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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에는 왜 양반댁 여인이 없을까

이원복씨 논문 ‘신윤복의 미인도 고찰’ … 조선 후기 모델 ‘기생’의 숨은 이야기 등 ‘흥미진진’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미인도’에는 왜 양반댁 여인이 없을까

‘미인도’에는 왜 양반댁 여인이 없을까
5등신 정도의 키에 다소곳이 숙인 얼굴, 쌍꺼풀 없는 가느다란 눈, 작은 입과 초승달 눈썹에 달걀형 얼굴. 혜원 신윤복(1758~1813 이후)의 ‘미인도’가 보여주는 2백년 전 미인의 얼굴이다. 언뜻 보아도 지금의 기준과는 큰 차이가 있다. 키가 크지 않은 것은 물론 그 흔한 쌍꺼풀이나 오똑한 코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미인도’의 주인공은 기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최신 유행이었을 꼭 맞는 삼회장 저고리에 속옷을 겹겹이 입어 부풀린 쪽빛 치마, 자줏빛 댕기와 칠보 노리개 등 화려한 치장은 기생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림의 주인공은 커다란 노리개를 쥔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지금까지는 노리개를 푸는 동작으로 여겨졌지만, 사실은 노리개를 막 걸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당대 제일의 미색을 갖춘 이 기생은 그림을 그리라고 화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을까? ‘신윤복의 미인도에 관한 고찰’(‘미술자료’ 66호, 국립중앙박물관 펴냄)을 쓴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원복 미술부장은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조선시대에는 초상화를 그릴 때도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신윤복이 그린 것은 아마 그의 마음속에 담긴 이상적인 미인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특정 미인보다는 당시의 미인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신윤복의 미인도에 관한 고찰’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준다. 왜 미인도는 조선 후기에만 그려졌을까, 화가들은 왜 양반집 여인이 아닌 기생을 그렸을까, 혜원과 쌍벽을 이룬 단원 김홍도(1745~1806 이후)가 미인도를 남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화가와 기생들은 어떤 관계였을까 등등.



‘미인도’에는 왜 양반댁 여인이 없을까
우리나라 미인도의 역사는 고구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여성들은 고구려 미인들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중국풍 복식을 갖춘 고분 벽화의 여인들은 관을 쓰고 볼에 연지 찍은 귀부인에서부터 부엌일하는 여인네까지 다양한 생활상을 드러내고 있다.

고분 벽화는 기본적으로 감상자가 아니라 무덤에 묻힌 망자를 위해 그린 그림이다. 내세 생활이 현세와 마찬가지로 계속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그려진 만큼, 고분 벽화의 생활상은 당시 고구려인의 생활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미인도는 긴 공백기에 들어간다. 고려 후기에 그려진 불화에 여인들의 모습이 간간이 등장한 것이 유일한 예다. 그나마 이 그림들은 중국 화가들이 그린 여인과 흡사하다. 18세기 들어 비로소 조선의 경치를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화가 등장하듯, 조선 중기까지 그려진 여인 초상들은 대개 중국 복색을 한 ‘사녀도’였다.

‘미인도’에는 왜 양반댁 여인이 없을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행사 장면을 기록한 의궤도에서 기생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원복 부장의 논문은 조선시대의 그림 중 연산군 시대에 그려진 ‘십로계축도’에서 처음으로 기생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499년 작품인 이 그림은 노인들이 계모임을 여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노인 10명과 술시중 드는 여인 6명이 그려져 있다. 바로 이 여인들이 기생이라는 것.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기생 그림은 16세기에 그려진 궁정연회 그림이었다.

‘미인도’에는 왜 양반댁 여인이 없을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십로계축도’를 그린 이가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1429~1504), 또는 서화에 능했던 신말주의 부인 설씨(1428~1508)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신말주는 미인도의 꽃을 피운 화가 신윤복의 11대조뻘로, 신윤복의 그림세계는 가문의 피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 역시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남겼다.

신윤복은 풍속화나 기록화의 일부가 아니라 기생만을 독자적으로 다룬 미인도를 그린 최초의 화가다. 그는 위에 언급한 대표적인 미인도 외에 기생을 주인공으로 한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다. 말을 타거나 악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 담뱃대를 든 채 물끄러미 안마당을 내다보는 모습, 또 남정네에게 팔목을 붙잡힌 채 당황하는 모습 등 신윤복의 그림에 등장하는 기생들은 한결같이 요염하다기보다 자연스럽기 그지 없다. 화가가 그네들의 분 냄새를 가까이 맡지 않고서는 포착할 수 없는 순간들이다. 동시에 신윤복의 기생 그림은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갖고 있는 딱딱하거나 근엄한 느낌과도 거리가 멀다.

남아 있는 그림에 비해 신윤복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사실이 없다. 생몰년대조차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림에 등장하는 기생들의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삶에 기생들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을 추측할 뿐이다. 미술사가 최순우 선생은 “혜원이라는 작가가 수많은 풍속도를 그린 것이 어쩌면 본격적인 미인도를 그리기 위한 발돋움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기생과 화가들은 어떠한 관계였을까? 기생은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자유 연애를 할 수 있는 여성들이었다. 여염집 아낙네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추사 김정희 같은 사대부 화가들이 기생을 그리지 않은 이유나 화가들이 사대부집 규수를 그리지 않은 이유는 모두 신분 차이 때문이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그려진 양반가 부녀자의 초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신윤복을 비롯한 화가들은 대부분 중인이었다. 신분이 주는 동병상련의 정은 화가와 기생 사이에 어떤 공감대를 형성했을지도 모른다. 또 서화에 뛰어난 일부 기생들은 화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했다. 추사 김정희조차 평양 기생인 죽향의 그림 솜씨를 칭찬하는 시찬을 써주었을 정도다. 신윤복의 미인도들은 그러한 공감대의 산물이었다.

‘미인도’에는 왜 양반댁 여인이 없을까
신윤복과 쌍벽을 이룬 단원 김홍도는 왜 기생을 그리지 않았을까? 드물지만 그의 미인도 역시 남아 있다. 여러 화가가 함께 그린 ‘안릉신영도’에서 김홍도의 미인상을 찾아볼 수 있다. 길이 6m가 넘는 이 그림 속에 말 탄 기생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러나 김홍도는 신윤복처럼 독자적인 미인도는 남기지 않았다.

이원복 부장은 화가의 작가관과 개인적 상황이 이 같은 차이를 낳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9세기 들어 신윤복 외에도 이명기 등 기생을 그린 화가가 여러 명 나타납니다. 이때부터 기녀 그림에 대한 수요층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가 개인의 작가관 역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신윤복이 미인도를 많이 남긴 것은 그 자신의 작가관이 미인도를 요구했던 것이고 김홍도는 그렇지 않았던 듯합니다. 김홍도는 미인도 대신 중국 복색을 한 ‘사녀도’를 그렸지요. 또 도화서 화원 직책을 맡고 있던 김홍도는 일반인들의 부탁을 받고 미인도를 그릴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신윤복 이후로는 미인도가 여러 점 등장했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얼굴 왼편을 그린 전신상이라는 점,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고 배경이 전혀 없는 점 등에서 신윤복의 그림과 흡사하다. 하지만 신윤복의 미인도를 능가하는 작품은 없다.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인 오원 장승업은 우리의 상상과 달리 미인도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조선 후기 화가들은 더 이상 신선을 그리지 않고 체취가 느껴지는 인간을 그렸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인 동시에 작가관의 표출이었다. 진경산수에서 꽃핀 한국미술의 독창성은 미인도에서 빛을 낸다. 조선 후기의 화가들은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 자연이나 신선이 아닌 여성임을 비로소 발견했던 것이다.



주간동아 2001.11.08 308호 (p70~72)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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