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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에는 ‘번역’이 없다

약골 지식사회는 번역 부재 탓

“시간 뺏기고 돈 안 돼” 너도나도 기피… 제대로 된 번역書 찾아보기 어려워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약골 지식사회는 번역 부재 탓

약골 지식사회는 번역 부재 탓
우리 사회에서 번역의 문제는 단순히 오역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해당언어의 숙련자 부족이라는 기초적인 문제부터 학제간 연구 미비로 인한 번역 불능 사태, 학계 전반에 깔린 번역 경시 풍조, 번역은커녕 원서 읽기를 학문 자체로 혼동하는 일부 학자들의 원전지상주의 혹은 원전신비주의, 고전 번역물의 출판을 기피하는 열악한 출판환경, 고전에 대한 안목을 갖춘 전문 편집인 부재까지 번역이라는 창을 통해 우리의 빈약한 지적 풍토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주부 이경숙씨가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을 펴냄으로써 촉발된 ‘도올논쟁’은 우리 사회에 번역과 해석의 의미를 되짚게 하는 계기가 됐다. 도올의 TV강연에 대해 “철학의 광신적 대중화”니 “유교적 군자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이 논어를 강의한다”는 식의 인물비평을 걷어내고 나면, ‘논어’나 ‘도덕경’과 같은 동양고전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학문적 논쟁만 남는다.

진행중인 논쟁의 내용에 관계없이 김용옥씨는 일찍이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84년에 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번역을 토대로 하지 않은 모든 지적 활동은 공중누각에 불과하다. 제아무리 훌륭한 논문을 썼다 하더라도 관계된 고전의 번역 없이는 그 논문의 아이디어는 우리문화 속에 축적돼 가지 아니한다. 그것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없기 때문이다”며 번역 예찬론을 펼쳤다. 그는 같은 책에서 “제아무리 영어 도사들이 대거 속출해도 그들이 유려한 우리말로 그들의 학식을 표현할 수 없는 한 그들은 우리 문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단적으로, 우리말 번역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학자는 학자도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거꾸로 자신의 번역 때문에 구설에 오른 것이다. 김용옥씨의 고전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 이경숙씨는 한 신문칼럼에서 “도올의 실패는 기존의 번역들이 잘못되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것에 기초해 새로운 해석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며 김용옥씨도 잘못된 번역서의 피해자라고 했다. 그리고 “고전은 원전을 그대로 읽어야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참뜻을 알 수 있다”며 모르는 한자는 옥편을 뒤져가며 차라리 직접 읽기를 권했다.

그러나 이경숙씨의 번역 역시 성태용 교수(건국대 철학과)나 박현씨(한국학연구소장)에 의해 각각 “자의적 해석의 남발” “번역의 자유가 넘치는 개그수필“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정본이라 할 번역이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고전번역이 오역을 남발할 수도 있음을 꼬집은 대목이다.



어쨌든 도올논쟁은 모처럼 우리사회에 ‘번역’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번역의 문제는 단순히 오역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해당언어의 숙련자 부족이라는 기초적인 문제부터 학제간 연구 미비로 인한 번역 불능 사태, 학계 전반에 깔린 번역 경시 풍조, 번역은커녕 원서 읽기를 학문 자체로 혼동하는 일부 학자들의 원전지상주의 혹은 원전신비주의, 고전 번역물의 출판을 기피하는 열악한 출판환경, 고전에 대한 안목을 갖춘 전문 편집인 부재까지 번역이라는 창을 통해 우리의 빈약한 지적 풍토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94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까치 펴냄)을 번역한 서강대 강정인 교수(정치학)는 자신의 번역본에 대해 “라틴어에 능통하고 정치사상가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도 정통한 번역자가 나타날 때까지 잠정적이고 과도기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스스로 평가절하한 적이 있다. 그 이전에 번역된 ‘군주론’의 문제점들―현대적 감각에 맞지 않는 문체와 수많은 오역과 생략―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번역에 나섰지만 라틴어로 된 ‘군주론’의 원전 해독 능력이 없어 영역본을 텍스트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중오역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고백이다.

대우학술총서를 출간하고 있는 아카넷의 정연재 학술사업팀장은 “번역에 들어간 학술총서 중 출판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 올해만 3, 4건”이라고 말한다. 원인을 보면 대부분 역자 스스로 역량부족을 인정하고 자진해서 포기한 경우다. 고전번역은 단지 언어능력만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99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가 쓴 ‘헤르메스’(민음사 펴냄)를 번역한 이규현씨(서울대 불문과 강사)는 “세르의 저서는 과학과 철학, 문학, 신화를 넘나드는 학문의 백화점”이라는 말로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고전 번역에 뜻을 두고 있는 출판사들도 막상 번역의 적임자 선정에 애를 먹고 있다. 동서양 고전을 총망라하겠다는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한길사의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목록 중 역자를 찾지 못해 출간이 미뤄지는 책들이 적지 않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인이자 사상가인 이탁오의 문집 ‘분서’(焚書)는 한길그레이트북스 출발 당시부터 목록에 있었지만 역자를 찾지 못해 발을 구르다 겨우 적임자를 만났다. 현재 대전 한밭대 김혜경 교수(중문학)가 5년째 작업중이다.

김교수는 “우리 학계에는 이탁오라는 사람의 이름만 알려져 있지 그의 저술이 번역된 적이 없다. 그만큼 문-사-철을 넘나드는 이탁오의 사상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석사 때 관련논문을 썼다는 이유로 역자가 됐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고사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했다. 또 김교수는 “우리 학계에서는 고전 번역의 경우도 이미 나와 있는 책만 손을 대려 하지, 초역은 기피하는 분위기”라고 꼬집었다. 실제 외국문학의 경우 상업적 가치가 있는 ‘어린왕자’의 경우 80종이 넘고 ‘데미안’은 50종, ‘좁은문’ ‘제인에어’ 도 30~40종씩 되지만 60~70년대 번역된 것을 수정, 증보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막상 제대로 된 번역을 찾기 힘들다는 평가다.

또 지금까지 우리의 번역물은 고전이든 문학이든, 대부분 일본 것을 중역(重譯)했다. 한길그레이트북스나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 중역을 피하고 원전 번역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불과 5, 6년 전의 일. 우리나라에 본격 번역문화가 뿌리내린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중역에 의존하다 보니 번역에 대한 학자들의 인식이, 김용옥씨의 표현을 빌리면 “일본놈들 것이나 베끼는 짓”으로 경시됐다. 번역을 경시, 혹은 기피하는 풍조는 표절과 원서독점주의, 원서 신비주의로 이어진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법대)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완역한 뒤 역자후기에서 한국의 천박한 번역풍토와 학문의 단절 문제를 개탄했다.

“한국의 대가들은 자기만이 읽는 원서를(소위 대가일수록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는다) 혼자 읽다가(읽었다고 한다) 죽는다. 그리고 그 제자는 다시 그 책을 사기 위해 돈을 짜내야 하고, 그것을 읽기 위해 수년간 외국어 공부를 하며, 그러다가 죽는다. 그 결과 한국에는 두세 명의 원서주의 대가는 나오는지 모르지만, 외국어를 잘 모르는 수십만 명의 대학생들이 쉽고 빨리 읽을 수 있는 번역서를 책임있게 내는 중-소가는 없다. 논문에 원서가 인용되는 경우,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구별할 사람도 없다. 모두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박교수는 “번역은 학문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말과 함께 “모든 원서와 원전의 공개, 그리고 학자들의 책임 있는 번역”을 주장했다. 이것이 11년 전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고전 내지 학술서의 번역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을 무조건 학자들의 탓으로 돌릴 일도 아니다. 우선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4, 5년은 족히 걸리는 고전번역을 대학측이 교수의 연구업적으로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큰 이유다. 번역은 기능적인 작업이지 연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인정하는 대학도 논문 한 편 수준이나 그 이하의 점수를 매기기 때문에 당장 ‘업적평가’에 목매 있는 교수들이 번역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

김용옥씨는 번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한 학자의 학문적 성취를 평가하는 데 번역을 제일업적으로 인정하며, 특히 고전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동양학 부문에서 석사-박사학위 논문은 가급적 번역 위주로 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일부 연구자들이 공부 삼아 완역을 한다 해도 출판할 길이 막막하다. ‘분서’를 번역중인 김혜경 교수는 10년 전 중국괴담집 ‘요재지이’의 번역에 착수해 초역을 끝낸 상태지만 선뜻 출판을 약속해주는 곳이 없었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완역출간을 꺼리고 2, 3권짜리 다이제스트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역자에게 돈을 내고 출판하라는 곳까지 있었다.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 번역에 10년을 바친 박상익 교수(우석대 서양사)는 자료구입비와 현지조사 등으로 1000만원이 넘는 비용을 쓰고도 번역료는 한 푼도 못 건졌다. 출판사와 1000부가 넘어갈 때부터 인세로 번역료를 받기로 계약했으나 2년이 넘도록 판매가 1000부에도 못 미쳤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고전의 1차 수요자가 돼야 할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이 구입보다는 출판사나 저자에게 ‘기증’을 요구하는 풍토도 한몫한다. 결국 “도서관에 가도 꼭 필요한 책은 없다”는 불평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인문학의 위기’는 오히려 인문학의 기초부터 다시 다져보자는 반성의 계기가 됐다. 즉 시대를 초월한 고전 연구와 번역, 고전 읽기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번역지원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98년 말부터 연간 8억원의 예산을 들여 ‘동서양 학술명저 번역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학술진흥재단은 4월 말경 대전대 진석용 교수(서양철학)의 번역으로 프랜시스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한길사 펴냄)을 출간한다. 학술진흥재단은 번역자에게 2000만~3500만원에 달하는 파격적인 연구비 지원 외에도 초판 800~1000부 중 일정량을 직접 구입해, 주요 기관에 배치토록 하는 등 그간 고전출판의 걸림돌이 되어온 유통의 문제까지 배려했다.

학술진흥재단의 번역이 동양 쪽에 비중을 두는 반면, 대우재단의 ‘대우고전총서’는 모두 서양고전 번역물로 올 가을부터 출간될 예정이다. 대산문화재단은 99년부터 유일하게 학술서가 아닌 문학작품의 번역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4월 경 대산세계문학총서라는 이름으로 출판이 시작된다.

이들 번역지원 사업의 특징은 국내 최초로 ‘번역의 질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학술진흥재단은 중간평가제를 도입해 번역이 50% 정도 진행됐을 때와 완역된 뒤 두 차례 심사를 하며, 특히 최종평가에서는 문장 하나하나 비교 검토할 만큼 질 관리에 역점을 두고 있다. 대우재단측은 번역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외국 출판물과 판본경쟁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역자 주석과 해제, 저자 연보 등에 신경을 쓰고 있다. 대산문화재단은 해당 언어권의 중진 교수가 원문과 대조하고 최종적으로 제3자 리뷰제를 도입하는 등 이중 삼중의 질 관리를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사이언스 북스 펴냄)가 국내에서 출간되자 서울대 최재천 교수(생물학)는 “너무 늦었다”고 했다. 이미 20년 전에 번역됐어야 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덧붙여 “어쩌면 번역이 너무 늦었다고 한탄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책이 20년 전에 번역되어 나왔더라면 이해는커녕 아무도 읽으려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번역이 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할 척도라고 할 때 우리에게 번역의 시대는 분명 너무 늦게 찾아왔다.





주간동아 2001.04.12 279호 (p62~64)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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