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8

2002.08.22

더위 탈출! 소설의 참맛 속으로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0-05 15:4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더위 탈출! 소설의 참맛 속으로
    ‘열정과 불안’은 조선희라는 작가의 이름에 끌려서, ‘J이야기’는 신경숙표니까,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소설 마니아인 동료의 ‘강추’에 집어들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장편소설, 단편소설, 콩트까지 골고루 진용을 갖췄다. 오랜만에 소설이다.

    2권짜리 ‘열정과 불안’은 2년 전 소설가의 자리와 ‘씨네21’ 편집장 자리를 맞바꾼 조선희씨의 첫 장편이다.

    소설은 대학시절 함께 ‘운동’을 했던 영준과 민혁이 어느 날 대학보다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벤처기업을 차려 고생 끝에 안정된 기반을 닦게 된 시점에서 출발한다. 40명 남짓한 사원들이 형이니 선배니 하면서 마치 대학서클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15년 남짓한 세월은 이들도 어쩔 수 없었다. 희끗히끗한 머리와 불룩한 배, 그들도 이제 확실한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유토피아를 포기하지 않은 영준과 누구보다 빨리 현실에 적응해 가는 민혁은 어쩌면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두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정신과 여의사이며 대학동창인 인호가 있다. 최근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이 정신과 의사다. 작가들은 정신과 의사의 눈과 입을 빌려 보다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호의 존재는 어쩐지 어색하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과 헤어졌지만 여전히 전남편을 애인처럼 만나는 그녀의 삶은 너무 ‘쿨’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소설의 첫째 권에서 영준과 민혁을 중심으로 한 남성들의 세계가 매우 구체적이고 경쾌하게 묘사된 반면, 인호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둘째 권은 산만하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게 흠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온 민혁과의 섹스도 뜬금없고 의붓아버지로부터 추행당하는 수혜의 등장, 해외에서 띄운 영준의 편지는 따로따로 노는 인상을 준다. 386으로 뭉뚱그려지는 한 세대의 궤적이 열정과 불안의 위험한 줄타기를 해왔기 때문일까. 소설의 마지막은 서둘러 끝낸 듯 그리 개운치 않다.



    다음은 신경숙의 짧은 소설 ‘J이야기’다. 이 소설집은 작가가 등단 초기부터 ‘풍금이 있던 자리’를 출간하기 전까지 각종 매체에 기고했던 짧은 글들을 엮은 것이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썼지만, J를 중심으로 엮어놓으니 이음새가 제법 단단하다. 주인공 J는 시골 어느 소읍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지금은 출판사에 다니는 여성이다. 캠퍼스 커플로 만난 남자와 8년 연애 끝에 결혼해 네 살 난 딸이 있다.

    J는 작가일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런 J가 직접 겪거나 누군가로부터 들었거나 반대로 타인으로부터 관찰당한 44편의 이야기들 또한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그러나 200자 원고지 10장도 채 안 되는 짧은 글들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네 이야기 같기도 해서일까. 신경숙씨의 소설에서 주요 장면들만 건져낸 다이제스트판 같은 소설집이다.

    문학도가 아니라면 김도연이라는 작가의 이름이나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피아졸라의 탱고 곡)라는 제목도 생경할 터다. 그러나 등단한 지 10년도 넘은 작가가 이제야 비로소 첫 소설집을 냈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10년의 내공이 어떤 작품들로 응축됐을까.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9편의 단편에서 ‘실재하되 실재하지 않는’ 현실을 그려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예를 들어 ‘검은 눈’은 폭설로 고립된 산골의 외딴집에서 홀로 가축을 돌보게 된 주인공이 꿈속에서 인간의 말을 하는 동물들과 끊임없이 싸우는 이야기다. 그러나 문득 정신을 차리니까 굶주린 개들에게 물어뜯겨 죽어 있는 나의 시체가 보인다. 꿈인가, 현실인가.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파스텔화처럼 예쁘거나 따뜻하거나 뭉클한 동화에 길들여진 요즘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소설은 아니다. 김도연의 작품들은 표지의 색깔처럼 음울하고 몽환적이고 섬뜩하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의 상상력과 패기와 내공이 빚어낸 ‘오싹함’이 즐거운 까닭은 무엇일까.

    열정과 불안/ 조선희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 각 250쪽 내외/ 각 7500원

    J이야기/ 신경숙 지음/ 마음산책 펴냄/ 272쪽/ 8500원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김도연 지음/ 문학동네 펴냄/ 296쪽/ 8500원





    화제의 책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