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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나를 조사해? 대선자금 확 분다”

재벌 정치자금에 여야 모두 발목 잡혀 … 고비용 정치구조 변화 없는 한 해결 어려워

  •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감히 나를 조사해? 대선자금 확 분다”



1997년 대선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자로 결정되고 난 지 얼마쯤 지나서의 일이다. 김대중 당선자의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는 C의원은 국회 의원회관으로 예고 없이 찾아온 재벌그룹 총수 P회장을 만났다. 그러나 C의원은 P회장을 보자마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을 나가버려 P회장을 난감하게 했다. 도대체 C의원이 P회장을 보는 것조차 싫어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얘기는 92년 대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C의원은 P회장과 나름대로 인연이 있다고 판단, P회장을 찾았으나 문전박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회장님이 안 계신다”는 P회장 비서진의 제지를 받고 P회장을 만나지도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 P회장은, 이 일 때문에 기분이 상한 C의원이 ‘손볼 사람’ 리스트에 자신을 올려놓았다고 말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나중에 전해들었다.

‘권력 있는 곳에 돈이 따른다’

P회장은 97년 대선이 끝난 후 가장 먼저 C의원이 떠올랐다고 한다. 김대중 당선자의 신임을 받고 있어 앞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게 뻔한 C의원에게 단단히 밉보였다고 판단했기 때문. P회장이 그날 C의원을 약속도 없이 찾은 것은 C의원의 ‘오해’를 풀고 싶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나마도 뜻을 이루지 못한 셈이다. P회장이 한 사석에서 털어놓은 얘기다.



“당시 야당 쪽에 아는 인사들이 많다는 이유로 관계당국이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 야당 의원이 비서실까지 찾아왔으니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는가. 중간에 사람을 넣든지 해 은밀히 접촉했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P회장은 97년 대선 이후 민주당 관계자들을 만나 92년 대선 당시 일을 적극 해명하면서 “92년 대선 때 나는 여야 어느 쪽에도 대선자금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민주당 관계자들은 P회장의 말을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권력 있는 곳에 돈이 따른다’는 한국적 정치자금 수수 관행상 당연히 당시 여당 후보에게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한국적’ 정치자금 수수 관행은 국민회의가 집권한 이후에도 여전했다. 97년 대선 당시 국민회의 중앙당 후원회장이던 김봉호 전 국회부의장의 한 측근은 “대선 당시 여론조사 등을 통해 어느 때보다 국민회의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도 기업들은 ‘합법적인’ 후원금을 내는 일조차 매우 부담스러워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주택가 골목 등에서 은밀히 만나 ‘007 작전’을 전개하듯 후원금을 전달받았다는 것.

그러나 집권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98년 이후 민주당의 중앙당 후원금은 98년 292억원, 99년 300억원, 2000년 502억원, 올 3·4분기까지 238억원 등 ‘여당 프리미엄’을 한껏 누렸다. 이에 반해 한나라당은 같은 기간 각각 6억6000만원, 31억원, 67억원, 58억원 등을 거둬 전형적인 ‘여부야빈’(與富野貧) 현상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지난 88년 김우중 회장이 “어마어마한 돈을 김홍일씨에게 전달했다”는 박정훈 전 의원 부인 김재옥씨의 폭로 이후 여론의 따가운 시선은 여권을 향하고 있어 민주당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한국적 정치자금 수수 관행상 당시 김우중 회장에게 받은 돈이 구여권에 비해 10분의 1 수준일 것”이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비난이 김홍일 의원에게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이에 대해 “정치자금에 관한 한 여든 야든 모두 ‘범법자’라는 우리 사회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오랜 정경유착 구도에서 정치자금이라는 미명하에 재벌의 ‘검은 돈’을 받아온 구여권은 말할 것도 없고, 구야권도 정치자금에 관한 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자금이 공개되기만 하면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런 점에서 정치자금을 ‘한밤중의 부부관계’에 비유했다. 누구나 그 내용이 어떨지 익히 짐작하고 있지만 비디오로 찍어 실태가 공개되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듯, 정치자금도 일단 공개되면 파장이 엄청나다는 얘기다. 더욱이 최근 들어 김홍일 의원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는 마당에 김재옥씨의 폭로가 터져나와 더욱 곤혹스럽다는 것이다.

정치자금의 이런 성격 때문에 정치자금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대선자금 문제는 87년 대통령 선거 부활 이후 계속 정치권의 ‘판도라의 상자’로 남아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기간 내내 대선자금 망령에 시달렸다. 강도 높은 정치권 개혁과 사정을 추진할 때마다 92년 대선자금이 불거지며 발목을 잡았던 것.

95년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수사 때 일이다. K그룹 L회장은 노태우씨에게 전달한 ‘뇌물’ 액수와 경위를 쓰라는 담당 검사의 요구에 엉뚱하게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준 대선자금만 자세히 썼다. A4용지 앞뒷면에 빼곡이 적은 L회장의 진술서에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20억원의 대선자금을 주게 된 경위와 액수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L회장의 이런 ‘작전’이 맞아들어갔는지 L회장은 노태우씨에게 20억원만 제공한 것으로 조서가 꾸며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보다 대선자금 시비에 덜 휘말리고 있다.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대통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97년 대선 당시 국세청과 안기부라는 막강한 권력기관을 동원해 기업으로부터 대선자금을 조달했음이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통령이 대선자금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김대통령의 97년 대선자금을 볼모로 ‘반격’을 가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2월 초 검찰에 구속된 전 국가정보원 정성홍씨는 올 3월 취임한 신건 원장이 자신을 한직으로 보내려 하자 97년 대선자금 문제를 거론하며 구명운동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신원장의 한 측근은 “정씨가 ‘97년 대선자금 모금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간접적으로 전해왔지만 그의 말이 신빙성이 없는 데다 ‘협박’으로 느껴져 신원장에게 그의 편지를 전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99년 모 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할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세금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이 그룹 총수가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이 관계자의 설명.

“그 총수는 대뜸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에게 대선자금을 전달한 사실을 은근히 거론했다. 97년 대선자금을 무기로 청와대를 ‘압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즉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하자 김대통령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면 그 사람이 97년 대선자금을 전달한 사실과 그것을 이용해 압박한다는 것을 모두 공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을 만류해 공개하지는 않았다.”

대선자금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거액의 대선자금을 베팅한 기업을 집권기간중 지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보그룹 특혜 대출 비리가 대표적인 케이스. 김대중 정부에서도 몇몇 기업인의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 야당은 비슷한 의혹을 제기했다. 올 9월 ‘이용호 게이트’ 와중에 골프 도박 혐의로 구속된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의 경우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한나라당은 당시 박회장이 전남 신안 출신임을 들어 야당 때부터 현 정권과 커넥션을 맺었던 박회장을 전격 구속한 것은 더 큰 혐의를 덮기 위한 조치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박회장은 오히려 구여권과 더 밀착돼 있음이 밝혀져 한나라당은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회장 주변의 한 인사는 “박회장은 98년 정권교체 이후 세무조사를 받을 때 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는 S의원을 통해 3억원을 제공한 반면 당시 국민회의에는 1000만원만 주었는데, 이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 ‘역차별’당하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고 전했다.

재벌그룹 관계자들은 현 정부 들어 기업들의 정치자금이 상대적으로 투명해졌다고 평가한다. 물론 정치개혁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재벌개혁에 따라 투명경영이 정착됐기 때문. S그룹 한 관계자는 “과거 기업들은 비자금을 조성해 이를 정치자금으로 제공했지만 현 정부 들어 회계투명성 감독이 강화돼 비자금 조성이 쉽지 않다”면서 그만큼 정치자금의 투명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정치자금을 둘러싼 의혹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코스닥 비리를 둘러싼 각종 게이트 때마다 여권의 정치자금 조성설이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한 재벌그룹 관계자는 “정치자금 조성설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정치권이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개혁하지 않고 돈 많이 쓰는 정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이 “과거 여권보다 재벌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덜 받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정치권의 환골탈태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 정치개혁을 통해 돈 안 쓰는 정치(선거)문화를 이룩하는 게 급선무라는 게 정치학자들의 지적이다. 현 정부 초기 박상천 전 법무부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이를 보면 현 정부의 개혁이 왜 국민의 외면을 받게 되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한보그룹 특혜 대출에서 보듯 대선 때 돈 많이 준 기업에 대해 무차별 대출을 해준 것이 금융위기로 이어졌고, 금융 부실이 바로 IMF 위기를 부른 근본 원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최대의 개혁은 돈 안 드는 선거(정치)풍토를 만드는 것이다.”





주간동아 316호 (p34~36)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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