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8

..

“통화내용 다 들킬까 겁나”

국정원 불법 도청 논란 이후 불안감 확산 … 정치권, 관가, 재계 등 정보수집 피대상자들 ‘공포’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2-10-31 14:0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통화내용 다 들킬까 겁나”
    올해 국정감사는 끝났다. 국가정보원장이 참석하는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도 끝났다. 그러나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 도·감청 의혹의 여운은 길고, 깊게 남게 됐다. 수많은 사람들은 ‘내가 한 말을 국가가 엿듣고 있으며, 그로 인해 내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게 됐다.

    지난 수년간 도·감청 문제는 1년에 한 번꼴로 사회문제화됐다. 국감을 통해 정부의 감청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 이를 근거로 문제가 제기되는 식이었다. 관련 자료라는 것은 감청 횟수 증감 추이 등 정부측이 내놓는 통계가 대부분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도청당하는 세상?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좀 다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한 폭발력을 지닌 도청 의혹이 제기됐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국가정보원이 광범위하게 불법 도청을 자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등장인물만 해도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 청와대 1급 비서관,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 한화 김승연 회장, 대북한 브로커 요시다씨 등 접근조차 힘든 고위층, 특수 신분들이다.

    대통령비서실장까지 도청당하는 세상이라면 소위 ‘보통 사람들’의 전화통화, 대화 내용 정도는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듣는다’는 얘기가 된다. 도청 의혹은 사회 각계에 걸쳐 도청 노이로제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정치권, 관가, 재계 고위층 등 소위 국정원의 주요 정보수집 대상은 매우 심각한 도청 공포를 느끼고 있다. 이들 잠재적 피해자들은 정형근 의원 폭로가 구체적인 데다 정의원이 도청 자료를 입수했다고 주장하는 당사자인 이근영 금감위원장과 이귀남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이 통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있어 상당히 긴장하는 분위기다.

    “통화내용 다 들킬까 겁나”

    10월4일 국회 정무위원회의 금융감독원에 대한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왼쪽)이 의원들의 추궁이 이어지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위).10월24일 오전 국회 정보위에 출석한 신건 국정원장.

    올 들어 국정원이 컴퓨터 해킹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드러난 적이 있어 관계자들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이런 사실은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이 올해 자신의 담당 재판부에 낸 탄원서를 통해 밝혀졌다. 김 전 차장은 이 탄원서에서 “고위 공무원과 판검사, 국가정보원 직원 등 130여명이 지난해 분양 경쟁률이 100대 1을 넘었던 경기 성남시 분당 신도시 파크뷰 아파트를 특혜분양받았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김 전 차장이 이런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측근 정성홍 전 과장에게 지시, 정 전 과장이 컴퓨터 전문가를 동원해 파크뷰 아파트 시행사인 에이치원개발 컴퓨터를 해킹했기 때문이었다고 전했다. 이들은 “그때만 해도 컴퓨터 해킹을 처벌하는 법률이 제정되기 전이어서 불법은 아니었다”고 해명했었다.

    정형근 의원에 따르면 국정원은 대한생명 처리를 위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 청와대비서관 전화통화, 2400만 달러 대북 지원 관련 박지원 실장과 요시다의 전화통화, 이근영 금감위원장과 이귀남 대검범죄정보기획관의 전화통화, 모 정치부 기자와 모 정치인의 전화통화 등 4건을 도청했으며, 국정원 관계자가 이들 도청 내용을 정의원에게 보내와 공개했다는 것이다. 김회장과 청와대 비서관은 전화통화 사실 여부를 확인해 주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3건의 당사자 6명은 전화통화 사실을 인정했다. 정치부 기자는 대화 내용까지 정확히 일치한다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민주당 한 의원은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전화통화 사실을 제3자가 한번쯤은 우연히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우연이 계속 반복된다면 이는 다른 설명이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도청 의혹의 근거로 제시된 사례들이 반복되어 사실로 증명되면 의혹 자체가 사실일 개연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추론인 것이다.

    국가정보원은 도청 사실을 강력 부인하고 있지만, 여전히 의혹은 가시지 않고 있다. 국정원은 “도청장비를 구입하지 않았으며 도청도 안 했다”는 선을 넘어, “도청장비 제조업체 미국 CCS사의 CDMA 휴대폰 장비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보안업체 관계자들의 얘기는 다르다. 한국통신보안 안교승 사장은 “세계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GSM방식 휴대폰의 경우 도청장치가 상용화되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며, 한국이 채택하고 있는 CDMA 휴대폰 도청기도 미국 CCS사에서 2000년 이미 제품이 출시돼 가격 논의 등 나와 국내 시판 협상을 벌인 바 있다”고 주장했다. 안사장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사기꾼이 아니라면 작동하지도 않는 제품을 사라고 협상하는 회사는 이 세상에 없다”고 말했다(26쪽 기사 참조).

    정형근 의원 폭로 이후 정치권, 관가, 재계에서 감지되는 도청에 대한 불안감은 상상 이상이다. 유선전화-유선전화나 유선전화-휴대폰 간 통화는 도청 가능성이 100%라고 검찰과 국정원 관계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또 “복잡하지만 내선전화도 도청된다”고 밝히고 있다. 실내에 도청장치 설치시 대화 내용도 도청된다고 믿고 있다.

    ‘사생활 침해의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는 국가’

    도청방지업체 A사가 도청 방지 의뢰를 받고 있는 국내 기업은 500여개에 이른다. 대기업 회장실, 임원실, 연구실, 회의실의 대화 도청 방지, 유선전화 도청 방지 등이 주목적이다. 도청 방지 장비 1개를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150만원 정도. 수십대를 설치해놓은 기업도 있고, 도청신호를 감지하는 관제시스템까지 자체 구축한 기업도 있다. 장관급 고위 관료, 국회의원 고객도 상당수라는 게 이 업체의 주장이다. B사의 20만원대 보급형 도청탐지기인 퍼펙트1000이라는 제품은 일주일 만에 매상이 200% 늘었다고 한다.

    도청방지기가 달린 휴대폰을 사용하거나(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휴대폰을 여러 대 들고 다니는 일은 정치권에서 일상화된 일이다.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은 “대선자금을 총괄 관리하는 직책이어서 보안에 유념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저녁 약속은 가급적 잡지 않는다고 한다.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은 “휴대폰 대화는 가급적 짧게 한다”고 말했다.

    “통화내용 다 들킬까 겁나”

    국정원의 주요 정보 수집 대상에는 국회, 청와대, 검찰뿐 아니라 대기업도 포함된다.

    민주당 함승희 의원은 도청을 당해본 경험이 있어 이 문제에 특히 민감하다. 함의원은 “변호사 시절 내 사무실을 도청방지 장비로 검색했는데 누군가 사무실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탐지됐다”고 말했다. 검사 시절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 전화를 감청을 해본 경험이 있었는데 막상 본인이 도청을 당해보니 황당하더라는 것. 그는 “요즘엔 ‘도청해봤자 별 도움이 안 되는 얘기’만 전화로 한다”고 했다.

    수사기관은 수사상 필요에 의해 감청을 광범위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나 개인에 의한 무차별적 도청 의혹까지 나오고 있는 이상 일반인들도 도·감청 공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국가기관의 ‘훔쳐보기’ 실력은 전세계적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사생활 침해의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는 국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미국의 감청시스템 에셜론은 전 세계 유-무선 전화, 팩스, e-메일 중 70%에서 대화 내용을 빼낼 수 있는 빅브라더다. 미국은 이 장비를 활용, 알 카에다 잔당의 교신 내용도 수집하지만 때로는 미국과 경쟁하는 외국 기업 경영진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의혹도 받았다.

    기술적으로 국가가 개인의 모든 부분을 낱낱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는 가운데, 국가정보원이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지금은 프라이버시의 최대 위기 상황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