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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지금 ‘검은 돈’ 세탁 열풍

유로화 출범 앞두고 숨겨둔 뭉칫돈 처리 두뇌 게임 … 세무당국선 자진신고 유도

  • < 최재덕/ 유럽문화정보센터 전문연구원 > sahara2@orgio.net

독일은 지금 ‘검은 돈’ 세탁 열풍

독일은 지금 ‘검은 돈’ 세탁 열풍
2002년 2월28일. 이날이 지나면 마르크화는 휴지로 변한다. 유럽연합 국가들(유로화 사용국)의 국민은 이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달력을 바라보며 고심에 휩싸여 있다. 핵심은 지금까지 세금을 피해 조심조심 숨겨두었던 지폐다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 크든 작든 ‘검은 돈’을 보유한 이들은 남은 3개월 동안 이 돈을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양지의 돈 흐름 속에 다시 끼워넣어야 한다.

독일연방은행은 지난 한 해 동안 국민들이 약 1000억 마르크(한화 약 60조원)를 가정에 비축했다고 추산한다. 그중에는 소액의 비상금도 있지만 상당부분은 중소 자영업자들이 숨겨놓은 수백만 혹은 수천만 마르크가 차지하고 있다. 제과점, 정육점, 식당 등을 하는 자영업자들은 물론 수의사, 택시기사, 건축사, 자동차 판매인, 안경사 등 대부분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세무당국의 눈을 피해 수입 일부를 현금으로 감춰두고 있었던 것. 어마어마한 규모의 ‘비자금’이 아이스박스나 책상서랍, 비밀금고 또는 침대 밑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셈이다. 뒤셀도르프시의 변호사 한스 만토이펠씨는 집 안에 1000만 마르크(약 60억원)를 갖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내년 3월1일부터 ‘휴지조각’

독일은 지금 ‘검은 돈’ 세탁 열풍
재빠른 사람들은 대부분의 자금을 해외 은행으로 옮겨둔 상태. 스위스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등은 주변국의 거센 항의에도 여전히 은행비밀법을 유지하고 있다. 돈의 출처나 계좌의 내막에 대해 철저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 정부와 세무당국은 속이 타지만 해외 계좌를 가진 사람들에게 유로화 도입은 ‘강 건너 불구경’일 따름이다. 독일 돈으로 입금시킨 그들의 자금은 2002년 1월이면 자동으로 유로화로 바뀌기 때문이다. 유럽의 범죄 조직들 역시 유로화 도입을 최적의 돈세탁 기회로 보고 있다.

검은 돈 은닉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지역은 ‘국민휴양지’로 불리는 마요르카.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도 지중해 연안의 부동산 가격이 지난 한 해 동안 급등했다. 이 지역의 공시지가가 실거래 금액보다 훨씬 낮은 까닭에 적은 세금 부담으로 현금을 처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요르카의 별장들은 거의 예외 없이 검은 돈으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거액의 돈 보따리를 들고 직접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계약서에는 “집값은 이미 해외에서 지불되었음”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검은 돈의 소유주만 바뀌는 셈이므로, 집을 판 사람은 내년 2월 말까지 현찰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부담 대신 거액의 프리미엄을 챙기는 것이다.

쌓여 있던 돈이 풀려나오면서 신바람난 것은 소비재 시장. 보석상이나 요트회사, 골동품 가게 또는 고급 자동차 판매상들이 기꺼이 ‘현찰 처리’의 부담을 맡아주겠다고 나서고 있다. 독일 주요 도시마다 대리점을 두고 있는 전자제품 유통업체 ‘사툰’(Saturn)은 신문 전면광고로 고가제품의 구매를 부추기는 등 ‘신나는 검은 돈 시즌’을 즐기고 있다. 대부분의 백화점과 가게 역시 경기침체에도 올 성탄절 특수를 잔뜩 기대하고 있으며, 돈세탁장의 대명사인 카지노도 조용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소비로 해결하기에는 여유가 부족한 소시민들은 생명보험 가입을 통해 세금추적을 피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이제 와서 뒤늦게 세금을 각오하고 국내 은행에 현찰을 집어넣는 이들은 주도면밀한 탈세계획을 실행할 능력이나 배짱이 부족한 노인들뿐이다.

독일 정부는 검은 돈의 유출을 막기 위해 ‘졸름계획’을 발표해 두었다. 졸름계획은 자진 신고자에 한해 세금횡령에 대한 형사처벌을 면제하고, 3만 마르크(약 1800만원)까지는 출처를 묻지 않고 무조건 유로화로 바꿔주며 국외 반출도 허용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대신 국경 밖으로 거액을 밀반출하려다 적발되면 가혹하게 처벌한다. 3만 마르크 이상 소지한 채 국경 세관에서 발견되면 관할지역 세무서에 넘겨 벌금을 물게 하는 것은 물론, 고의성 여부와 방법에 따라 그 자리에서 전액을 압수당할 수도 있다. TV에서는 이 경우 형사처벌까지 받게 된다며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독일과 스위스를 오가는 뮌헨발 취리히행(行) 자기부상열차(ICE)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검은 돈의 고속전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당국이 이 열차 승객들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강력한 단속을 펼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금 밀반출자 검거작업을 하는 세관원들의 모습은 정책적으로 수차례 TV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1000마르크 지폐다발을 속옷 상의 속에 숨기고 있다 발각된 한 여인은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 이러한 강력한 홍보정책에 힘입어 현찰을 숨기고 열차를 타는, ‘고전적인 그러나 가장 확실한 수법’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독일은 지금 ‘검은 돈’ 세탁 열풍
그러나 ‘세금을 낼 수 없다’는 각오에 불타는 탈세자들의 두뇌게임은 끝이 없다. ‘세금의 오아시스, 융통성 있는 납세자를 위한 안내서’와 ‘외국 부동산의 친구들’ 같은 제목의 절세(?) 노하우 관련 책을 저술한 바 있는 전직 은행원 한스 로타르 메르텐씨는 독일과 스위스에 걸쳐 있는 보덴 호수를 건너는 나룻배를 탈 것을 공개적으로 권한다. 또 독일`-`룩셈부르크 국경의 강력한 단속이 두려운 사람들에게는 프랑스나 벨기에로 우회해 면세 국가로 향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은행 역시 수송업자들과 결탁해 현금의 국외 반출을 돕고 있다. 수백만 마르크를 지닌 사람이라 해도 수색당할 때 금융기관의 위탁을 받아 현찰을 타국 지점으로 옮기는 중이라는 증명서만 제시하면 단속에서 제외된다. 물론 이들에 대한 집중조사를 통해 혐의가 드러나면 밀반출 수사에 중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고리가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고객’의 비밀을 끝까지 지키는 수법으로 수사는 가볍게 무력화된다. 단속금액보다 적은 2만9000마르크씩 나누어 여러 차례 걸쳐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 역시 법망에서 벗어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탈세자들이 창의력을 발휘할수록 조세당국의 수사기법은 정교해진다. 요트 등 고액 소비품목의 구입으로 세금을 피해가려는 사람들에 대해 조사관들은 계약서상의 금액과 보험증서 사이의 차이를 확인한다. 계약서에는 공시가와 거의 유사한 금액으로 거래된 것으로 기재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비싼 금액을 주고 구입한 것이기 때문. 대신 대물보험가액은 실제 거래가격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 차액에서 검은 돈의 액수를 추적해낼 수 있는 것이다.

당국의 엄밀한 추적과 가혹한 처벌에 몰린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은 역시 자진신고. 이 경우 형사처벌 면제는 물론, 탈세한 세금도 최대 10년치까지만 소급해 추징한다. 저축액에 대해서도 6%의 이자만 지불하면 돈이 양지로 나올 수 있다. 이 파격적인 감면 유인책에 힘입어 지난 한 해에만 2만7000여명의 탈세자가 자진해 세무서를 찾았다. 이는 98년의 3배에 해당하는 기록적인 수치. 올해에는 그 숫자가 훨씬 늘어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탈세를 위한 자영업자들의 노력과 세무당국의 ‘감면 유인책’을 바라보며 허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평생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한 유리봉투 생활자들이 바로 그들. ‘월급쟁이만 봉’이라는 자조어린 농담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주간동아 2001.12.13 313호 (p46~47)

< 최재덕/ 유럽문화정보센터 전문연구원 > sahara2@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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