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6

2002.10.24

그들끼리 결혼 카르텔… 재벌은 ‘빅 패밀리’

정·관계 통혼 사라지고 대부분 재벌 3세간 결혼…배타적 사고 영향, 연애 통해 혼맥 새로 만들어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2-10-18 1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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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끼리 결혼 카르텔…  재벌은 ‘빅 패밀리’
    국내 굴지의 모 재벌그룹 회장의 장남 A씨는 외환위기 이후 아버지 회사가 어려움을 겪던 시절 규모가 더 큰 재벌 집안 딸과 결혼했다. A씨는 결혼을 약속한 B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만류로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재벌그룹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B씨는 A씨 집안의 대소사에 참여할 정도로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특히 A씨 아버지는 장차 며느리가 될 B씨를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A씨와의 결혼을 굳게 믿어왔던 B씨가 받은 충격은 컸다. 결국 B씨는 구설수를 두려워한 A씨 집안의 뜻에 따라 도망치듯 외국 유학을 떠났고, B씨가 유학을 떠난 사이 A씨 집안은 재벌가 며느리를 맞아들였다. B씨의 집안도 만만치 않은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가세가 기운다는 게 파혼 사유였다고 한다. 주변에선 “서로 격이 맞지 않은 탓도 있지만, 경영난을 겪던 이 재벌 기업이 정략적으로 다른 재벌가의 며느리를 맞아들인 것”이라는 소리가 당연히 나왔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사돈

    재벌가의 결혼관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재벌가는 신라시대 귀족인 성골 진골이 혼맥을 통해 그들만의 ‘계급사회’를 만든 것처럼, 그동안 같은 규모의 권세가나 재벌가와 통혼하는 것을 불문율로 삼아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모두 재벌가와 사돈을 맺은 바 있고, 박정희 정권시절 실세였던 이후락씨의 며느리들도 모두 재벌가 출신이다(호남정유 한국화약 SK 출신). 재벌과 권력이 ‘통혼’함으로써 끊임없이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 온 셈이다.

    그런데 재벌 3세들이 결혼 연령에 접어들면서 재벌가의 혼맥이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재벌 3세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과정에 중요한 특징 하나가 발견된다. 아버지 세대와 달리 정계나 관계와 혼사를 맺는 일이 거의 없고, 대부분 ‘끼리끼리’ 결혼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또 ‘평범한 사람’들과 혼인하는 예도 과거에 비해 매우 드물다. ‘평범한 사람’과의 결혼으로는 1999년 이건희 회장의 맏딸 부진씨가 단국대 전산학과를 졸업한 삼성 계열사 직원 임우재씨와 결혼한 것을 꼽을 수 있을 정도.



    이처럼 각각의 기업들이 이미 구축한 정관계 혼맥에 최근 재벌 3세들의 재벌간 ‘신혼맥’이 가미됨에 따라 재계와 정관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신판 혼맥도가 완성됐다. 1957년 당시 재계의 쌍두마차였던 삼성과 LG가 사돈을 맺은 이래 40여년 동안 재벌간의 ‘동종교배’가 이어져왔고 재벌 3세들의 재벌간 혼사가 러시를 이루면서 현재는 재벌과 정관계의 혼맥이 한두 다리만 거치면 모두가 사돈간이 될 정도로 복잡하게 얽히게 됐다는 얘기다.

    그들끼리 결혼 카르텔…  재벌은 ‘빅 패밀리’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의 아들 의선씨와 정도원 강원산업 장학재단 이사장의 딸 지선씨의 결혼식.

    재벌 3세간 결혼의 신호탄은 95년 현대와 강원산업 간의 결혼이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장남 의선씨와 정도원 강원산업 장학재단 이사장의 장녀 지선씨가 결혼한 것을 기점으로 재벌 3세간 결혼이 잇따라 이뤄지기 시작한 것. 이들의 결혼은 연애결혼으로 알려졌지만 정몽구 회장과 정도원 이사장은 경복고 선후배 사이고, 의선씨는 지선씨의 큰아버지인 정문원 강원산업 복지재단 이사장의 아들 대우씨와 막역한 관계. 정도원 이사장은 박태준 전 포철회장과 사돈이기도 하다.

    이어 97년엔 현대와 LG가 사돈을 맺음으로써 당시 빅3 기업간의 통혼관계가 이뤄진다. LG건설 구자엽 대표의 장녀 은희씨와 정몽우씨(타계)의 아들 일선씨가 결혼한 것. 두 사람도 유학시절 만나 연애하다 결혼했다고 밝혔지만 사전에 양가의 주선이 있었다는 후문. 정주영, 구자경 두 명예회장이 사돈이 된 것에 대해 당시 재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결혼으로 재계 순위 1∼3위를 다투던 현대 삼성 LG는 서로 주고받는 ‘순환 혼맥’을 완성했다.

    사실 현대는 2세대까지는 재벌가와의 혼맥이 비교적 단출한 편이었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가난한 농삿꾼 집안 출신답게 “이혼만 하지 않으면 된다”며 자유결혼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정 전 명예회장의 8남1녀 중 재계 출신과 결혼한 아들은 5남 몽헌씨(현영원 전 유양해운 창업주의 사위)와 7남 몽윤씨(김진형 전 부국물산 회장의 사위)뿐이고, 이들의 결혼도 집안의 의사와는 무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는 3세대인 ‘선’자 돌림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재벌가다운’ 혼맥을 갖게 된 것이다. 의선씨와 일선씨 외에도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장남 몽필씨의 차녀 유희씨가 쌍용 김석원 회장의 장남 지용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95년 현대와 강원산업 결합 이후 잇따라

    그들끼리 결혼 카르텔…  재벌은 ‘빅 패밀리’

    삼성 이건희 회장의 딸 부진씨와 임우재씨의 결혼식.

    98년엔 삼성과 대상이 사돈을 맺는다. 이건희 회장의 아들 재용씨와 임창욱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씨의 결혼은 평소 친분관계가 있던 양가의 어머니 홍라희씨와 박현주씨의 소개로 이뤄졌다고 한다.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은 딸만 둘이다. 임 명예회장은 자신의 대상 지분 중 대부분을 두 자녀에게 상속했는데, 세령씨가 삼성의 실질적인 후계자인 재용씨와 결혼함으로써 두 부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을 상속받게 됐다.

    당시 이들의 결혼은 각각 영호남의 대표기업이며 미원-미풍 전쟁으로 유명한 삼성과 미원(대상의 전신)이 사돈이 됐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재벌가와의 혼사가 거의 없었던 삼성이 재벌가와 혼맥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내 1위의 대기업이며 최고의 정관계 혼맥을 갖고 있는 삼성이 혼인으로 맺어진 ‘재벌 카르텔’에 합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과 다른 재벌가의 혼사는 57년 이병철 회장의 차녀인 숙희씨와 LG 구인회 회장의 3남 자학씨의 결혼 외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이 밖에도 최근 이뤄진 재벌 3세들간 혼사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표적으로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김석성 전 전방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과 이희상 한국제분 회장, 박성용 금호 명예회장과 구자훈 LG화재 회장, 박정구 금호 회장과 허진규 일진 회장이 각각 사돈을 맺은 것을 들 수 있다.

    금호가 재벌 혼맥 맺기에 나선 것은 고 박인천 회장 때부터다. 박회장은 영남의 명문가를 찾아다니며 사돈 맺기를 청했다는 후문이다. 박회장의 이런 노력 때문인지 금호의 혼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박회장의 셋째딸 현주씨는 호남기업인 대상의 며느리가 돼 금호는 대상과도 혼맥을 맺고 있다. 삼성과 대상의 혼사로 현주씨가 삼성 이재용 상무보의 장모가 됨으로써 삼성과도 다리 건너 사돈이 된 셈. 금호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집안과도 직계 사돈간이다.

    그들끼리 결혼 카르텔…  재벌은 ‘빅 패밀리’

    <a href='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2002/10/18/200210180500015/image/200210180500015_8.jpg' target=new><b>☞ 그림 전체 보기</b></a>

    또한 금호는 LG와의 통혼을 통해 주요 재벌가의 상당수를 다리 건너 사돈으로 만들 수 있었다. 금호와 사돈을 맺은 LG가 ‘재계 혼맥의 핵’으로 통하기 때문이다(상자기사 참조). “LG를 거치면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가문이 모두 인척관계가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 LG 구인회 회장은 형제가 6명이고 슬하에 자녀가 6남4녀, 아들 6형제의 자녀가 20명이 넘는 대가족이다. 가족 구성원이 많다 보니 다른 기업들보다 수월하게 혼맥을 구축할 수 있었다.

    LG를 중심으로 재벌의 혼맥도를 만들면, 한국을 이끌어가는 계층이 모두 혼맥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2세들의 정관계, 재계 혼맥과 3세들의 재계 혼맥이 아우러져 내로라하는 가문들이 모두 ‘한가족’이 된 것이다. ‘재벌 혼맥도’를 따라가보자.

    LG가 삼성과 맺은 혼맥은 삼성과 사돈인 권세가들로 이어진다. 홍진기 회장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와 양택식 전 서울시장,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 직계 사돈, 박정희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복동 전 국회의원,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는 다리 건너 사돈이다. 결국 LG는 박, 노 전 대통령과도 다리 건너 사돈이 되는 셈이다. 혼맥도를 보면 LG로부터 뻗어나간 혼맥이 거의 모든 재벌가와 연결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LG와 현대가 통혼하면서 혼인관계가 없던 라이벌 기업인 삼성과 현대도 다리 건너 사돈이 됐다. 엄격히 따져보면 현대와 삼성은 전부터 다리 건너 사돈지간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장인은 홍진기 전 내무부장관이다. 홍진기 전 장관의 아들은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사돈인 노신영 전 국무총리 집안에 홍 전 장관이 딸을 시집보냈다. 따라서 삼성과 현대는 노 전 총리 집안을 매개로 다리 건너 사돈간이 된다. 정몽준 의원의 장인인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가문을 따라가면 LG 허씨 일가와 조선일보로 이어진다. 현대는 LG와 직접 통혼 이전에도 LG 허씨 일가와 가까운 관계였던 셈이다.

    같은 방법으로 혼맥도를 따라가면 삼성과 SK도 연결된다. 홍진기 전 내무부장관 가문은 김복동 전 국회의원 가문과 연결되고 이는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위인 최태원 SK 회장과도 다리 건너 사돈간이 되는 것이다. 비교적 재계와 직접적인 통혼관계가 없는 SK도 노태우 전 대통령과 사돈을 맺는 바람에 결국 거대 혼맥의 일원이 된 것이다. 롯데는 한진을 거쳐 혼맥의 본산인 LG와 연결된다. 롯데의 일본 쪽 혼맥도 대단하다. 신회장의 차남 동빈씨(롯데 부회장)는 일본의 귀족 가문인 다이세이건설의 오고 요시마사 부회장의 사위. 신 부회장의 아내는 한때 일본 황실의 며느리로까지 거론되던 인물이다. 롯데에서 갈라져 나온 농심은 동부, 태평양과 혼맥을 맺고 있고 이 혼맥은 다시 조선일보와 LG 허씨 가문, 현대로 이어진다.

    삼성에서 분리된 새한과 한솔, 신세계의 혼맥을 따지면 삼성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기업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에서 분가한 이창희씨의 새한은 동방그룹 김용대 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과 사돈을 맺고 있다. 그동안 권문세가와 거리를 유지해온 쌍용도 현대를 거쳐 LG와 연결되고 호남비료를 통해 대농 국제 경방과 연결된다. 퍼즐을 풀듯 혼맥도를 따라가다 보면 재계 혼맥이 대선후보들과도 연결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와 달리 재벌3세들이 재벌가의 배우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벌3세들간의 결혼은 역설적으로 과거처럼 이들이 기업을 하는 데 권력층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이 정략적인 결혼을 싫어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재벌가를 관통하는 ‘신혼맥’은 재벌 3세들의 이런 성향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고착화한 ‘끼리끼리 문화’의 산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재벌 3세들의 경우엔 연애결혼을 통해 혼맥을 맺는 경우가 많은데, 연애결혼이 늘고 있는 것은 ‘배타적인 사교관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만의 사교문화를 바탕으로 평범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철저히 배제하고, 비슷한 계층간 결혼을 통해 서구식 ‘귀족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계와의 혼사가 줄어든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사돈을 맺은 SK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자금 사건으로 ‘고단한 시절’을 보내는 것을 지켜보며 권력과 부침을 같이할 수 있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역대 모든 사회에서 혼인은 비슷한 집안끼리 하는 게 일반적 관습이다. 재벌들간 결혼 또한 경제활동시 혼맥을 통해 유착하지 않는다면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가족경영’의 폐해가 자주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피로 맺어진 혼맥도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근처엔 영원히 접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혼맥으로 무장한 ‘노블 클래스’는 앞으로 ‘그들만의 혼맥’을 더욱 발전시켜 나갈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0.1%의 나라’와 ‘99.9%의 나라’는 따로 존재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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