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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舊券은 움직인다?

거래 추진한 사채업자 “틀림없이 봤다”… 큰손들, 뭉칫돈 ‘은밀한 유통’ 확신

  •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그래도 舊券은 움직인다?

그래도 舊券은 움직인다?
구권(舊券). 1994년 이전 한국은행권을 통칭하는 말이다. 중간에 은색 점선이 없고 다소 크다는 점에서 현재 사용되는 1만원권과 확연히 구분된다. 물론 구권은 합법적으로 유통 가능한 화폐다.

구권을 둘러싼 소문이 서울시내 사채시장에서 나돌기 시작한 것은 지난 99년부터. 1조∼수십조원 대의 구권 지폐를 보관하고 있다는 누군가가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파격적 덤핑조건으로 현 화폐와 교환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2000년 3월, 4월, 6월, 2001년 1월 등 구권 교환을 미끼로 한 사기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지난 1월25일 구권 사기범들을 구속 기소한 검찰은 종지부를 찍듯 “금융기관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거액의 구권이 신권으로 교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십조원의 구권이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검찰의 ‘선언’대로 구권은 정말 실체가 없는 허구일까. 서울의 ‘지하경제’를 움직이는 ‘큰손’들도 검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을까.

“바꿔 달라” 1월 솔깃한 제의 받아

그래도 舊券은 움직인다?
2월9일 오후 서울 종로 Y다방에서 기자는 부동산컨설팅 사업자 김모씨와 함께 ‘조사장’이라 불리는 60대 사채업자를 만났다. 김씨가 구권 교환 등 여러 가지 사업아이템을 조씨에게 설명하는 자리였다. 기자는 구권 문제 취재과정에서 만난 김씨의 사전 허락을 얻어 동석하게 됐다. 이 두 사람은 몇 차례 부동산투자 사업을 진행하며 서로에게 상당한 신뢰를 갖고 있었는데 기자는 김씨의 사업파트너로 조씨에게 소개됐다.



조사장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분위기의 서울 사채시장에서도 ‘베일 속 인물’로 통한다. 그는 기자에게 “나를 이렇게 한 번 만에 만났으니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쪽 세계에도 ‘단계’가 있다. 나는 최고 단계 바로 아래다. 적어도 10여명 정도는 거쳐야 나와 전화통화라도 가능하다.”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종로의 몇몇 사채업자들을 통해 금세 확인됐다. 사채업자들은 굴리는 사채 규모에 따라 대략 10억 미만, 50억 미만, 100억 이상 급으로 나눈다. ‘전주’ 김모씨는 서울의 100억 이상 전주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김씨가 주무르는 돈은 1조원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김씨는 종로, 을지로를 중심으로 한 강북지역 사채운용은 조사장에게 맡기고 강남역 일대를 거점으로 한 강남라인은 ‘Q장군’으로 통하는 인물에게 맡기고 있다. 이 두 사람만이 전주 김씨와 직접 대화하며 수시로 김씨의 지시를 받는다. 조사장 밑에는 다시 수십 여명의 군소 사채업자들이 계보를 형성하며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전주 김씨는 사채시장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억원대 소액 거래는 군소 사채업자들이 맡고, 규모가 큰 거래는 조사장이 대행한다. 따라서 조사장의 말이나 행동은 큰손 김씨의 의중과 거의 일치하는 셈이다.

수익의 배분방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사채 100억원을 빌려주면 수수료와 선이자를 포함해 10억원 이상의 이익이 생긴다. 이익금의 70%는 전주가 갖고 15%는 조사장이 받게 된다.

김씨가 최근 조사장에게 하명한 ‘기획사업’은 ‘CD(양도성예금증서) 수집’이다. 김씨의 말에 따라 조씨는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CD를 무조건 끌어 모으고 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지난 1월 말 솔깃한 제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거래상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종로 사채시장에서 꽤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구권을 현금으로 바꿔달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CD를 모으는 지렛대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조사장) 그에 따르면 명동, 강남역 일대 사채업자 중 현금으로 환전되기를 원하는 거액의 구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조사장은 “상대편에서 최종적으로 빠레뜨 세 개를 빠레뜨 두 개와 바꾸자고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빠레뜨’는 사채업자들이 흔히 쓰는 은어다. 이 말은 지게차에 물건을 실을 때 그 밑을 받치는 나무판자를 뜻한다고 한다. “한국조폐공사에서 막 찍어낸 현금다발을 지게차가 한 번에 30억원씩 실어 나른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다. 빠레뜨 한 개는 30억원을 뜻한다. 그것은 서울 사채시장의 큰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단위일 뿐이다.”(부동산 컨설팅 사업자 김씨)

구권 90억원을 현금 60억원과 바꾸자는 제의를 받은 조사장은 “대신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고 말했다. 그 거래와는 별도로 그 정도 액수의 CD를 자신에게 팔아달라는 것이 조씨의 첫번째 요구였다. 상대방은 이를 수락했다. 두번째 조건은 거래장소. 조씨는 “나는 서울 강북지역 한 은행 지점의 VIP 고객이다. 그 은행 지점장은 내게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며 나에 관한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거래는 그 은행지점에서 지점장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하자”고 말했다. 상대방은 이 제의도 받아들였다고 한다.

구권을 사고팔 때 ‘본 거래’ 전 ‘맛보기’ 형식의 소액거래가 이뤄진다는 얘기는 매스컴에서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다. 조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씨는 우선 구권 1억원어치와 1억원짜리 CD 3장을 현금으로 사기로 하고 1월 말 약속장소에 나갔다. 상대편은 1만원권으로 5000만원이 들어 있는 큰 가방을 조씨에게 열어 보였다. 조씨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폐를 꺼내 꼼꼼히 살폈다. 사채시장에서 수십 년 몸담은 경험으로 볼 때 위폐는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쪽의 신분으로 봐서도 위폐를 내놓을 가능성은 없었다. 1만원권 중간의 은색 점선도 없었다. 5000장은 모두 구권이 분명했다.” 상대방은 “우리 측에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우선 오늘은 5000만원만 거래하자. 나머지 5000만원과 CD 3장은 내일 같은 장소로 갖고 나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씨는 현장에서 휴대폰으로 전주 김씨에게 상황을 알렸다. 김씨는 “5000만원이 구권이 분명하다고는 하지만 당초 약속을 특별한 이유없이 상대방 측에서 어겼다. 우리는 CD가 더 큰 목적인데 내일 그쪽에서 CD를 갖고 오겠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며 거래중단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거래는 결렬됐다. 조씨는 “막판에 일이 성사되지 않아 아쉽다. 그러나 언제든지 거래는 다시 이뤄질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목격했듯 구권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부동산컨설팅 사업자 김씨는 빠레뜨 30개까지 연결해줄 수 있다는 강남역 부근의 ‘구권 브로커’ 이모씨를 만날 의향이 없느냐고 조씨의 의사를 타진했다. 조씨는 김씨의 제의에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다. 김씨는 “구권거래에 관한 소문들은 사채시장에서 많이 떠돈다. 대부분 사기다. 구권을 팔려는 측은 아무하고나 상대하지 않는다. 통장잔액증명(이를 사채시장에선 ‘자금표’라고 부른다)을 받아본 뒤 거래가 성사되기 직전에야 구권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씨 정도면 얘기가 다르다. 거래상대가 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구권의 존재를 입증할 물증은 아직 어디에도 나온 바 없다. 한국은행 등 금융기관들은 소문과 같은 엄청난 양의 지폐가 90년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잠겨 있다는 시나리오는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무슨 근거에서인지 서울의 큰손들은 구권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



주간동아 2001.02.22 272호 (p44~45)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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