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7

2016.05.11

커버스토리 | 트럼프 쇼크

Yankee Goes Home?

가상 시나리오 ‘미국 빠진 2020년 동북아’, 한국의 선택은…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6-05-10 10: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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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년 11월 8일 운명의 미국 대통령선거일 저녁. 곧 새 주인을 맞이할 백악관 인근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얼굴에 나치 문양을 합성한 플래카드를 내건 항의 시위대와 ‘America First!(미국 제일!)’ 피켓을 앞세운 지지 시위대가 충돌했다. 유혈이 낭자한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의 풍경은 처참했지만, 선거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은 트럼프의 대승. 주(州)별 선거인단 집계 상황판, 로스앤젤레스에서부터 뉴욕까지 미국 전역을 뒤덮은 붉은색(공화당 상징 컬러) 물결은 말 그대로 ‘역사의 대세’처럼 보였다. ‘우리 세금은 우리를 위해!’라는 구호가 모든 거리를 가득 메웠다.

    맨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워싱턴의 외교안보 분야 주요 싱크탱크. 선거 기간에는 트럼프의 대외정책이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했던 이들은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미국의 독트린’을 채워 넣을 보고서를 앞다퉈 발표했다. 핵심은 하나, 해외 주둔 미군에 투입되는 예산을 최소화하고 주요 동맹국의 부담을 늘릴 수 있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무엇인가. 보고서마다 등장하는 ‘압박 대상’에는 어김없이 한국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12월 하순,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기능이 중복되므로 통합해야 한다’는 트럼프 당선인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내부 문서가 ‘뉴욕타임스’를 통해 공개됐다. 누가 봐도 의도적인 유출이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어떻게 구성될지 점치는 것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당장 그의 언급 가운데 상충되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 “미국의 세계 보안관 노릇은 끝났다”는 발언과 “미국의 결정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연설이 아무런 시차 없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유럽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리던 20세기 초반 고립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는 전망과, 조지 W 부시 행정부 식의 ‘횡포에 가까운 압박정책’이 주를 이룰 것이라는 시각이 전문가 사이에서도 혼재하는 이유다.

    반대로 가장 쉽게 의견이 일치되는 부분은 트럼프가 쏟아내는 말들이 실제로는 협상 기법일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봉영식 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그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협상은 일단 요구사항을 극단적으로 던져놓고 결국 차선을 얻어내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외교 무대에서는 흔히 윈윈(win-win)을 최고라고 말하지만, 그의 인생을 관통해온 비즈니스 협상에서 상대 처지를 배려하는 미덕 따위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간 쏟아낸 트럼프의 동맹 관련 발언을 요약하자면 ‘돈을 내라(Pay Us)’다.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를 누리면서 경제발전을 구가해온 나라들이 ‘무임승차(Free Riding)’ 하는 꼴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 한국을 비롯한 주요 동맹국이 실제로는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져왔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는다. 더 받아낼 여지가 있다면 받아내는 게 트럼프 식이다. 주한미군 철수 같은 극단적 발언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최악을 피할 수 없다’는 기선잡기용 카드다. 뒤집어 말해 각 동맹국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관련 정책도 극과 극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선언. 선택을 강요받는 처지에서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전제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고유의 대외정책을 현실로 만들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 당장 의회와 군부, 외교 관료, 싱크탱크와 전문가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해관계가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책 프로세스에 정통한 인사들이 “최악의 상황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며 조심스러운 낙관론을 펼치는 근거다. 여기에 취임 후에도 정책 검토에 상당한 시간을 들이곤 하던 미국 새 행정부의 패턴을 감안할 때 트럼프 백악관의 동아시아 정책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려면 2017년 여름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이 시간이야말로 한국이 최소한의 이익이라도 관철해내려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의 창’이라는 의미다.



    공교롭게도, 2017년 한국 대선

    #2 “외교 관례에도 전혀 맞지 않는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건 동맹이 아니라 굴종입니다.” “다른 선택지가 있습니까. 한국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사고해야 합니다.” 2017년 8월 막 불붙기 시작한 한국 대통령선거전,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나온 주요 정당 예비후보 간 가장 첨예한 쟁점은 단연 한미동맹 문제였다.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하고 나온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재협상 문제가 그 관건이었고, 2018년까지 유효 기간이 남아 있는 9차 협정을 백지화하고 다시 산정해야 한다는 백악관의 선제 압박이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변. 8월 말 실시된 새누리당 대선 경선 대구·경북지역 투표 결과는 ‘차제에 핵무장을!’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후보의 깜짝 1위 등극이었다. 여전히 ‘요구를 들어주더라도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던 당내에서는 물론, 언론과 정치분석가들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결과였다.

    가장 당혹스러운 쪽은 여권의 ‘대미(對美) 맹종적 태도’를 비판하며 승부수를 띄우려 했던 야권 정당들. ‘동북아 균형자론 부활’ ‘중국과의 연계 강화를 통한 협상력 확보’ 같은 구호는 ‘독자 핵무장’ 다섯 글자 앞에서 한가해 보일 따름이었다. “한국판 트럼프 현상일 뿐”이라는 일축도 ‘약발’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든 바로 그 포퓰리즘 전략으로 미국 대통령이 바뀌었으므로.


    트럼프 쇼크와 관련해 우리에게 가장 공교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그가 집권할 경우 동아시아 정책이 가시화할 시점이 한국 대선 일정과 고스란히 겹친다는 사실이다. 워싱턴발(發) 동맹 이슈는 어떤 식으로든 대선 과정에서 쟁점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고, 이는 단순히 주한미군 문제가 아니라 안보정책 전체를 둘러싼 논쟁으로 발전할 개연성이 높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경제 이슈까지 결합하면 ‘트럼프 변수’가 2017년 한국 대선의 결정적 변수로 뛰어오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트럼프 백악관의 동아시아 정책은 고정불변의 상수가 아니라 다양한 조건에 따라 양상이 변할 수 있다. 한국 대선과정에서 벌어질 논쟁의 흐름과 결과, 정확히는 누가 2018년 이후 청와대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변화 폭이 달라질 것이라는 의미다. 극단적으로는 새 정부가 트럼프 백악관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한미동맹 틀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생각해볼 수 있는 한국의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 △분담금 증액 등 경제 부담을 늘려서라도 한미동맹 틀을 유지·강화하는 방안 △‘여차하면 중국과 관계를 강화할 수 있다’는 신호를 반복함으로써 미국의 압박을 무력화하는 방안 △강대국에 기대는 정책 대신 독자적 외교 공간을 넓혀나가야 한다는 주장 등이다. 첫 번째 방안과 두 번째 방안의 결정적인 큰 갈림길은 한미일 삼각동맹 구도의 강화 여부에 있다. 첫 번째 방안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 등 한일관계 개선이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등으로 이어지지만, 두 번째 방안은 이들 이슈를 모두 미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 정작 문제는 세 번째다. 익명을 요청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의 말이다.

    “당장은 첫 번째 방안이 지금의 여권과,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방안이 야권과 친화력이 높아 보이지만 세 번째 방안이 독자 핵무장 주장과 이어진다면 보수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상당한 호소력을 얻을 공산이 있다. 더욱이 이러한 주장이 민족주의 정서와 결합한다면 야권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만만찮은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트럼프 쇼크가 2017년 이후 한국에 던지는 선택지는 ‘중국’과 ‘핵무장’이 된다.”

    만약 미국 측 요구로 한미일 삼각동맹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한일관계 개선 문제가 급물살을 탄다면, 예컨대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 논의가 현실화된다면 ‘부담을 늘려서라도 동맹을 유지·강화해야 한다’는 첫 번째 방안이 힘을 잃게 만드는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전통적 동맹론 처지에서는 가장 우려할 만한 상황 전개다.



    일본은 먼저 움직일 것이다

    #3 사진 속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소는 더는 밝을 수 없었다. 2018년 2월 주일미군 방위비분담금 재협상을 한 달 남짓 만에 신속히 결론지은 두 나라는, 통상 주일본미국대사와 외무상이 서명하던 협정문을 대통령과 총리가 직접 마무리하는 파격을 연출했다. 트럼프 임기 시작 1년 만에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고, 그가 태평양을 건너 도쿄를 직접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재협상 결과의 핵심은 주일미군 주둔 비용의 90%를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는 것. 주일미군사령부의 사업 예산을 세목별로 승인해 일본 정부가 직접 지출하던 이제까지의 ‘깐깐한 방식’ 역시 전액을 한꺼번에 미국 측에 넘겨주는 형식으로 변경했다. 이에 일본 측이 얻은 대가는 ‘사상 최강의 전투기’라는 F-22 스텔스기 등 주요 전략무기의 대일(對日) 판매  승인. 미국 국방예산 감축이 본격화하면서 대형 무기개발 프로젝트가 줄줄이 흔들려 위기를 맞은 미국의 메이저 군수업체들로서는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 등 다른 동맹국에게 일본의 결단이 중요한 교훈이 되리라 믿는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공교로운 것은 일정이었다. 헌법 개정을 묻는 일본 국민투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상황. 핵심은 자위대를 자위군으로 재편해 해외활동을 가능케 하는 이른바 ‘평화헌법 제9조’ 폐기 문제였다. 2016년 7월 치른 참의원 선거를 통해 개헌 선을 훌쩍 넘는 175석을 확보한 아베 총리는, 공언해온 대로 헌법 개정 문제에 전력을 기울여 해가 바뀌자마자 중의원, 참의원 통과를 마무리 짓는 기염을 토한다. 미·일 정상회담 당일 ‘아사히신문’은 ‘트럼프 행정부와 아베 내각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진행되는 일본의 보통국가화는 동북아를 갈등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며 날 선 사설을 실었지만 반향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이다.


    한미동맹 이슈가 복잡해지는 구조적 원인 가운데 하나는 미·일동맹의 존재다. 아베 내각이 개헌을 통해 이른바 보통국가화를 달성하려는 로드맵을 완성해둔 상태임은 잘 알려진 사실. 동맹정책에 대한 트럼프 후보의 주요 발언이 알려지면서 일본 언론과 정치권 역시 염려하는 목소리가 적잖지만, 다수 전문가는 이를 계기로 일본의 재무장이 탄력받을 공산도 높다고 말한다. 당장은 늘어나는 경제적 부담을 염려하는 듯해도, 현실이 되고 나면 아베 총리가 먼저 나서서 미·일 두 나라의 안보이익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방안을 적극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경우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한국에 대한 압박수단으로 삼으리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당장 지금만 놓고 봐도 일본과 한국을 가리지 않고 압박하던 트럼프 후보는 최근 들어 무게중심을 한국으로 옮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일본은 결국에는 워싱턴이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대상이지만, 한국은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졌다고 인식했으나, 트럼프는 일본만을 우군 삼아 아시아 전략을 운용하는 ‘경제적인 방식’을 고민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의 선택이 엇갈릴 경우 미국이 꺼내 들 수 있는 그림 가운데 하나는 주한미군을 상징적인 수준으로만 남기고 전력과 기능을 대부분 주일미군사령부로 이전하는 방식이다. 대중(對中) 전략 차원에서 보면 주일미군을 본진으로, 주한미군은 최전방 초소 정도로만 활용하는 구조다. 봉영식 위원은 “이 경우 사드 논쟁 등 주요 이슈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고, 트럼프 후보의 그간 발언을 감안하면 중국 견제의 중요성 등을 이유로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건 낭비라고 판단할 공산이 크다”고 말한다.

    워싱턴의 동아시아 전략이 일본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면 한국의 핵무장 문제 역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한배를 타기로 한 일본에 비교우위를 선사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한국만 핵을 보유하는 상황을 지켜볼 리 없다는 것. 주한미군을 사실상 철수하면서도 핵무장은 저지하려 시도할 개연성도 충분하다. 트럼프의 ‘핵무장 용인’ 발언에 섣불리 무게를 실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2020년이 의미심장한 이유

    #4 2020년 4월 15일 남태평양. 이스터 섬과 갈라파고스 섬 사이 엄청난 넓이의 빈 바다에 섬광이 피어올랐다. 북한 원산 인근에서 발사된 KN-18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일본 열도를 넘어 하와이를 지나 이 바다 상공에서 증폭형 핵폭발을 일으킨 것. 그날 저녁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참관 아래 이동식 발사대차량(TEL)에 실린 이 고체연료 미사일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각도를 조금만 틀면 고스란히 워싱턴에 닿는 궤적은 평양이 미 본토에 핵 타격을 가할 능력을 확보했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였다. 중거리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장착할 3000t급 잠수함 완성품을 공개한 지 닷새 뒤의 일. 군사위성 등 미군의 압도적인 정찰자산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무기체계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응 논의가 한창이던 5월 초, 유엔주재 한국대표부는 중국 대사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받는다. 별도 테이블에서 진행될 평화협정 논의에 한국을 직접 당사국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주면 북한 핵 개발 중단을 위한 6자회담 재개에 찬성하겠느냐는 제의였다. 한국이 돌아선다면 ‘현실화된 위협’을 실감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 역시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상황. 5개월 전 한중 정상회담 석상에서 은밀히 전달된, ‘미국이 한반도에서 빠진다면 통일 문제에서 한국을 전폭 지지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가 구체화되는 첫 수순이었다.

    “주한미군이 유명무실해진 지금 한국에게 미국이 무슨 의미가 있나. 아직도 핵 야망을 버리지 못하는 평양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큰 부담이다. 한국이 비핵국가로 남고 명목만 남은 한미동맹을 폐기한다면, 한국 주도의 통일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늦은 밤 뉴욕 거리의 한 술집, 금테안경을 추어올리는 주유엔 중국대사의 말은 충격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아마도 역사의 한 페이지, 최소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되겠구나, 주유엔 한국대사는 속으로 되뇌며 침을 삼켰다.


    국제정치학의 기본 공리(公理) 가운데 하나는 ‘힘의 공백은 방치되지 않는다’는 명제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아시아에 투입되는 외교·군사적 자산을 줄인다면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힘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당연히 중국. 한미동맹 폐기와 주한미군 철수는 중국이 오랜 기간 내심 바랐던 사안이다. 트럼프의 떠들썩한 수사(修辭)가 베이징에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던 이유다.

    공교롭게도 트럼프 행정부의 첫 임기가 마무리되는 2020년은 국내외 전문가들이 북한의 ICBM과 SLBM 능력이 완성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트럼프 독트린’이 불러올 동북아 힘의 균형 변화와 북한의 ‘핵 강국’ 등극이 고스란히 겹치는 셈. 한 대기업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중국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을 넘어서는 시점도 대략 그 무렵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뻗어나가는 베이징의 자신감 역시 이 무렵이면 정점을 찍으리라는 뜻이다. 역시나 공교로운 일이다.

    이러한 흐름이 중국의 한반도 정책에 결정적 변경을 불러올 개연성은 차고 넘친다.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베이징은 미국의 ‘갈등적 패권’에 대비되는 ‘평화적 패권’을 강조하고 나설 공산이 크다”고 전망한다. 미·중 갈등의 주 전선(戰線)이 일본 열도 위로 그어진다면 이를 기회 삼아 한국은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기려 시도하리라는 시각이다. 예컨대 종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논의에서 국외자(局外者)였던 한국의 당사자 참여를 허용한다면 새로운 상황 전개의 신호탄이 될 만하다.



    고립주의와 ‘America First’의 괴리

    물론 그때마다 한국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미국이 어떻게 생각할지 딜레마에 빠질 공산이 크다. ‘미국을 떠나 중국에 붙으려 한다’는 워싱턴의 오랜 의구심에는 탄력이 붙을 테고, 중국의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커지는 상황이 우리에게 과연 유리한지 역시 논쟁적인 질문이다. “태평양은 충분히 넓다”며 신형대국관계를 주장해온 시진핑 국가주석의 말대로 트럼프 이후 동아시아 패권이 중국에게 넘어간다면, 한국의 ‘변심’은 미국의 패권이 스러진다는 결정적 시그널로 해석될 것이다.

    문제는 그 후다. 이러한 상황을 미국이 과연 좌시하려 할까. 서두에서 살펴본 트럼프 발언 속 고립주의와 ‘America First’의 괴리가 골치 아픈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동북아에 대한 기여는 줄이겠지만 결정권은 중국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이율배반은, 중국의 세력 확장을 막을 수 없으면서도 한국이 그에 딸려간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정서적 반발로 읽힐 뿐이다.

    가장 염려스러운 대목은 ‘섣부른 행보’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태도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느라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경쟁적으로 매달린다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몸값을 높이려던 한국의 전략은 막다른 골목을 피할 수 없다. 동맹의 조정과 재편은 민감하기 짝이 없는 이슈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 외교는 그리 세련된 실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못 된다 해도 그를 공화당 후보로 만든 미국의 민심 흐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뿌리 노릇을 한 ‘떠오르는 중국과 가라앉는 미국’이라는 세력 판도 변화도 달라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누가 백악관을 차지하든, 고민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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