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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사극 ‘여인천하’의 감초 아역 배우들

“어마마마, 쉬 마렵사옵니다”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어마마마, 쉬 마렵사옵니다”

“어마마마, 쉬 마렵사옵니다”
지난 9월19일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 SBS 사극 ‘여인천하’ 촬영장을 찾았을 때 김재형PD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경내를 뒤흔들고 있었다. “빨리들 준비해! 왕자들 어딨어! 자, 간다 레디∼” 소란한 현장은 김PD의 “레디” 소리에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오늘은 왕세자 책봉식 촬영이 있는 날. 덕분에 원자, 복성군을 포함해 8명의 왕자가 모두 모였다. 얼마 전 TV에서는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어린 왕자들과 그 어머니들의 보이지 않는 ‘암투’가 치열했다. 코흘리개 어린 왕자들이 중종 앞에서 “군주는 안서(安徐)하여 정(靜)하고 유절(柔節)이 있어야 하며…” 같은 어려운 대사를 줄줄 외는 모습은 귀엽고 또 신기했다. 복성군역을 맡은 오승윤군(11)의 독한 연기도 일품이거니와, 이제 겨우 만 네 살 된 원자가 윤비(전인화)의 품에 안겨 “어마마마, 쉬 마렵사옵니다” 같은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할 때는 연기인지, 실제상황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촬영장에서 만난 아역 배우들은 성인연기자 못지않게 자기 몫을 충분히 해내었다. 대사도 열심히 외우고 소품 하나도 꼼꼼히 챙겨(물론 이건 엄마들의 일이다) 카메라 앞에 섰다. 가끔 촬영이 시작한 줄도 모르고 옆 친구랑 장난치다 혼쭐이 나는 경우는 있지만, 이들 때문에 NG가 나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많이 선선해졌지만, 한낮의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가운데 수십 명의 어른들 속에서 연기해야 하는 아이들도 보통 일은 아닐 듯했지만, 정작 고생은 엄마들이 더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일반 관광객 틈에 섞여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는 엄마들은 카메라가 멈추면 얼른 자기 아이에게 달려가 물을 먹이고, 의상을 점검하면서 아이상태를 살피고 다음 촬영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엄마들의 커다란 가방과 비닐봉지에는 아이에게 먹일 간식거리와 얼음물 같은 것이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현장을 지키려면 힘들고 지루하지만 어쩌겠어요. 다 자식 위한 일인걸요. 이젠 만성이 되어 기다리는 동안 뜨개질도 하고 책도 읽고 그래요. 촬영하는 동안 제대로 먹기 힘드니까 이것저것 챙겨와 틈날 때마다 억지로라도 먹여야죠.”



승윤군의 어머니 최재연씨(40)는 벌써 7년째 하는 일이라 이골이 났다고 말한다. 승윤이가 연기를 좋아하고 또 제작팀이나 시청자들에게서 연기력을 인정 받았으니 더할 수 없이 기쁘지만 혼자 집에 있는 승윤이 형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승윤이가 계속 학교를 빠지는 것도 걱정이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졸리다는 승윤이를 깨워 영어테이프를 틀어주고 따라하게 하는 것도 이런 걱정 때문이다.

“어마마마, 쉬 마렵사옵니다”
‘여인천하’가 탄생시킨 또 한 명의 꼬마스타는 원자역의 권오민군. 시청자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는 이 아이는 촬영장에서도 단연 최고의 스타였다. 상궁 아줌마들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음으로 촬영장을 누비고 다니는 오민이의 뒤를 어머니 임규정씨(31)가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다.

“아직 어리고, 연기도 처음 하는 거라 엄마 손이 많이 가요. 글은 읽을 줄 알지만 뜻을 모르니, 일일이 알아듣게 설명해 줘야 하거든요. 영화(‘달마야 놀자’의 동자승역)에도 출연하게 되어 어제 밤늦게 김해에서 올라왔더니 오늘은 많이 졸린가 봐요.”

“어마마마, 쉬 마렵사옵니다”
엄마 바짓자락을 잡고 칭얼대는 아이를 겨우 얼러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돌아서는 임씨의 얼굴이 영 불안하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하고 드라마 대사도 곧잘 따라하는 걸 보고 연기학원에 데리고 갔는데, 형들 틈에서 지지 않고 연기하는 걸 보면 엄마인 자신도 신통하게 느껴진다고.

“첫 촬영 때는 카메라 앞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어요. 감독님이 그걸 그대로 찍었죠. 또 오줌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연기하다가 ‘엄마, 나 쉬했어’하는 통에 촬영장이 웃음바다가 된 적도 있고요.”

촬영하는 날이면 새벽에도 벌떡 일어나는 아이를 보면 연기자다운 ‘끼’를 느낀다는 임씨. 이날은 손주의 ‘왕세자 책봉식’을 보기 위해 할아버지·할머니까지 온가족이 총출동했다. 촬영이 길어지자 다시 찡찡대던 오민이는 감독의 “컷!” 소리가 떨어지자, 할머니에게 달려와 “할머니, 나 오늘도 잘했으니까 고기 사줄 거죠”라고 해 또 한바탕 웃음바다를 만든다.

“어마마마, 쉬 마렵사옵니다”
비중은 작지만 중종의 왕자들로 출연하는 다른 아역배우들도 대부분 짧지 않은 연기경험이 있고, 높은 경쟁률의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아이들이다.

“떨어지기도 많이 떨어졌어요. 경쟁이 말도 못하게 치열하거든요. 오디션장 밖에서 엄마들의 신경전은 더 치열하죠(웃음). 연기 잘 못하면 제가 더 혼내요. 감독한테 혼나느니 엄마한테 혼나는 게 낫잖아요.”

영양군(창빈의 아들)역의 송운섭군(10) 어머니 윤미정씨(35)는 “이 정도 드라마에 출연할 때는 다들 극성스런 엄마들에 대단한 아이들인데, 비중이 적어 알아주지 않을 때는 참 속상하다”고 털어놓는다.

“‘언젠가 잘 되겠지’라고 믿으면서 무작정 기다리는 거예요. 이거 엄마가 포기해 버리면 못해요. 아이는 어차피 엄마 하는 대로 따라하게 되어 있거든요.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예요.”

덕흥군(영양군의 동생)으로 출연중인 조상진군(8)의 어머니 이힐씨(35)는 “그만두고 싶어도 ‘본전 생각’에 참는다”고 말한다. “좀 과장하면, 여기까지 오는 데 수억은 들었어요. 옷도 잘 입혀야 하고, 먹는 것도 두 배로 들어요. 아역배우들은 학교 빠지는 날이 많으니까 대부분 개인과외를 하거든요. 남양주인 집에서 여의도까지 2시간 가까운 거리를 매일같이 왔다갔다하면서 이 고생하는 거, 정말 자식 아니면 못해요.”

애타는 엄마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해질 무렵까지 계속된 촬영에도 마냥 신이 나 깔깔거리며 경내를 뛰어다닌다. “아역배우들이 어떻게 연기자로 성장해 가는지도 대부분 엄마들 손에 달렸다. 학생인 아이들에게 연기가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보면 엄마들의 극성스러움이 좀 걱정스럽기도 하다.”

‘여인천하’ 조감독 정효씨의 말이다.



주간동아 2001.10.04 304호 (p170~171)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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