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그리워지는 계절, 가을을 맞으며 자작나무를 보러 갔다. 내 자작나무를.
다 그렇다. 잠시 빌려 쓰다가 두고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디 내 것이 있으랴.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이 나무를 두고 나는 혼자 늘 그렇게 부른다. 내 자작나무라고.
찾아간 자작나무는 한 해의 비바람을 견디면 또 그만큼 잘 자라 있었다. 그래서 이 나무를 보러 갈 때마다 무슨 큰 깨달음처럼 속삭인다. 나무는 속임이 없구나.
몇 년 전 일이다. 더 나이 들면 조용히 숨어 들어갈 만한 곳으로 시골 산자락에 땅을 조금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그 땅에 아내와 함께 서로 좋아하는 나무를 심었다. 내가 심자고 해 자작나무를 심었고, 아내는 그것이 언제 크는 것을 보겠느냐는 내 만류에도 소나무를 심었다.
쑥이며 온갖 잡초의 넝쿨이며 달맞이꽃까지 뒤엉겨 자라는 비탈밭에서 소나무 묘목은 아예 풀 속에 묻혀 버렸다. 찾아갈 때마다 풀을 헤치고 소나무를 보면서 키 작은 묘목에 미안하고 안타까워했는데, 몇 해가 지나며 뿌리를 내리더니 올해엔 드디어 풀들을 이기고 머리를 그 위로 내밀었다. 아내의 기쁨은 소리라도 지를 듯했다.
기억 속에서 고향은 여전히 싱싱
자작나무는 달랐다. 토양이 잘 맞은 탓이었는지, 겨우 무릎 높이에 온 나무가 해를 넘기며 훌쩍 내 키를 넘어서는가 하면, 굵기도 한손으로는 감싸쥐기에는 벅찰 정도로 자라 준 것이다. 자작나무는 흰 몸체로 사랑 받는 나무다. 더욱이 껍질이 얇게 벗겨져 신비롭기까지 하다. 지난 봄에는 이삭 모양의 꽃이 피었다. 꽃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피었다 졌다.
옛 사람은 자작나무 껍질에 사랑을 고백하는 글을 적어 편지를 쓰기도 했으며, 독성이 없는 유일한 나무여서 의학용으로도 귀하게 쓰이는 나무다. 우리의 국보 팔만대장경도 이 나무로 만들었다. 자작나무는 백화(白樺)라고도 하는데 ‘백화파’라면 일본 근대문학의 토대를 이룩한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을 일컫는다. 한방에서는 백화피(白樺皮)라 하여 이 나무껍질을 이뇨제나 해열제로 쓴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그림의 재료가 바로 자작나무 껍질이었다.
이곳저곳 떠돌며 살던 어린 시절에 뒷산을 오르면 언제나 자작나무가 있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보낸 고3 겨울에는, 이제 폐광이 된 강원도 정선의 한 산자락에서 눈 덮인 이 자작나무를 껴안고 보냈다. 10여 년 전 백두산을 오르다가도 무리지어 자라는 자작나무를 보았다. 산허리 하나에 창조주가 희디 흰 스프레이를 뿌려놓은 듯 자작나무는 황홀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할 때는, 황금빛으로 단풍이 든 자작나무숲을 눈이 시리도록 보았다.
올해는 또 올해만큼 잘 자라준 자작나무숲을 등지고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마을길을 경운기가 오가고, 포클레인이 논둑을 파헤치고 있다.
문득 떠오르는 시가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정지용이 노래한 ‘고향’이다. 그러나 이런 고향은 이제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이다.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 정지용이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한 이 시는 감각적 이미지즘의 독창적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차마 꿈엔들 그곳이 잊힐 리가 있겠는가’ 하고 묻는 정지용의 말은 맞다.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잊지는 않았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고향은 여전히 푸들거리고 싱싱하다. 이 가을의 귀성길에는 잊히지 않은 고향, 기억 속의 고향 여행을 떠나야 할까 보다.
다 그렇다. 잠시 빌려 쓰다가 두고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디 내 것이 있으랴.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이 나무를 두고 나는 혼자 늘 그렇게 부른다. 내 자작나무라고.
찾아간 자작나무는 한 해의 비바람을 견디면 또 그만큼 잘 자라 있었다. 그래서 이 나무를 보러 갈 때마다 무슨 큰 깨달음처럼 속삭인다. 나무는 속임이 없구나.
몇 년 전 일이다. 더 나이 들면 조용히 숨어 들어갈 만한 곳으로 시골 산자락에 땅을 조금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그 땅에 아내와 함께 서로 좋아하는 나무를 심었다. 내가 심자고 해 자작나무를 심었고, 아내는 그것이 언제 크는 것을 보겠느냐는 내 만류에도 소나무를 심었다.
쑥이며 온갖 잡초의 넝쿨이며 달맞이꽃까지 뒤엉겨 자라는 비탈밭에서 소나무 묘목은 아예 풀 속에 묻혀 버렸다. 찾아갈 때마다 풀을 헤치고 소나무를 보면서 키 작은 묘목에 미안하고 안타까워했는데, 몇 해가 지나며 뿌리를 내리더니 올해엔 드디어 풀들을 이기고 머리를 그 위로 내밀었다. 아내의 기쁨은 소리라도 지를 듯했다.
기억 속에서 고향은 여전히 싱싱
자작나무는 달랐다. 토양이 잘 맞은 탓이었는지, 겨우 무릎 높이에 온 나무가 해를 넘기며 훌쩍 내 키를 넘어서는가 하면, 굵기도 한손으로는 감싸쥐기에는 벅찰 정도로 자라 준 것이다. 자작나무는 흰 몸체로 사랑 받는 나무다. 더욱이 껍질이 얇게 벗겨져 신비롭기까지 하다. 지난 봄에는 이삭 모양의 꽃이 피었다. 꽃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피었다 졌다.
옛 사람은 자작나무 껍질에 사랑을 고백하는 글을 적어 편지를 쓰기도 했으며, 독성이 없는 유일한 나무여서 의학용으로도 귀하게 쓰이는 나무다. 우리의 국보 팔만대장경도 이 나무로 만들었다. 자작나무는 백화(白樺)라고도 하는데 ‘백화파’라면 일본 근대문학의 토대를 이룩한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을 일컫는다. 한방에서는 백화피(白樺皮)라 하여 이 나무껍질을 이뇨제나 해열제로 쓴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그림의 재료가 바로 자작나무 껍질이었다.
이곳저곳 떠돌며 살던 어린 시절에 뒷산을 오르면 언제나 자작나무가 있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보낸 고3 겨울에는, 이제 폐광이 된 강원도 정선의 한 산자락에서 눈 덮인 이 자작나무를 껴안고 보냈다. 10여 년 전 백두산을 오르다가도 무리지어 자라는 자작나무를 보았다. 산허리 하나에 창조주가 희디 흰 스프레이를 뿌려놓은 듯 자작나무는 황홀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할 때는, 황금빛으로 단풍이 든 자작나무숲을 눈이 시리도록 보았다.
올해는 또 올해만큼 잘 자라준 자작나무숲을 등지고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마을길을 경운기가 오가고, 포클레인이 논둑을 파헤치고 있다.
문득 떠오르는 시가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정지용이 노래한 ‘고향’이다. 그러나 이런 고향은 이제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이다.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 정지용이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한 이 시는 감각적 이미지즘의 독창적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차마 꿈엔들 그곳이 잊힐 리가 있겠는가’ 하고 묻는 정지용의 말은 맞다.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잊지는 않았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고향은 여전히 푸들거리고 싱싱하다. 이 가을의 귀성길에는 잊히지 않은 고향, 기억 속의 고향 여행을 떠나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