느끼는 상실감도 크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프로그래머들은 ‘관객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영화’를 최우선 조건으로 삼아 영화를 선택하면서도 자신의 개성이 묻어나는 작품을 함께 고르기 위해 노력한다.

    센트럴 6 시네마와 분당 시네플라자의 오미선 팀장(36)은 “프로그래머들의 이런 노력이 있어야 극장간에 차별성이 생기고 다양한 문화적 실험이 가능해진다”며 “때로는 배급사나 극장주와 갈등을 겪을 때도 있지만 프로그래머로서의 자존심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선택한 영화 흥행 참패 땐 말 못할 스트레스

    황인옥 이사의 영화 선정기준은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좋은 영화’. 다소 막연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흥행에서 ‘대박을 터뜨리지’ 못한다 해도 예술성 높은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기 때문. 현재 시네코아와 코아아트홀, 하이퍼텍 나다, 광화문 시네큐브 등에서 이런 예술영화들을 접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못 보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극장을 꾸미고자 하는 오미선 팀장은 흥행작들을 개봉하는 틈틈이 각종 기획 영화제를 열고 미개봉 프랑스영화나 가족영화, 청소년영화들을 상영토록 하고 있다. 중앙시네마 강기명 팀장도 단편영화와 이미 상영이 끝난 화제작들을 상영하는 영화제를 꾸준히 열고 있다.

    이들 프로그래머들이 공통적으로 예측하는 올 겨울 대박 영화 1순위는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독특한 색깔의 우리 영화 ‘색즉시공’과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도 ‘반지의 제왕’과 각축전을 벌이며 선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영화들은 이미 상당수의 극장을 확보하고 여유 있게 개봉일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프로그래머들이 공통적으로 추천하는 좋은 영화인 ‘8명의 여인들’(프랑수아 오종 감독)과 ‘웰컴 투 콜린우드’(앤서니 루소·조이 루소 감독) 등은 이 대작들 때문에 연말 개봉이 좌절된 상태다.

    관객의 선호도를 정확히 읽어내는 ‘선구안’으로 흥행의 대박을 터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영화를 찾고 싶어하는 극장 프로그래머들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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