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9

2002.01.24

사계절 버무린 소리의 맛

  • <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 authodox@orgio.net

    입력2004-11-09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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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절 버무린 소리의 맛
    시대의 거친 파고를 거듭 넘을 때 예술가의 진정한 가치는 그을은 은접시처럼 형형한 빛을 뿜어낸다. 어떤 시대든 시간이 예술가의 적이 된 적은 없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알량한 이익에 눈먼 장사치들뿐이다.

    무려 5년간의 공백을 깨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일곱 번째 앨범을 안고 돌아왔다. 김종진과 전태관, 올해로 꼭 마흔인 이 동갑내기들은 소박하지만 풍성하게, 그리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파티를 열었다.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영웅 고(故) 김현식의 백밴드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1988년의 충격적인 데뷔 앨범과 두 번째 앨범의 스매시 히트로 일약 뉴웨이브의 주역으로 부상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제시한 것은 도회풍의 깔끔한 재즈 감각을 탑재한 록. 한국 대중음악의 수용자들은 열광적인 지지를 표했고 그것은 그대로 시장의 성공으로 이어졌으며 그 흡인력은 90년대 초반 3, 4집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발휘되었다. 이들이 시장의 시련에 봉착한 것은 댄스뮤직 트렌드가 승자 독식의 정글의 법칙을 급조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이었다. 표변한 시장은 순식간에 이들을 주변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적 중심이 이와 같은 무심한 세태의 위협 앞에 결코 부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컴백 앨범이 고요하게 주장한다. 이 앨범은 70년대 이장희의 낭만주의를 맵시 있게 호명하며 목청을 고른 뒤(‘한잔의 추억’), 일상의 성숙한 통찰력이 빛나는 미드템포의 어른스러운 록 ‘흔들리지 않을 거야’로 참았던 욕망을 본격적으로 서술해 나간다.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다섯 번째 트랙 ‘Bravo, My life!’와 이어지는 ‘화해연가’(和解戀歌)일 것이다. 김종진식 삶의 찬가는 장식이나 기교의 과잉을 제거함으로써 ‘단순한 것이 최고다’(Simple is best)는 음악 어법을 최대한 발효시킨 트랙이다. 치기와 엽기만이 횡행하는 작금의 풍토에서 피어난 들국화 같은 이 노래는 단연 브라보 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흥겨움을 바탕에 깐 사랑 노래 ‘화해연가’는 스윙의 건들거리는 그루브를 밑그림으로 짠 로커빌리 스타일의 로큰롤인데 이 또한 이들만이 분만할 수 있는 멋진 설계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이 신작은 다양성과 진정성이 무장해제된 살얼음판과 같은 현재 한국 대중음악의 상황에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고심 어린 무언의 질문이다. 이들은 이미 90년대 중반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을 리메이크하면서 과거의 유산 속에서 미래를 설계하려 했지만, 그 시도는 결과적으로 이들을 심리적 벼랑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이들의 확신은 정당한 것이며 또한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 따라서 30대들, 그리고 자신의 세대 문화에 질식당한 20대들은 이 앨범을 통해 기분 좋은 자성의 시간을 가질 충분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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