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8

2002.08.22

‘뮤지컬 홍수’ 거품인가 열풍인가

올 여름 서울서만 17편 ‘관객 급증’ … 국내 작품 무대시설·흥행 등 넘어야 할 과제 많아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입력2004-10-05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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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홍수’ 거품인가 열풍인가
    8월 초의 한 저녁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무더위가 채 식지 않은 거리에 세련된 차림새의 젊은이들과 30, 40대 중년 부부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중인 두 편의 뮤지컬을 보러 온 관객들이었다. 이날 대극장에서는 ‘레미제라블’이, 그리고 주차장 공간에 지어진 ‘델라 구아다홀’에서는 새로운 음악 퍼포먼스인 ‘델라 구아다’가 공연되었다. 휘황하게 불이 켜진 여름 저녁의 공연장과 활기에 찬 관객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뉴욕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를 연상시켰다.

    여름 공연장이 뮤지컬 열풍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올 여름 서울 무대에는 모두 17편의 뮤지컬이 공연되었거나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배우마다 오빠부대 몰고 다녀

    외국의 출연진과 제작진을 초청해 공연한 ‘수입 뮤지컬’인 ‘레미제라블’ ‘델라 구아다’ ‘검부츠’ 외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한여름밤의 꿈’ ‘노틀담의 꼽추’ ‘풋루스’ ‘갬블러’ ‘유린타운’ ‘칼라바 쇼’ 등 국내 제작 뮤지컬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이 밖에 연말이나 내년 초 공연을 목표로 준비중인 작품 역시 여럿이다. 바야흐로 뮤지컬 전성시대다.

    ‘뮤지컬 홍수’ 거품인가 열풍인가
    뮤지컬 공연을 찾는 관객의 숫자 역시 급격하게 늘고 있다. ‘오페라의 유령’은 관객수 24만명을 돌파했으며 ‘레미제라블’은 30회 공연에 관객수 9만7000명을 기록했다. 지난 96년에 이어 두 번째로 ‘레미제라블’을 수입한 공연기획사 CMI의 민병주 기획실장은 “96년에는 ‘브로드웨이 팀이 와서 공연한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한국은 뮤지컬 불모지였다. 그러나 올해는 별다른 홍보가 필요 없을 만큼 관객의 호응이 높았다. 96년에 처음 공연을 본 후 두 번째로 보러 온 팬들도 상당수였다”고 객석 분위기를 전했다.



    단순히 관객의 수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수준까지 성장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특징. 그전까지는 유명한 작품에 관객이 몰렸다면 이제는 배우 마니아, 작품 마니아, 극단 마니아 등으로 나누어지는 추세다. 공연이 끝나면 극단의 홈페이지에는 배우뿐만 아니라 무대장치, 조명 등에 대한 세심하고 전문적인 공연평들이 올려진다. 일부 평의 수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놀랄 정도라고.

    뮤지컬 배우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점도 뮤지컬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웬만한 배우들은 모두 팬들이 제작해 준 팬사이트와 팬클럽을 가지고 있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있는 뮤지컬 배우 남경주의 팬클럽 회원은 1700명에 달한다. 이들은 남씨의 공연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오빠부대’들이다.

    ‘뮤지컬 홍수’ 거품인가 열풍인가
    뮤지컬 관계자들은 이 같은 뮤지컬 열풍의 일등공신으로 지난 6월30일 막을 내린 ‘오페라의 유령’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7개월간 공연한 ‘오페라의 유령’은 객석 점유율 94%, 총 매출 192억원, 순수익 20억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오페라의 유령’을 필두로 ‘레미제라블’ ‘델라 구아다’ 등 외국에서 수입한 뮤지컬들은 제작비에서 웬만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압도한다. ‘오페라의 유령’ 제작비가 100억원, ‘레미제라블’이 50억원이다. 무기한 공연이 가능하도록 아예 전용극장을 지은 ‘델라 구아다’ 역시 90억원선의 제작비를 들였다. 미국 브로드웨이의 경우 신작 한 편의 평균 제작비는 770만 달러(약 84억원) 정도. 이 같은 제작비는 주로 무대장치와 의상 등 ‘볼거리’에 쏟아부어진다.

    이와 맞물려 국내에서 제작되는 뮤지컬 제작비도 상승하고 있다. 2, 3년 전만 해도 뮤지컬의 제작비는 3억~4억원선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보통 5억원에서 10억원 정도를 쓴다. ‘풋루스’는 8억5000만원, ‘유린 타운’은 5억원의 제작비용이 들었다. 지난해 연말 공연된 ‘토미’의 제작비는 9억원이었다. 뮤지컬 컴퍼니 ‘대중’의 김민선 마케팅 팀장은 “뮤지컬은 연극과 달라서 볼거리 제공이 기본이다. 관객들 역시 무대장치나 의상이 화려할수록 공연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제작비 급등 … 5억~10억 보통

    ‘뮤지컬 홍수’ 거품인가 열풍인가
    제작비의 상승은 영화에 투자해 왔던 투자사나 기업이 뮤지컬에 관심을 돌리면서 가능해졌다. 코리아 픽처스나 SJ엔터테인먼트 등의 투자사들이 현재 뮤지컬에 투자하고 있거나 투자를 검토중이다. 그러나 수입 뮤지컬의 화려하고 거대한 무대장치에 비하면 아직도 국내 뮤지컬의 무대는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일부 관객들은 ‘학예회 같다’는 혹평을 하기도 한다.

    국내의 무대 제작진들은 각종 수입 뮤지컬들이 보여주는 무대장치, 예를 들어 ‘오페라의 유령’이 보여준 천장의 샹들리에가 떨어지거나 전기 모터로 배를 움직이는 기술, 또는 ‘레미제라블’의 대형 전투신 등은 우리 제작진도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런 기술을 구현할 제작비가 부족하다는 데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처럼 무한대로 큰 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뮤지컬과 국내의 한정된 시장을 겨냥해 제작한 뮤지컬은 투자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LG아트센터 박영철 무대기술팀장은 “제작비와 디자인 능력에서 해외에서 들여온 작품과 국내 제작 작품은 큰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제작 방식은 점차 영화와 비슷해지는 추세지만 뮤지컬의 제작비 상승, 기업의 투자 등이 영화와 같은 ‘대박 행진’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뮤지컬 산업’의 본고장인 브로드웨이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브로드웨이의 뉴욕 경제 기여도는 연간 5조3000억원에 달한다. 성공한 작품이 얻는 이득도 엄청나다. 2000년에 브로드웨이에서 18년 장기공연의 막을 내린 ‘캐츠’는 3억8000만 달러(약 4500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뮤지컬 홍수’ 거품인가 열풍인가
    하지만 이 같은 대박은 국내에서는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다. 뮤지컬 관계자들은 여름 무대에 올려진 15편의 뮤지컬 중 5편은 이익을, 그리고 10편은 제작비도 못 건질 것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한다. 이익을 남기는 5편 역시 제작비의 두 배 이상 매출을 올리기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총 매출액의 6.8%를 문예진흥기금으로 내야 하고, 10%의 부가가치세, 소득세 등 각종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외국 작품의 경우는 매출액의 8~15% 사이인 로열티까지 있다. 이 같은 금액을 제하고 나면 순수익은 그만큼 줄어든다. 더구나 뮤지컬 전용극장이 없어 장기공연이 불가능한 현실도 뮤지컬이 큰 이득을 남기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때문에 뮤지컬 관계자들은 인기 있는 작품이 무기한 장기공연을 할 수 있도록 전용극장을 설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레미제라블’이나 ‘캐츠’처럼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갖춘 창작 뮤지컬을 탄생시키는 것이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이 같은 일이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차라리 현재의 뮤지컬 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외국 작품들을 계속 들여와 그들에게 제작 노하우를 배우는 것이 더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전용 공연장의 건립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투자사인 코리아 픽처스 공연예술팀 최명준 대리의 분석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연횟수 1500회, 관객 32만명을 돌파한 소극장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성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작품은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가 ‘지하철 1호선’은 독일이 아니라 ‘한국 뮤지컬’이라고 찬사를 보내며 저작권료를 면제해 줄 만큼 한국 정서에 맞게 개작되었다. 현재 ‘지하철 1호선’은 출연진을 모두 교체하고 내용을 재차 수정해 9년째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수준 높은 작품이라면 굳이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대형 뮤지컬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이 증명한 셈이다.

    이와 함께 올 여름 공연중인 몇몇 뮤지컬들은 본고장의 스태프를 초빙해 그들의 노하우를 배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한여름밤의 꿈’은 영국 연출가 패트릭 터커를, ‘풋루스’는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안무가 사라 변을 초청했다. ‘델라 구아다’ 역시 장기적으로는 모든 스태프와 배우를 한국인으로 교체할 예정이다. ‘한여름밤의 꿈’에 출연한 배우 이혜경씨는 “배우들이 모두 모여 무작정 연습을 거듭하는 한국식 뮤지컬 제작풍토에 비해 외국 스태프들이 보여준 체계적인 제작 방식과 프로의식은 꼭 배울 필요가 있다”고 소감을 말했다.

    신시뮤지컬컴퍼니의 박명성 대표는 뮤지컬 시장이 성장하려면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극단들이 공존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뮤지컬의 대형화는 어차피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소극장이나 중극장 공연, 또 창작뮤지컬 등도 충실하게 병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뮤지컬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뮤지컬을 찾는 관객층이 더 늘어날 테니까요.”

    뮤지컬을 보기 위해 브로드웨이를 찾는 관객의 수는 한 해 1200만명에 달한다. 이웃 일본의 뮤지컬 관객 수도 연간 500만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이에 비해 한 해에 최소 한 번 정도 뮤지컬을 보는 국내 관객은 30만에서 50만 사이에 불과하다. 많이 성장했다고는 해도 우리 뮤지컬 시장의 규모는 여전히 협소한 편이다.

    하지만 올 여름, 이 시장은 급격하게 불어나 꿈틀거리고 있다. 한 뮤지컬 배우는 ‘뮤지컬 열풍이 거품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거품은 절대 아니다. 올 여름은 한국 뮤지컬의 희망적인 과도기다”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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