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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탱크 앞세운 ‘피의 보복’

각료 암살 응징 1주일 새 팔레스타인 42명 피살 … 샤론 “테러와의 전쟁중”

  •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이스라엘 탱크 앞세운 ‘피의 보복’

이스라엘 탱크 앞세운 ‘피의 보복’
미국은 지금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 쓸 틈이 없다.” 지난 10월25일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이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벤구리온 공항에서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다. 사실 지금 부시 미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지휘하느라 정신이 없다. 지구촌의 눈길도 미국의 탄저균 소동과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쏠려 있다. 바로 이런 틈새에 팔레스타인에서는 단 1주일 동안 42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스라엘의 한 극우파 각료가 암살된 것을 빌미로 이스라엘군은 서안(西岸)지구 6개 도시를 점령해 마구잡이 포격을 가했다. 제닌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 있던 12세 소녀도 탱크 포격으로 숨졌다. 이른바 ‘샤론판(版)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인가.

특히 10월24일 서안지구 베이트리마에서는 마을사람 9명이 한밤중에 피살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사건을 ‘베이트리마 학살사건’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측 주장으로는 테러리스트 소탕일 뿐이다. 평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lice)라고 부른 이스라엘 극우파 정치인 레하밤 지비 관광장관이 10월17일 암살된 데 대한 응징이 명분이라면 명분이다.

학살이냐, 테러리스트 소탕이냐

이스라엘 53년 역사상 각료가 암살되기는 처음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이 지난해 9월 이후 추진해 온 표적암살(targeted assassination)이 지비 장관 암살을 불렀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측의 표적암살 행위는 그동안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인권감시(Human Rights Watch) 등 국제 인권단체들로부터 ‘법 테두리를 벗어난 살인’(extra judicial killing)이란 비판을 받아왔다. 지비 장관 암살도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군이 지난 8월 말 미사일 공격으로 팔레스타인해방대중전선(PFLP) 지도자 알리 아부 무스타파를 살해한 데 대한 보복 성격을 띠고 있다.

지난 5월 서안지구 중심도시 라말라에서 PFLP가 주최한 한 집회를 취재했을 때, 연단에 선 무스타파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의 타협적인 자세를 비판하면서 “무장투쟁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스라엘에 강경히 맞서는 투쟁만이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 길이자 권리”라고 강조했다. 무스타파는 지난 1년 동안 이스라엘군의 표적암살 희생자 가운데 가장 거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라말라 거리엔 수만명이 나와 슬픔을 나누었다. 정치노선을 달리한 아라파트조차도 3일 동안을 애도의 날로 정했을 정도다.



‘테러리스트들을 체포하기 위한 보안상의 이유’를 내세워 걸핏하면 탱크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을 밀고 들어가는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의 ‘재점령 정책’은 국제사회 비난의 표적이 돼왔다. 아프간 전쟁과 관련해 아랍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부시 행정부는 이스라엘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중도우파 신문인 ‘예루살렘 포스트’는 미국의 압력이 ‘비외교적’(undiplomatic)이라며 샤론을 두둔하는 자세를 보였다. 극우파 신문인 ‘핫조페’는 한술 더 떠 “(이스라엘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을 좌절시키려는 깡패적 행위”라고 맞받았다.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처럼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중이므로 미국이 참견하지 말라는 투다.

지금 미국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성명서를 여과 없이 독자(또는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논쟁이 벌어지듯, 이스라엘 언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세력과 인터뷰를 해서 방영하는 것이 옳으냐는 시비다. ‘예루살렘 포스트’의 최근 여론조사로는 이스라엘 국민의 71%가 ‘옳지 않다’는 쪽이다. 1년 동안의 유혈투쟁을 거치며 여전히 샤론이 힘을 얻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스라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샤론의 강공책이 우세한 편이다. 제럴드 슈타인버그 교수(바르일란대·정치학)는 10월25일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지난 1년 동안의 유혈충돌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쪽 모두 희생이 컸고 지쳐 있다. 소모적인 테러 공격과 이에 맞선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을 막으려면 극적인 변화를 마련해야 한다. 아라파트가 이런 지도력을 보일 수 없다면, 전쟁에 지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를 밀어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코소보 전쟁에서 진 밀로셰비치를 밀어낸 세르비아 사람들처럼. 그런 날이 오기까지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들을 공격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분쟁해결을 위한 일반이론 가운데 전쟁피곤(war weariness)이론이 있다. 전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 지쳐 있는 상태에서, 어느 쪽이든 이긴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전투행위가 그치고 평화가 깃든다는 이론이다. 슈타인버그 교수의 견해로는, 전쟁피곤이론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각에선 팔레스타인 쪽이 지쳤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중동 현지취재 경험에 비추어 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친 것 같지는 않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읽는 팔레스타인측 코드는 좌절과 분노 두 가지다. 피점령지 민중으로서 좌절이 크지만 분노가 워낙 강한 까닭에 버티는 모습이다. 지친 쪽은 오히려 이스라엘인 듯하다. 거리의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도 자살폭탄 테러가 바로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지나 않을까 불안 속에 지내야 하는 게 이스라엘이고 예루살렘이다. 필자의 한 유대인 친구는 3년 전까지 뉴욕에서 살다가 이스라엘에서 묻히기를 원하는 노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옮겨갔다. 그는 최근 보내온 편지에서 “지난 1년 동안 나는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살얼음을 딛는 것처럼 살고 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썼다.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은 좌절에 익숙해진 팔레스타인 쪽에 희망을 던져주기도 했다.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 국가창설 지지 발언이다. 아프간 공격에 대해 비협조적인 이슬람 국가들을 끌어안기 위해 고심하던 부시는 지난 10월 초 ‘이스라엘의 생존권이 존중되는 한’이란 꼬리를 달긴 했지만,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창설은 언제나 중동 평화를 위한 미국의 계획(vision) 중 일부”라고 밝혔다. 취임 뒤 샤론을 두 번이나 만났으면서도 아라파트와의 면담을 거부해 온 부시였다. 그런 부시가 9·11 테러사건을 겪고 난 뒤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들고 나왔다. 이런 돌출(?) 발언은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품게 했을 법하다. 하나는 꿈에도 그리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곧 현실화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한번 미국에 대해 실망과 좌절감을 느끼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부시가 던진 당근에 혹한 까닭일까. 아라파트는 결정적인 패착을 두고 말았다. 지난 10월8일 미국의 아프간 공습을 성토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던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진압하면서 2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을 가리킨다. 아라파트의 미지근한 타협적 자세에 불만을 품어온 팔레스타인 민중들 사이에선 하마스(Hamas)의 지지도가 상당히 높다. 지난 1년 동안의 ‘인티파다’(봉기)를 거치면서 하마스는 일약 대중조직으로 발돋움했다. 그런 하마스가 민중봉기를 선언했더라면, 극단적으로 말해 아라파트는 이스라엘로 망명해야 할 처지에 몰렸을지도 모른다. 한 외신기자는 가자지구 경찰 총수인 가지 자발리에게서 “하마스는 할 수만 있었다면 자치정부를 전복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빈 라덴은 아프간에 대한 영·미군의 10·7 공습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투쟁 이유의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빈 라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라파트의 대변인격인 자치정부 공보장관 야세르 아베드 라보는 “팔레스타인이 테러행위의 구실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서 “팔레스타인 이름으로 범죄가 저질러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아프간 전쟁에 대해서도 다른 아랍권과 마찬가지로 애매한 태도다.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강경세력의 시각은 다르다. ‘아프간 공습은 침략’이라는 입장이다. 이슬람 교도를 죽이고 아랍 국가들을 침략하는 서곡이라는 비판적 시각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샤론이 두려워하는 강적은 아라파트가 아니라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강경세력이라는 점이다.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어려운 선택을 강요한 것은 사실이다. 부시는 5400명이란 희생자 숫자를 빌미로 전 세계를 향해 ‘미국 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부시의 맞은편에서 빈 라덴은 모든 이슬람 교도가 지하드(성전)에 나설 것을 외쳤다. 아라파트로선 명분(지하드)이냐 실리(팔레스타인 독립국가)냐 사이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빈 라덴 지지 데모대에 발포한 모양새로 보면 아라파트는 실리(?)를 택한 듯하다.

아라파트에게는 뼈아픈 실책(?)의 경험이 있다. 지난 91년 걸프전이 일어났을 때 그는 사담 후세인 편을 들었다. 후세인판(版) 지하드 주장에 동조했다. 아랍 민중의 반미정서를 되비춘 아라파트의 선택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이익보다는 손실이 큰 선택이었다. 당시는 1차 인티파다(87∼93년) 기간이라 아라파트의 그런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당시 미국의 정치평론가들은 “아라파트가 줄을 잘못 섰다”고 비판했다.

아리엘 샤론 수상은 입만 열면 “아라파트는 테러리스트 집단의 수괴”라고 몰아붙였다. 9·11 테러사태 뒤로는 아라파트를 “이스라엘의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스라엘 군부 강경파들은 ‘아라파트 제거(암살)’를 공공연히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들은 잘 알고 있다. 아라파트는 이스라엘 강경파들에게는 편한 상대다. 아라파트가 이스라엘 손에든, 팔레스타인 봉기에 의해서든 거세되면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샤론이 맞서야 하는 세력은 하마스, 지하드, PFLP 등을 비롯한 강경파들이다. 이번 이스라엘의 학살극은 그런 강경파들을 제압할 구실을 찾던 샤론 같은 이스라엘 강경파들이 극우파 각료의 피살을 빌미로 벌인 침공작전에 지나지 않는다.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이 아프간에서 숱한 무고한 희생자를 낳고 있듯이 ‘샤론판(版) 테러와의 전쟁’은 또 얼마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인가.



주간동아 2001.11.08 308호 (p58~60)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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