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8

2001.11.08

호남 민심도 떠나간 ‘DJ 정치’ … “우리한테 뭘 해줬대요?”

사랑과 미움 교차하는 복잡한 정서 … “이젠 당 아니라 인물 위주로 투표할 것”

  • < 김시관 기자 / 광주·전주 > sk21@donga.com

    입력2004-11-17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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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 민심도 떠나간 ‘DJ 정치’ … “우리한테 뭘 해줬대요?”
    대통령 아들이 꼭 국회의원을 해야 쓰겄소. 검사를 끼고, ‘깡패’를 데리고 휴가를 가야 노는 맛이 나겄소. 그 양반(김대중 대통령)은 도대체 뭘 하고 있소.”

    10월27일 오후 3시 광주 충장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일까. 광주 민심을 묻는 질문에 김점용씨(노점상·50대)는 신랄한 비판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나 분당 백궁·정자 지구 특혜의혹과 관련한 김홍일 의원 등 여권 핵심 인사들에 대한 감정이었다. “아직 사실로 밝혀진 것은 없지 않느냐”고 되묻자 옆에 섰던 또 다른 노점상이 말을 자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겄소. YS도 현철이 잘못한 거 없다고 얼마나 감싸고 돌았소.”

    호남 민심도 떠나간 ‘DJ 정치’ … “우리한테 뭘 해줬대요?”
    ‘DJ 정치’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광주. 온갖 탄압 속에서도 김대통령을 꿋꿋하게 지켜준 광주는 그러나 지금 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기운은 상층부를 거쳐 밑바닥으로, 세대별·계층별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잇단 실정, 핵심 측근들의 비리의혹, 어려워진 경제 여건, 전남도청 이전문제 등 광주 시민들을 자극하는 소재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빛고을 사람들’에게서 대통령을 탄생시킨 자부심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예전의 자부심과 기대는 안타까움으로, 체념으로, 이제는 불만을 넘어 비판의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호남 최대 재래시장인 양동시장. 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시민군에게 물과 음료수를 제공했던 그들, DJ가 선거에 나서면 자발적으로 쌈짓돈을 털어 전달했던 그들도 이제 ‘DJ 환상’에 빠졌던 자신들의 과거를 조금씩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양동시장 입구에서 트럭을 세워놓고 물건을 내리던 정진철씨(38). 그는 98년 회사에서 정리해고된 후 줄곧 이곳에서 장사하고 있다.

    “DJ요, 말 마쇼. 솔직히 나도 선거(97년 대선) 때 수월찮게 돈 썼지라. 그런데 정권 잡고 보니 동교동이니 뭐니 측근들만 배부른 세상 아니오.”



    전남도청 이전문제는 광주와 목포를 소지역주의로 분화시킨 핵심 이슈다. 도청 앞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이씨(40대 중반)의 피해의식은 그 정도가 심각했다.

    “광주를 죽여 목포 살리려는 목포 사람들의 작태 아니겄소.” 비난의 대상은 목포 출신 실세들로, 김대통령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DJ요. 설사 그들이 그렇게 하더라도 DJ가 말렸어야제. DJ가 어떻게 광주를 버릴 수 있당가.”

    전남도청 이전반대 및 광주전남통합추진위원회 이승채 실무상임대표(변호사)도 비슷한 생각을 토로한다. “(도청 이전은) 불요불급한 사항이 아니다. 재고해야 한다.” DJ 정부가 최대 치적으로 꼽는 대북정책도 성난 광주 사람들에게는 사치이자 남의 나라 얘기다. 금남로에서 만난 자영업자 김진국씨(48)의 말. “아, 지 새끼는 목에 풀칠하기도 힘든디 퍼주기나 하고….”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에 올린 말은 더욱 충격적이다. “차라리 전두환 시절이 살기는 더 좋았제….”

    광주(금남로)와 전두환. 그 질긴 악연을 타고 넘을 만큼 광주 시민의 분노는 컸다.

    “사람 죽인 것만 빼면 전두환이가 더 나았다는 얘기가 나와도 인자 안 놀라지. 그때는 먹고사는 문제가 힘들었응께.”

    80년 5월의 함성을 간직하고 있는 금남로의 색깔은 과연 이렇게 비판과 분노로 변해버린 것일까. 토요일을 맞아 여자 친구와 금남로를 찾은 노차현(전남대 3년)군. “글쎄…, 정치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노란 머리 여자친구의 팔을 풀며 손사래를 친다. 빤히 보는 기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한마디 더 보탠다. “(중앙 정치는) 신경 쓸 만큼 가치가 있나요.” 그 말을 남기고 그는 금남로를 오가는 청춘 사이로 사라졌다.

    광주의 ‘살아 있는 양심’으로 불리는 홍남순 변호사. “(DJ에게) 환멸을 느껴부요. 광주가 DJ하고 멀어진 것은 오래됐제. 그 사람이 한 게 도대체 뭐여. 사임해야 혀.” 80을 넘긴 나이. 그의 얘기는 무엇을 의미하나. 도대체 무엇이 광주를 이토록 그를 화나게 했을까. 광주시의회 오주 의장의 진단이다.

    “정권 창출에 대한 기대감이 컸습니다. 30년 한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뜻대로 안 되니 실망도 컸습니다. 어려운 경제, 측근들에 대한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는 말이다. 이런 민심을 지역신문이 모를 리 없다. 지난 10월27일 지역 한 언론은 ‘호남 민심은 이상 없나’라는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실었다. 김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지역민의 식은 애정이 급기야 무소속 바람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섞인 전망 기사다.

    민심이반으로 시작된 변화 바람은 야당 당사에도 몰아쳤다. 한나라당사(광주시 지부) 측면에는 ‘야당테러, 폭력정권, 온 국민이 분노한다’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과거에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한나라당 서송주 사무처장의 설명. “전에는 욕설 전화 때문에 하루도 플래카드를 걸어놓지 못했을 겁니다. 요즘은 그런 전화가 일절 없습니다. 무덤덤합니다.”

    그렇다고 광주가 DJ와 여권을 거부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직도 곳곳에 숨어 있는 애정이 엿보인다. 광주역 인근에서 이동통신업을 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개인 사업가 송씨. 97년 IMF 사태 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는 그 역시 비판적 애정론을 근간에 깔고 오늘의 DJ를 재단한다.

    “자기들은 YS를 욕하지만 남이 욕하는 걸 못 참는 게 부산 사람들이라지요. 지금 제 심정이 꼭 그렇습니다. 사실 그 양반(김대통령)이 잘못한 게 많습니다. 그러나 남이 욕하는 건 유쾌하지 않습니다. 잘하면 좋을 텐데….”

    예향 전주. 광주·목포와 함께 호남의 3각 꼭지점을 이뤄 대통령을 창출시킨 또 다른 전략지 전주도 빛 바랜 옛날 사진 대하듯 DJ에 대한 기억이 아련하다. 민주당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많이 사라졌다. 전주 지역 일간지에서 근무하는 중견 언론인 김씨의 설명.

    “확실히 과거와 달라졌다. 옛날엔 선거 때 막대기도 꼽으면 된다는 지역 아닌가. 그러나 요즘 그런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호남 민심도 떠나간 ‘DJ 정치’ … “우리한테 뭘 해줬대요?”
    김씨가 꼽는 변화 요인은 의약분업 등 실생활과 관련된 정부 정책의 혼선이다. 전남도청을 둘러싸고 광주와 목포가 갈등하듯 전남북도 갈등의 기미가 보인다. 이른바 ‘남북 갈등’이다. 배경에는 푸대접론이 진하게 깔려 있다. 전주 관통로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조재환씨의 설명.

    “사실 DJ가 대통령이 된 데는 우리(전북)도 한몫했다. 그런데 과실은 광주 전남이 80~90% 이상 다 따갔다. 우리는 푸대접받고 있다. 우리는 뭐냐.”

    조씨는 “내년 지방선거를 지켜보라”고 말한다. “두번 다시 민주당을 찍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전북대 앞에서 식당업을 하는 문씨(30대)도 비슷한 주장을 내놓는다.

    “이제는 당이 아니라 인물 위주로 투표할랍니다. DJ를 밀어주면 뭔가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우리 같은 사람 세상살이만 더 팍팍해졌지….”

    다만 전주는 광주처럼 요란하지 않다. 광주를 흔들고 있는 격한 감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선을 그어놓고 넘지 않으려는 것 같다. 무엇이 다를까. 전주 최고의 번화가 팔달로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김진태씨(42)의 설명.

    “따지고 보면 DJ에 대한 광주와 전북의 정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전북은 광주처럼 맹목적·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광주처럼 기대가 크지 않았고 따라서 실망도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전주 인근 익산의 외국인 회사에 다니는 윤창복씨(30대 중반)는 이를 애증(愛憎) 논리로 풀이한다. “찍어줬으니 잘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지만 기대만큼 안 되니 화가 나 욕도 하고….” 지금 호남 민심은 한발 한발 DJ 곁을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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