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6

2016.05.04

박정배의 food in the city

서울의 감자탕

얼큰한 국물과 푸짐함에 추억이 솔솔~

  • 푸드칼럼니스트 whitesudal@naver.com

    입력2016-05-03 09: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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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 외식으로 감자탕만한 게 없다. 푸짐한 살코기, 얼큰한 국물, 보드라운 채소, 따뜻한 밥이 어우러진 이 환상적 음식을 싫어할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서민의 대표 외식으로 자리 잡은 감자탕은 그리 오래된 음식이 아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감자탕이 대중화된 시점은 1960년대 일본으로 돼지고기 정육 수출이 본격화된 이후로 추정된다. 일본으로 정육을 수출하고 남은 내장과 피는 당면순대로, 돼지발은 족발로, 돼지등뼈는 감자탕 주재료로 서민에게 사랑받았다. ‘감자탕’이란 말도 70년대 초반 등장한다.

    하지만 감자탕과 거의 같은 음식이 그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뼈다귓국은 감자탕의 조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음식이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감자탕에 들어가는 돼지등뼈에 살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감자탕은 등뼈 속에 든 골수를 빨아먹는 음식이었다. 감자탕은 뼈다귓국, 뼈해장국, 감잣국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초창기 감자탕이나 감잣국은 밥반찬이 아닌 술안주로 주로 먹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감자탕집인 서울 돈암동의 ‘태조감자국’은 1958년 문을 연 이래 줄곧 돈암제일시장에서 영업을 해오고 있다. 저렴한 돼지등뼈, 푸짐하고 싼 감자는 환상의 복식조처럼 가난한 이의 한 끼를 구원했다. 1960년대 당시 서울 중심가에서 비켜나 있던 영등포와 천호동, 돈암동 지역에서 감자탕 문화가 꽃을 피운 것도 그 때문이다. 감자탕은 당시 배고픈 서민의 그럭저럭 괜찮은 외식 밥상이자 술안주였다.

    1980년대 들어 감자탕이 전성기를 맞이한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80년대 중반부터 서울의 외식문화가 다양해지면서 서울 감자탕 문화는 급격히 하락한 반면, 경기 고양시 원당 지역과 부천시 인근을 중심으로 새로운 감자탕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이후 감자탕 외식업계는 개별 명가와 프랜차이즈 감자탕 집으로 양분된다.   

    서울 연남동 ‘송가네 감자탕’은 24시간 영업하는 감자탕집으로 유명하다. 국물 간이 적당하며, 고기는 퍽퍽하지 않고 부드럽다. 이 집이 유명해진 것은 택시기사와 화교들의 힘이 컸다. 저렴하고, 맛있고, 언제나, 빨리 먹을 수 있는 장점 덕에 택시기사들이 몰려들었고, 주변 중식당에서 일하는 화교 요리사들이 퇴근 후 술 한잔 할 수 있는 ‘송가네 감자탕’을 자주 찾았다. ‘목란’의 이연복, ‘진진’의 왕육성 같은 중식계 별들도 단골이었다. 이 집 감자탕은 신촌 술꾼들의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술국이자 해장국이었다.



    서울 종로6가 ‘방아다리감자국’도 서울 감자탕 명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등장한 이후 오전 11시부터 손님이 줄을 서고 오후 4시쯤이면 감잣국을 먹을 수 없을 정도지만, 여전히 맛은 변함없고 주인은 친절하다. 감잣국을 시키면 돼지등뼈와 함께 초창기 감자탕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던 우거지가 푸짐하게 나온다.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운 우거지에 국물이 잘 배어 있다. 주변 시장 상인들을 위한 소박한 밥집으로 시작해 명가 반열에 올랐다.

    감자탕은 1960년대 서울의 화석과도 같은 음식이다. 가난한 이의 속을 위로해주던 푸짐하고 부드러운 음식은 추억이 가진 힘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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