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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계약’은 현대판 노비 문서?

신인가수들에 불리한 경우 많아 잇단 잡음…기획사들 “위험한 투자인 만큼 불가피”

‘전속계약’은 현대판 노비 문서?

‘전속계약’은 현대판 노비 문서?
아침 8시 반까지 영어회화 수업, 이어서 낮 12시까지 보디 트레이닝과 탭댄스, 오후 1시부터 4시까지의 노래연습과 화술 및 매너 특강 등 저녁 8시까지 이어지는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스타 탄생’의 길을 걷고 있는 가수 지망생 S양.

중-고교 시절부터 학교 밴드를 조직해 음악활동을 해온 그녀의 노래실력이 한 음반기획사 매니저의 눈에 띄어 ‘헌팅’된 것이 작년 11월의 일. 기획사는 외모에서 조금 달린다 싶은 그녀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먼저 코 성형 및 가슴 확대 수술비로 700여만원을 투자했다. 그리고 세계무대를 대상으로 한다는 야심찬 계획과 함께 영어회화부터 댄스 및 무대 매너 과정을 통해서 그녀를 철저하게 ‘가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성형수술비를 비롯한 사전 제작비에 이어 추가로 필요한 음반 제작비와 홍보비까지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상품으로 완성된 그녀가 정식으로 데뷔했을 때 과연 ‘히트 상품’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스타 만들기’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일단 터지면 ‘대박’인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의 슬롯머신 같은 머니게임이다.

음반기획사들은 이처럼 ‘돈이 되는’ 신인가수 발굴을 위한 모험에 기꺼이 나선다. 국내 1백여개가 넘는 가요기획사에는 하루에도 데모테이프가 수십개씩 쇄도하고 오디션을 받으려고 직접 찾아오는 청소년들도 부지기수다. 이들 중에서 감춰진 ‘진주’를 찾아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획사 쪽에서 직접 찾아다니는 쪽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편이다.

얼마 전까지 댄스가수를 찾아내는 방법으로 널리 알려졌던 것이 ‘물 좋다’는 서울 강남이나 이태원의 나이트클럽 순례. 개성 있는 외모와 빼어난 춤 실력을 갖춘 스타 재목을 선발하기 위해 매니저들이 직접 나이트클럽을 방문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강남역이나 압구정동은 물론, 중-고등학교 주변을 많이 찾는다. 특히 예술고등학교 주변은 필수 코스다. 어떤 매니저는 각 학교의 음악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음악성이 좋은 학생을 추천받기도 한다.



지방으로 원정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 각 기획사별로 지방을 나눠 괜찮은 ‘물건’을 찾는 것이다. 한때 큰 공급처였던 미국 교포들은 요즘 들어 많이 줄었다. 일부 매니저들은 아예 헌팅만 전문으로 맡기도 한다. 일단 가수 지망생을 뽑고 나면 1년 정도 수습 기간을 갖고 기초 발성부터 가르치는, 이른바 ‘스타 만들기’가 시작되고 음반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스타 만들기가 성공해 소위 대박을 터뜨리게 되면 가수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분쟁이 싹트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활동량과 인기도에 비해 정당한 이익배분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가수측의 입장과 아무것도 모르는 무명의 ‘생짜 신인’을 힘들게 키워낸 기획사측의 입장이 대립하는 것이다.

작년 한해 연예인 관련 소송 사건이 50여건을 넘어선 것도 이런 추세를 반영한다. 대표적인 예로 그룹 ‘한스밴드’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밴드의 세 자매는 1, 2집의 히트에도 불구하고 생활보호대상자로 살아가는 등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소속사인 ‘예당음향’을 고소했지만, 기각되어 현재 활동 중단에 들어간 상태다. 이들은 계약서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계약했고 결국 그것이 기각의 이유가 되고 말았다.

당시 그들의 계약서 내용에 대해 사람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노예계약”이라며 흥분했지만 음반기획자들은 “신인 그룹이 하나 등장해서 성공을 거둘 가능성은 1000분의 1도 안 된다. 1, 2억원의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음반 제작비와 그 이상의 홍보비를 감수해야 하는 기획사들이 신인에게 할 수 있는 대우는 실패 위험성까지 감안한 것이므로 다소 부당할 수밖에 없다”는 해명이다.

음반기획사와 가수 사이의 마찰과 송사들은 본질적으로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후진적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신인들은 수많은 소규모 공연장에서의 라이브 공연과 싱글 음반(1∼4곡이 수록된 미니 음반) 발매를 통해 ‘검증’받은 뒤 메이저 음반사에서 정규 앨범을 낸다. 따라서 대부분의 가수들이 활동을 시작하고 평균 2년 이상 지난 후에야 정규 앨범을 내게 되므로 어느 정도 실력에 맞는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국 가요계에서 신인들은 대중적인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규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음반기획 및 제작자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데이터가 부족한 상태에서 자신의 ‘감’(感)에만 의존해서 거액을 투자해야 하는 실정이다. 한 음반기획사의 매니저 J씨의 말이다.

“곡 비용이 1곡당 200, 300만원, 유명 인기작곡가에게 타이틀곡을 의뢰할 경우 수천만원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돈을 들이려고 치면 한 앨범에 작곡비만 5000만원에서 1억원까지도 갈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작사료도 곡당 70∼100만원 정도, 또 녹음실 비용이 1프로(3시간30분)당 40, 50만원인데, 대개 100프로 정도는 소요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나옵니다. 여기에 녹음기사(엔지니어)에게도 1프로당 몇 만원씩 줘야 하죠. 그리고 재킷 사진에 200∼500만원, 코디네이터 비용, 여기에 뮤직 비디오까지 만들려면 몇억원이 든다는 얘기예요. 물론 싸게 대충 만들면 5000만원 정도로도 가능은 하지만 그게 어디 ‘천우신조’가 아닌 이상 되겠습니까.”

여기에 보통 홍보비는 제작비와 맞먹는 금액 이상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기본 룰이다. 이렇게 엄청난 비용이 투입된 앨범은 시중에서 약 8∼10만장 정도가 팔려야 손익분기점에 겨우 다다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고가의 뮤직비디오를 만들 경우라면 댄스 그룹은 20만장, 솔로는 10∼15만장은 팔려야 간신히 손해를 면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앨범은 기껏해야 1∼3만장 수준도 넘기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모처럼 심혈을 기울여 무명의 신인을 스타로 만들어 놓으면 어느 날 갑자기 좀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다른 기획사로 훌쩍 떠나버리곤 해서 그동안의 공이 물거품이 돼버리는 사례도 왕왕 있다는 것이다.

경력 10년차에 들어가는 한 중견 매니저 K씨는 “오로지 ‘감’ 하나만 믿고 거금을 투자해 겨우 ‘물건’ 하나 만들어 놓았더니 의리를 저버리고 돈 따라 다른 매니저와 계약하는 바람에 철천지 원수가 된 가수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매니저 L씨도 불평등 전속계약 문제에 대해 “PD와의 술자리 비용 등 수천만원을 투자한 연예인이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처”라고 항변했다.

이같은 사정으로 가수와 음반기획사의 전속계약서는 ‘노비 문서’로 불릴 만큼 신인가수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대부분의 계약서가 3∼5년의 장기 계약이기 때문에 소속사의 대우가 불만족스러워도 일정기간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참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가수의 경우 대부분 수입의 절반이 기획사 및 매니저의 몫이고 모든 연예활동의 출연 및 출연료에 대한 결정권도 기획사에 있으며, 심지어 기획사 및 매니저의 승인 없이는 개인적 판단과 행동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다.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해도 정작 본인은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계약서에 얽매어 옴쭉달싹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배경이다.

지난 5월 공식 해체를 선언한 6인조 인기 댄스그룹 ‘젝스키스’의 경우도 해체 이유가 젝스키스 멤버들이 소속사를 상대로 불만을 표시하면서 촉발되었다는 소문이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데뷔 후 계약서 없이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수익 분배에서 피해를 보았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사실 신인가수와 음반기획사의 계약과정에서 구체적인 ‘정답’을 제시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가수와 기획사 사이의 일률적이고 공정한 이익 분배비율을 규정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음반기획사와 가수 모두에게 사전 계약사항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구체적인 합의, 그리고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느 한쪽을 약자로 삼는 불공정 계약이 아니라 기본적인 상도의에 근거한 투명하고 공정한 계약을 전제로 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주간동아 2000.08.24 248호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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