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7

2002.10.31

CEO들 ‘조찬회’에 다 모이네

새로운 지식·정보 습득 아침시간 적극 활용… ‘공부하는 문화’ 지방으로 확산

  • 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2-10-24 12: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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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들 ‘조찬회’에 다 모이네

    10월17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을 가득 메운 인간개발연구원 조찬회 회원들.

    10월10일 오전 6시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6층 벨뷰룸,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이지만 준비된 상당수의 테이블이 머리가 희끗한 경영자들로 채워졌다. 한국GE 강석진 회장, 코리아나화장품 유상옥 회장, 정림건축 김정철 회장 등 100여명의 경영자들이 참석한 이 모임은 인간 중심의 기업과 지역사회 문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인간개발연구원(회장 장만기)에서 매주 목요일 마련하는 조찬회. 오전 7~9시까지 진행된 이날 모임에서는 시중에 채식열풍을 몰고 왔던 SBS 다큐멘터리 ‘잘 먹고 잘사는 법’을 연출한 박정훈 PD의 강의가 있었다. 박PD는 이른 아침부터 경영자들이 모여 자신의 강의를 경청하는 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급변하는 기업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다양한 정보를 얻기 위해 아침 시간을 활용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한국능률협회 인간개발연구원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에서 주최하는 조찬회가 활성화되면서 경영자들의 ‘아침문화’가 바뀌고 있는 것. 요즘 대부분의 CEO의 아침은 조찬회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K 손길승 회장, 신라호텔 허태학 사장, 우리금융지주회사 윤병철 회장,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 등 내로라하는 기업의 CEO들은 대부분 한 개 이상의 조찬회에 회원으로 등록하고, 공부로 하루를 시작한다.

    “기업경영 충분한 기폭제 제공”

    조찬회에 참석하는 경영자들은 하나같이 “최근 기업환경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정보와 다른 기업의 사례를 지속적으로 접하며 시대 흐름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찬회를 활용한다”고 입을 모은다. 삼익LMS 심갑보 부회장은 “짧은 강의를 통해 기업경영의 정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기업에 응용할 만한 힌트를 얻어 컨설팅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는 등 충분한 기폭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심 부회장은 조찬회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심 부회장은 일주일에 세 번은 각종 조찬회에 참석하고, 강의를 캠코더로 직접 녹화해 임원교육에 활용하기까지 한다. 심 부회장은 “우리 같은 중소기업에서 고급 강의를 임원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귀중한 기회”라고 말한다. 각 단체의 조찬회 담당자들에 따르면 조찬회에 법인으로 가입해 임원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경영자들도 많고 지방에 지사를 둔 기업체의 경우 조찬회를 마치고 임원회의를 갖기도 한다고 한다.



    조찬회를 통해 다른 기업의 사례를 접함으로써 기업의 여건을 개선할 방법을 찾고, 자사 직원들에게는 경영자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안팎으로 기업에 힘을 실어주게 되는 것.

    CEO들 ‘조찬회’에 다 모이네

    지난달 한국능률협회 월례조찬회에서 강의한 이어령 전 장관(왼쪽)과 능률협회 송인상 회장.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영자들의 모임은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커뮤니티 형성으로 이어진다. 조찬회에서 강의를 듣는 동안 친교를 나누기는 쉽지 않지만 대개의 경우 이런 모임은 하계 세미나나 서로 다른 분야 기업들끼리의 모임 등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얻는 계기가 되곤 한다.

    이런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나누는 과정에서 아예 새로운 기업을 탄생시킨 경우도 있다. 유상옥 회장과 웅진닷컴 윤석금 회장이 함께 창업한 코리아나화장품이 그러한 경우. 라미화장품에서 월급쟁이 사장으로 재직하던 유상옥 회장이 인간개발연구원의 이종(異種)기업 동호회에서 윤석금 회장을 만난 것이 코리아나화장품 출범의 계기가 됐다. 윤회장이 자본금을 대고 유회장이 경영을 맡기로 하고 창업을 서두른 것.

    그 후 코리아나화장품은 성공적 경영을 통해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윤회장은 코리아나화장품 주식을 매각해 IMF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유회장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다 보니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여갔고, 그 인연으로 함께 창업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각종 조찬회는 소중한 홍보의 장이 되기도 한다.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회사를 알리고 제품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공부하며 회사도 알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는 셈이다.

    그러나 귀중한 아침 시간을 내 모인 기업 대표들 앞에서 강의를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때문에 각 단체의 실무자들은 강사를 섭외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각 단체별로 강사를 고르는 데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경영인을 위한 대표적인 조찬모임으로 자리매김한 능률협회 월례조찬회는 지난 30년 동안 한 번 조찬회를 열 때마다 강사를 두 명씩 초빙했다. 정부 정책 입안과 관련된 장관급 인사와 대기업 최고경영자나 관련 학계 및 연구단체 인사를 함께 초청해 50분씩 강의하도록 하는 것. 기업 경영자에게는 정부정책 방향을 인지하게 하는 한편,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경영자들의 생각을 전하자는 게 정부 인사를 초청하는 이유. 이 때문에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노동부 환경부 과학기술부 장관과 금융감독위원장 한국은행 총재 등은 1년에 두 차례 이상은 능률협회 조찬회에 초빙된다. 해당 분야의 최고 정책 결정권자를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보니 능률협회 조찬회에는 매번 300명 안팎의 인원이 참석한다. 규모 면에서는 최대이다.

    CEO들 ‘조찬회’에 다 모이네

    조찬회로 아침을 시작하는 최고경영자들.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김태인 삼부해운 회장, 심갑보 삼익LMS 부회장, 김명규 한국가스공사 사장, 김영철 퍼시스 명예회장(왼쪽부터).

    공부하며 회사홍보 ‘일석이조’

    10월로 180회를 맞은 전경련 월례조찬회는 철저한 사례 중심의 강의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경련 국제경영원 이용환 부원장은 “강사를 섭외할 때 정치인과 관료는 되도록 배제하고, 실제 경영일선에서 활약중인 경영인을 초청한다”며 “경험과 사례 중심의 강의를 통해 기업 경영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지난달 전경련 최고경영자 월례조찬회에서 강의한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은 경영자들에게 ‘환경보호는 기업의 사명’이라는 메시지를 심어줬다는 호평을 받았다. 문사장은 “각 기업의 최고봉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생각보다는 내 경험을 고백하고 같이 토론한다는 생각으로 강의에 나섰다”고 말했다.

    1975년부터 무려 27년 동안 매주 거르지 않고 진행돼 1270회를 넘어선 인간개발연구원의 조찬회는 다방면의 주제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엔 가수 윤형주씨를 강사로 초청해 콘서트를 겸한 이색 강의를 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 밖에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바른경제동인회 등도 매달 정기적으로 조찬모임을 마련하고 있다.

    최고경영자 조찬회는 이제 지방으로까지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능률협회가 올해 하반기부터 부산 대구 대전에서 조찬회를 열었다. 현재 분기별로 1회 예정인 횟수도 점차 늘려 나갈 계획이다. 능률협회 송옥현 이사는 “지방기업들의 경우 서울에 비해 각종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지방 조찬회를 활성화하여 전국적인 경영자 네트워크를 형성하도록 돕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참여가 보다 확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경영인들이 아침 시간을 이용한 모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조찬모임이 ‘과잉생산’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강사로 초빙할 수 있는 인력풀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조찬회가 지나치게 많아지는 것은 강의의 질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적잖은 비용을 낭비하게 한다는 지적이다. 여러 조찬회의 강의 주제와 강사가 겹치거나 일부 회원들이 이름만 올려놓은 채 얼굴을 비치지 않는 일도 적지 않다는 사실은 이런 지적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찬회가 늘어난다는 것을 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게 전체적인 분위기다. 그만큼 새로운 지식과 정보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찬회 활성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경영자들에게 ‘사교’보다는 ‘공부하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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