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4

2002.07.25

“잘난 체하는 미국, 부끄러움을 알라”

유럽서도 반테러 전쟁·금융 스캔들로 이미지 추락… ‘패권주의’ 비판 反美 여론 확산 조짐

  • < 파리 = 민유기 통신원 >YKMIN@aol.com

    입력2004-10-14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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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난 체하는 미국, 부끄러움을 알라”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에서 미국의 이미지가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세계 초강대국으로 지구촌 곳곳의 분쟁과 갈등을 조절, 중재해 오던 군사 외교 강대국으로서의 이미지는 반테러 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로 이미 망가졌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엔론, 월드컴, 제록스, 메렉 등 미국 기업들의 잇따른 금융 스캔들은 미국 스스로 비판해 오던 남미나 아시아 신흥 성장국들의 부패보다 더 큰 부패의 씨앗을 미국이 품고 있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프랑스나 유럽의 반미감정은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19세기의 국제질서, 즉 유럽 열강의 세력균형을 미국이 깨뜨리면서 생겨났다. 서유럽 국가들은 전쟁에서 미국의 결정적 도움을 받았지만 미국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비웃으며 유럽의 문화적 자부심을 지키려 했고, 특히 프랑스는 미국 문화에 강한 반발 의식을 드러냈다. 하지만 미-소 거대 진영간의 냉전시기에 유럽은 어느 정도 미국의 군사적 보호막을 필요로 했고 미국의 헤게모니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 주요국 가운데 전쟁을 일으켰고 전후 미군이 주둔했던 독일은 외교, 군사력에서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영국은 미국의 모든 결정을 뒤쫓았다. 프랑스만이 국제외교 무대에서 일부 미국을 견제했을 뿐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요구하는 지식인들

    “잘난 체하는 미국, 부끄러움을 알라”
    냉전이 무너지고 독일의 경제력과 프랑스의 외교력을 축으로 유럽통합이 가시화되면서, 소련이 사라진 국제질서에서 유럽연합이 미국을 견제할 하나의 대안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아직은 영향력이 미비한 상황이다. 특히 80년대 ‘레이거노믹스’ 이래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 무장한 채 고도성장을 구가해 온 미국의 경제적 힘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유럽의 지식인들과 좌파 정치가들은 역사적 투쟁을 통한 사회적 합의의 결과인 유럽식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와 달리 신자유주의 모델이 사회 갈등을 조장하고 세계적 차원에서 환경오염과 빈부격차를 심화할 것이라고 꾸준히 비판해 왔고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나 우파 정치가들은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해 유럽이 미국과 같은 부의 획득과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지난해 가을 ‘르몽드’지에 실린 프랑스의 반미주의 관련 기사는 프랑스 국민의 10%만이 절대적 반미주의자이며 이들은 미국의 교육 의료 체계를 불평등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이 기사는 프랑스 내 반미주의자가 지식인, 언론인, 정치나 노조 지도자 등 신념에 찬 여론 주도층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는 반미감정은 일반 시민들에게도 쉽게 나타난다.

    부시가 최종 당선된 미국 대통령 선거과정의 혼란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미국 정치 시스템이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전임 클린턴 행정부가 서명한 교토 환경협약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거부, 최근 네덜란드에 설치된 국제반인륜범죄 상설재판소에 대한 미국의 불참, 뉴욕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초토화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미국이 보여준 패권주의가 프랑스 내의 전통적 반미의식에 불을 지핀 것. 뉴욕테러사건이 미국 정보당국과 군사적 패권주의자들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는 책은 올 봄 발간된 이래 수십만 부가 팔려나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기업 회계부정으로 인한 금융스캔들이 공개되면서 과도한 세금과 공공지출 과다 등 유럽식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의 비효율성을 비판하며 미국식 능동성과 효율성을 부러워하던 프랑스의 우파 지지자들 생각도 서서히 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경제적 부가 자본주의 합리성이나 투명성이 아닌 부정과 비리의 산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도 당선 이전 이들 기업들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식 정경유착의 검은 모습이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기업활동이나 자본주의 시스템도 완전히 투명한 것만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 기업으로 ‘에이오엘 워너 타임’에 이어 세계 두 번째 미디어 관련 그룹인 ‘비방디 유니버설’도 회계부정을 의심받고 있다. 비방디측은 부인하고 있지만 몇몇 위성방송사를 인수합병하면서 부당한 회계처리로 15억 유로의 이익을 챙기려 했다. 이 시도는 프랑스 주식감독위원회(COB)의 사전 적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주식감독위원회의 기업 회계방식 변경 권고 이후 재작성된 2001년 회계보고서가 애초의 것과 큰 차이를 나타내 그동안 회계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미국은 계속해서 영국 법률을 배워야 한다”

    또한 최고경영자 장 마리 메시에가 주가폭락으로 인한 개인 손실을 기업 경비로 막으려 했다는 의혹을 샀고, 결국 그는 7월초 재정난에 대한 이사회와 주주들의 사임 요구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메시에와 비방디 그룹이 다른 프랑스 기업들과 달리 적극적 인수합병, 주가조작 의혹, 불투명한 회계처리 등 미국식 기업활동을 모방했다는 데 있다. 메시에는 올 초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프랑스의 문화적 예외는 죽었다”고 발표하면서 비방디 그룹이 그간 해오던 프랑스 영화산업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밝혀 정치권을 비롯한 프랑스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미국식 기업논리를 추구하던 그에게 문화산업에는 경제논리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프랑스의 전통적 사고방식이 비효율성이란 이름으로 매도당했던 것이다.

    ‘부정직한 기업주를 처벌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담화가 나온 뒤 미셸 프라다 프랑스 주식감독위원회 위원장은 “기업 금융통제 문제에 있어서 프랑스는 부끄러움이 없다”고 발표했고, 슈뢰더 독일 총리는 “현재 알려진 미국 기업의 스캔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이러한 문제는 미국과 유럽의 기업문화가 크게 다른 데서 생겨났다”고 언급했다. 영국 경제인총연합의 간부 로드 아르미타즈는 “미국은 계속해서 영국 법률을 배워야 한다”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미국의 회계부정 사건을 계기로 자국의 금융개혁을 더 가속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스페인 총리 마리 조세 아즈나는 “현재 스페인에서 진행중인 회계감시, 경영권 통제, 기업활동의 투명성 확보 등 각종 개혁작업의 중요성이 더 확실해졌다”고 말했고, 네덜란드 언론은 “기업 불신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탈리아의 중도좌파 정당들은 보수우파인 베를루스코니 총리에게 정부 차원의 금융개혁을 요구했다.

    미국 기업들의 연이은 스캔들은 앞으로도 프랑스와 유럽 내 반미여론을 확산시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반인들의 반미 정서는 세계화 반대론자들이나 좌파 정치가와 지식인들의 영향으로 보다 체계적인 반미 논리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아직 기업활동의 투명성을 제대로 확보해 줄 제도적 장치가 부족한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미국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개혁작업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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