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4

2002.07.25

독수리, 땅으로 추락하나

미국 지식인들 ‘대외정책’ 신랄한 비판… “슈퍼파워 군사력 과시 쇠퇴의 길 재촉”

  • < 워싱턴=이흥환/ 미 KISON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4-10-14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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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수리, 땅으로 추락하나
    ”팍스 아메리카나는 끝났다. 베트남전과 발칸 반도에서의 전쟁, 중동사태와 9·11 테러는 미국이 가진 패권의 한계를 드러냈다.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배울 것인가, 아니면 점진적 쇠퇴의 길을 걷는 대신 미 보수파의 저항으로 급전직하의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펴내는 격월간 정책 토론지 ‘대외정책’(Foreign Policy) 최근호(7, 8월호)에 실린 ‘독수리, 땅으로 추락하다’는 글의 발문으로, 작성자는 예일대 선임연구원 임마누엘 월러스타인이다.

    월러스타인은 이 글에서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과 베트남전 등 지역분쟁을 겪으면서 ‘힘없는 슈퍼파워’가 된 과정, 고삐 풀린 미 매파의 거듭되는 실책 등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미국은 앞으로 10년 동안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결과가 불 보듯 뻔한 매파의 길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난다고 깨달을 것이냐.”

    독수리, 땅으로 추락하나
    미국은 실제 1970년대 이후 쇠퇴의 길을 걸어오고 있으며, 9·11 테러에 잘못 대처하면서 내리막길에 가속도가 붙었다는 것이 필자가 진단하는 일방주의 세계 패권국 미국의 현주소다. 그러나 이 정도면 점잖은 비판에 속한다. 경고치고는 오히려 싱거울 정도다. ‘대외정책’에 실리는 미 지식층의 글은 진보적인 색채는 강하지만, 좌파 지식인들의 매서운 필봉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들은 부시 행정부의 중동사태 해결법이나 부시 대통령의 선제공격 가능성 발언 등이 비판의 도마에 오를 때마다 이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지난 6월24일 부시 대통령이 중동사태 해결 방안이라고 벼르고 별러 내놓은 연설문의 제목은 ‘부시 대통령, 팔레스타인의 새 지도자 요청’이었다. 이 연설에서 부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근본적인 문제가 팔레스타인 당국 때문이라고 못박아버렸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거침없이 비판해 온 논객 데이빗 콘은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주간 간행물 ‘네이션’(The Nation)지에 기고한 글에서 부시의 이 연설을 “이것은 평화안이 아니라, 희망 목록에 가깝다”며 평화안의 허구성을 낱낱이 지적했다. ‘부시의 교활한 중동 평화안’이 이 글의 제목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밝힌 선제공격 계획도 거센 비판에 부닥쳤다. 부시의 말은 적대국으로 간주되거나 대량살상무기를 소지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어디가 되었든 미국이 먼저 군사 공격을 가하겠다는 것이었다. 테러전이라는 이름 아래 전 세계적으로 군사를 동원하겠다는 부시의 새로운 독트린이 탄생한 것이다. 9·11 테러가 불을 붙인 미 애국주의도 이러한 새 독트린 탄생의 한 배경임은 물론이다.

    독수리, 땅으로 추락하나
    이 선제공격 계획은 자국 영토 방어를 위한 경우 이외에는 국제군(international force) 사용을 금지한 유엔헌장의 핵심적인 정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불량국들을 상대로 핵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펜타곤의 ‘핵 준비 태세’ 문건이 지난해 12월에 공개되고, 러시아와 체결했던 반요격미사일 조약에서 탈퇴함으로써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정책이 거센 비판을 받고 있던 마당에 나온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냉전 이후 미국은 국제 정치에서 그 어느 세력이나 나라로부터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미국의 외교정책이 일방주의로 가는 길은 탄탄대로였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복음주의의 도덕관이 워싱턴을 뒤덮었다. 부시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선과 악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비외교적이고 무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덕적 진실은 어느 문화에서든 언제 어느 곳에서든 똑같은 것이다.” 도덕 절대주의다. 게다가 부시의 발언 곳곳에서는 ‘종교적 신념’이 묻어나온다.

    “우리는 지금 선과 악의 싸움을 치르고 있다. 미국은 악을 악이라고 부를 것이고, 그 악과 싸울 것이다. 우리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깥에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은 이제 어느 사이엔가 부시의 등록상표 같은 발언이 돼버렸다.

    독수리, 땅으로 추락하나
    9·11 이후 대(對) 테러전을 치르면서 미국은 ‘국경 없는 세계제국’의 밑그림을 그려놓고 세계의 국제질서를 재편성해 가고 있다. 폴 월포위츠 국방 차관 등 행정부 고위 관리들은 표현만 달리할 뿐 군사력을 앞세운 미 패권주의의 정당성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강조한다. 부시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은 미국이 도모하는 이 새로운 패권의 밑그림을 보여주었다. 영토에 기반을 두고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토 없는(non-territorial)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리처드 폴크는 ‘네이션’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 영토 없는 세계제국을 ‘포스트모던의 지정학’이라고 표현했다. 부시는 이 연설에서 “미국은 제국을 확장하려는 것도,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것도 아니다”면서 “과거에는 경쟁 상대가 있었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군사력이 우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수리, 땅으로 추락하다’에서 월러스타인은 미국의 이런 군사력이 오히려 미국을 쇠퇴의 길로 몰아간다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미국이 제국처럼 행동해야 하는 까닭으로 매파는 두 가지를 내세운다. 첫째는 미국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만약 워싱턴이 그 힘을 발휘하지 않을 경우 미국은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런 매파의 시각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공격, 팔레스타인 당국을 일소해 버리려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실상의 지지, 이라크 침공 등 세 가지로 표출되고 있다.”

    매파는 다른 나라들이 아무리 미국을 비판해도 말뿐이라고 본다. 유럽도 러시아도 중국도 미국을 비난하고 있긴 하지만 유대관계까지 끊으려 드는 나라는 아직 없으며, 워싱턴은 아무런 저항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해왔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른 나라들의 비난이 쏟아지긴 하겠지만, 결국 워싱턴은 또 한 번 얻고 싶은 것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 매파의 시각이다. 이라크는 단지 다음 목표일 뿐 최종 목표가 아니다. 이란 북한 등 ‘악의 축’으로 거명된 나라들이 줄을 서 있고, 콜롬비아 인도네시아 등 세계 어느 나라에든 미국은 힘을 쓸 수 있다.

    명분은 강력하다. 부시 대통령은 이미 전 세계 60여개국에 퍼져 있는 테러 네트워크에 대한 보복 전쟁을 선언했다. 전 세계가 전쟁터다. 중간선거를 4개월 앞두고 기업 회계부정 스캔들로 궁지에 몰려 있긴 하지만, 공화당 정권은 대(對) 테러전이라는 전천후 방패막이를 가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하켄 에너지 주식 매입으로 이득을 취했다는 사실도 새로울 게 없다. 이미 대선후보 때부터 문제가 됐던 것이고 워싱턴 정치판의 정쟁거리일 뿐이다. 어차피 대(對) 테러전이라는 방패를 뚫을 만한 위력도 없다.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 준비라는 뉴스에 기업 스캔들의 충격파는 이미 기세가 한풀 꺾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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