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4

2002.03.07

소비자 금융과 빚의 노예

  • < 공병호 / 공병호 경영연구소 소장 >

    입력2004-10-19 14: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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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자 금융과 빚의 노예
    돈 문제는 영원한 숙제다. 경제적 어려움은 인생의 다른 모든 영역을 그늘지게 하는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돈 문제로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들의 모습은 이미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책에도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깊다.

    고대에 영화를 누린 도시 바빌로니아를 둘러싼 거대한 성벽은 높이가 50m, 길이가 18km나 되었다고 한다. 그 넓이는 말 여섯 마리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큰 규모였다.

    누가 이런 성벽을 건설하였는가? 물론 노예들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벽돌을 나르던 노예들의 평균 생존기간은 3년도 채 안 되었다. 일단 노예가 되면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길바닥에서 최후를 마쳤다. 노예들이 지쳐 쓰러지면 감독관은 채찍을 휘둘렀고, 그래도 일어나지 않으면 작업장에서 밀쳐 버려지기 일쑤였다. 고대 성벽 건설 장면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된다.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여겨지는 바빌로니아 성벽 축조에도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흥미로운 점은 성벽에서 일한 노예가 전쟁 노예가 아니라 무려 3분의 2가 빚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린 바빌로니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돈 관리에 실패하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예상치 못한 불행으로 경제적인 곤궁에 빠지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눈앞의 기쁨을 위해 생각 없이 과도한 빚을 지는 경우다.



    대다수 금융기관들이 앞다투어 가계대출을 늘리고 있다. 우선 돈이 남기 때문이다. 사익을 추구하는 사기업들은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겐 오로지 이익만 있을 뿐이다. 돈은 본래 이익이 남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아무리 관계 당국이 나서 건실한 기업에 대출을 늘리라고 이야기해 봐야 공염불에 불과하다. 사익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체에 사익 추구를 유보하라는 이야기는 그다지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

    그런데 가계대출의 증가세가 예사롭지 않다. 얼마 전 한국금융연구원에서 나온 자료는 가계금융 부채의 잔액이 97년 211조2천억원에서 지난해 9월에는 무려 105조원이 늘어나 316조3천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신용카드 이용의 급격한 증대다.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등은 금융부실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경제의 글로벌화는 든든한 안전판이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예기치 않은 실업이나 파산 때문에 개인이 빚에 몰리는 경우가 과거보다 휠씬 늘어날 것이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회 구성원들이 큰 위험에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로 빚에 말려드는 경우는 어찌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런데 충분히 돈 관리가 가능한데도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충동적인 소비나 카드를 이용한 이상한 사업에 말려들어 빚더미에 앉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돈을 너무 쉽게 빌릴 수 있어 돈을 쓰도록 유혹하는 수많은 트랩 속을 걸어가야 한다.

    그나마 나이가 든 세대는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조금은 나은 편이다. 그러나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카드론에 쉽게 의존한다. 무엇보다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함을 당장 만끽할 수 있지만 이것이 주는 위험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도 90년대에 사금융이 급속히 성장했다. 기업에 대한 이자율이 워낙 낮다 보니 일명 사라킨(샐러리맨 금융의 약자)이라 하는 소비자금융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동안 돈을 빌린 사람들 가운데 심각한 채무자가 1200만명, 이중 도저히 부채를 갚을 수 없는 중증 채무자가 150만~200만명이나 된다. 야반도주, 폭력배 동원, 개인 파산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되었다.

    사기업의 사익 추구와 개인의 자기 책임이 어우러지는 것이 시장이다. 그런데도 개인 스스로 자율규제가 가능하도록 돕는 방법은 없을까. 그다지 강건하지 못한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지금은 소비자금융 부분에 대한 섬세한 규율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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