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의 심중일언

“조선 최고 성군은 세종, 인간 승리 드라마는 정조”

‘정조평전’ 펴낸 박현모 교수로부터 듣는 세종과 정조 비교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1-07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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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조선왕조 500년사를 읽다 보면 데칼코마니 같은 왕들을 발견하게 된다. 건국시조인 아비(태조)를 사실상 거세하고 형제들을 도륙한 태종과 아비(세종)의 유언을 짓밟고 형제는 물론 조카까지 살육한 세조가 그렇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양대 병란을 초래하고 그로 인한 정통성 콤플렉스로 후계자(광해군과 소현세자)를 끊임없이 학대한 선조와 인조도 닮은꼴이다. 조선 임금 가운데 유이(唯二)하게 묘호를 못 받아 폭군의 대명사가 돼버린 연산군과 광해군도 빼놓을 수 없다. 

    긍정적 유산을 공유한 왕도 있을까. 조선 최고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과 조선 후기 최고 전성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정조가 대표적이다. 단순히 재임 기간의 업적이 대단하다는 점에서만 닮은 게 아니다. 학문, 예술, 과학, 군사 등 다방면에 정통한 르네상스적 천재로 잠시도 책을 놓지 않은 호학군주이자 토론의 달인이며, 집현전과 규장각을 통해 지식 기반의 통치를 펼친 점까지 빼닮았다.

    형과 아비 몫을 빼앗았다는 죄의식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원래 자기 몫이 아닌 자리를 차지했다는 부채 의식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인 세종은 맏형 양녕대군이 쫓겨난 뒤 보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비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미운털이 박혀 살해된 끝에 왕좌에 앉았다. 세종과 달리 정조는 사도세자가 왕이 돼도 왕위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면 영조가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 사도세자를 죽이지는 못했으리란 죄책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형과 아비의 자리를 빼앗아 왕이 됐다는 죄의식은 영혼에 박힌 가시와 같았을 것이다. 그들의 위대함은 이런 십자가를 짊어지고도 탈선하거나 폭주하지 않고 위대한 군주가 되고자 일로매진했다는 데 있다. 

    지난 연말 출간된 ‘정조평전 : 말안장 위의 군주’(민음사)를 읽으며 감탄한 대목이다. 저자인 박현모(54) 여주대 교수는 여주대 산하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세종 전문가다. ‘세종의 수성 리더십’ ‘세종처럼’ ‘세종의 서재’ 등 세종 관련 저술이 공저를 포함하면 10권이 넘는다. 

    그가 정조에 관한 책을 낸 점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조선이 낳은 최고 군주 두 명을 비교하고자 지난해 12월 31일 경기 여주에 위치한 여주대로 찾아갔다. 



    “제 박사학위 논문(서울대 정치학)이 ‘정조의 성왕론과 경장정책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사람들이 개혁군주로 칭송하는 정조를 최초로 비판한 논문이었습니다. 정조가 당쟁의 폐해를 줄이겠다며 언관의 역할을 축소해 조선 정치에서 핵심인 공론정치가 변질됐고, 이로 인해 정조 사후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폐해가 야기됐다고 봤으니까요. 그런데 정조를 연구하다 보면 세종을 함께 연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조가 세종을 자신의 준거군주로 삼았기 때문에 ‘정조실록’을 읽다 보면 ‘세종실록’을 병독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정조에 대한 비판의식 때문인지 세종이 더 위대하게 다가서더군요. 정조 덕에 세종을 만난 셈인 거죠.”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으로 세종 리더십에 대해 강의하던 그는 2014년 세종의 무덤 영릉(英陵)이 위치한 여주의 여주대에 스카우트된다. 세종 리더십 강좌를 전교생 대상의 교양필수 과목으로 삼겠다는 당시 정태경 총장(여주대 설립자인 정동성 전 체육부 장관의 아들)의 제안을 받고 의기투합한 결과였다. 

    “10여 년 전부터 새해 첫날을 영릉에서 맞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세종을 가장 내밀히 대면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죠. 몇 년 전부터는 새해 두 번째 토요일 영릉에 모여 세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새둘토’ 행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릉이 가까운 대학의 제안이라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첫해 학생 1100명이 제 강의를 들었고 지난 4년간 모두 9600명의 학생이 수강했습니다. 여주시민이 11만 명인데 그분들 모두가 세종에 대한 풍성한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제 목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면사무소 같은 곳에서 특강을 펼치고 있습니다.”

    세종보다 자비로웠던 정조?

    시민 대상의 강좌에서 특히 인기 있는 내용이 뭐냐고 물었다. 황해도 곡성에 살던 약노(藥奴)라는 양민 여성이 살인죄로 처형될 위기에 몰렸는데 세종이 그의 억울함을 풀어준 이야기라고 했다. 

    약노는 자신이 밥을 먹이던 남자가 급사하자 붙잡혀 모진 고문과 문초를 받으며 10년 가까이 옥고를 겪다 자신이 주문을 외워 사내를 죽였다고 거짓자복한다. 사형판결의 경우 꼭 왕의 재가를 받도록 한 세종은 이를 보고받은 뒤 “주문을 외워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허무맹랑하다”며 다시 진상을 파악하라고 지시한다. 그래서 닭과 개를 대상으로 똑같이 주문을 외워보게 했으나 효험이 발휘되지 않자 약노는 “오랜 세월 옥에 갇혀 귀신이 떠나 그렇다”며 “법대로 빨리 죽여달라”고 호소한다. 그러자 세종은 청와대 사정수석쯤 되는 좌부승지를 직접 파견해 진상조사를 지시한다. 약노는 “본래 주문 외우는 일은 알지도 못하는데 죄를 자백하라며 모진 고문을 받다 보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어 거짓자백을 했다. 재조사한다며 형장을 때릴 거라면 그냥 죽여달라”고 통곡한다. 이를 보고받은 세종은 다시 한 번 최종 조사를 명한 뒤 약노를 무죄 방면한다. 

    세종의 애민정신이 철철 묻어나는 사연이다. 실제 세종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자신 곁에 있던 재상이나 집현전 학사가 아니라 고아나 과부, 감옥의 죄수나 노비처럼 힘없고 약한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먼저 생각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그럼 정조는 어땠을까. 

    “많은 분이 재위 기간 역모사건이 한 번도 없었던 세종은 자비로운 반면, 끊임없이 역모사건에 휘말린 정조는 상대적으로 엄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종이 재위한 32년간 심의한 사형판결 536건 가운데 원심대로 사형된 경우가 87%였고 약노처럼 방면되거나 감형된 경우는 13%에 불과합니다. 반면 정조가 재위한 24년간 심의한 1112건의 사형판결 가운데 원심대로 집행된 경우는 25%에 불과하고 감형된 경우가 75%나 됩니다. 숫자로만 보면 정조가 훨씬 자비로운 군주였던 셈입니다.” 

    물론 여기엔 상황 논리가 빠져 있다. 세종시대엔 ‘경국대전’에 입각한 법치가 막 확립될 때라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백성에게 각인시키고자 법 집행을 엄격히 했다. 반면 정조시대엔 인구가 늘고 법질서가 촘촘해지면서 사회가 복잡다단하게 변하고 범법자도 늘어났다. 실제 연평균 사형 심의 건수를 비교하면 세종 때는 32건이었지만 정조 때는 93건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그중 상당수는 역모사건 연루였는데 정조는 정적을 견제하거나 포용하는 정치 행위의 하나로 감형을 적극 활용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연산군이 되지 않은 게 기적”

    [동아DB]

    [동아DB]

    세종시대와 정조시대는 이렇게 달랐다. 정치 환경 또한 크게 달랐다. 세종시대엔 당파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신하 대부분이 왕당파였다면 정조는 임금보다 학맥과 지연으로 얽힌 당색에 더 충실한 신하들과 대결하며 국사를 끌고 가야 했다. 세종 때는 임금의 허물을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지만 정조 때는 언행 하나하나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하물며 세종은 신하들과 학문토론을 펼치는 경연에서 늘 배움의 자세를 취했지만, 정조는 공부를 게을리 한다고 신하들을 매섭게 몰아친 군사(君師)를 자부했다. 

    실제 ‘정조실록’이나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등장하는 정조의 학문적 세계는 이황이나 이이도 울고 갈 정도로 깊고 정밀하다. ‘논어’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논하며 ‘옛것을 익히고 그것에 미뤄 새것을 앎’이란 전통적 해석에 반박하며 ‘과거에 몰랐던 새로운 맛을 깨쳐 더 잘 알게 된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고 갈파한다. 또 사단칠정의 칠정 가운데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욕(欲)이라며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가 발해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은 욕이 있기 때문”이라고 정곡을 찌른 점 또한 감탄스럽다. 

    “정조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인간적 매력에 깊이 빠져듭니다. 열 살에 광기에 사로잡힌 아비가 참담한 죽음을 맞는 것을 목도했고, 할아버지의 명으로 아비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됐으며,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노론의 살해 위협(11번의 역모)에 시달린 사람이 그토록 절제된 삶과 통합적 삶을 살아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일반인 같으면 조현병에 걸리거나 연산군처럼 정치 보복을 일삼는 폭군으로 일탈하고 말았을 겁니다. 세손 시절에 지은 시만 342편이 될 정도로 풍부한 감수성을 타고난 데다 독서토론을 통한 회복 탄력성이 탁월했기에 가능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할 때 박했던 박 교수의 평가는 이번 평전에서 그만큼 후해졌다. “박사논문 쓸 때 내 나이가 서른넷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함부로 평가하기 전 먼저 이해부터 했어야 하는데 지금도 이해하기 벅차다”고 말할 정도다. 그렇다고 박 교수가 정조 찬사 일색으로 돌아섰단 소리는 아니다. 정조의 개혁정치가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엄혹한 환경을 이해하면서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으며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펼쳤던 정조에게 감탄하게 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터다.

    다복한 세종, 박복한 정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그린 ‘화성전도’. [사진 제공 · 민음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그린 ‘화성전도’. [사진 제공 · 민음사]

    “정조의 정치는 크게 3기로 구성됩니다. 재위 원년~11년은 준비기, 12~18년은 전성기, 19~24년은 쇠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준비기에는 홍국영을 앞세운 ‘아바타 정치’를 펼치다 그 한계를 깨닫고 규장각과 장용영을 통해 개혁정치를 선도할 어진 신하들을 발탁하면서 홍국영 등 외척을 멀리하는 우현좌척(右賢左戚)으로 선회합니다. 이를 토대로 전성기의 정조를 보노라면 세종 못지않은 리더십을 보입니다. 이때 사도세자의 이장과 명예 회복, 수원 화성 축성 방안 마련,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만나게 하는 신해통공의 단행, 어영청 혁신이 이뤄집니다. 그러다 정조의 기력이 쇠퇴하면서 다시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용하는 우척(右戚)으로 돌아갑니다. 정조의 개혁을 수포로 돌리게 되는 ‘아바타 정치’의 부활입니다.” 

    재위 초 정치적 우군이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홍국영이란 외척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정조는 열 살 나이에 즉위할 세자(순조)가 안쓰러워 독인 줄 알면서도 제2의 홍국영을 붙여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조 자신에 의해 조선의 권력 생태계가 크게 바뀐 상황임을 간과했다. 언관의 비판 기능이 약화돼 권력의 진공 상태가 조성된 상황에서 안동 김씨라는 권문(權門)의 등에 양 날개를 달아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박 교수는 이를 ‘이중몰입(competing commitment)’의 산물로 해석한다.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상적 모델을 추구하지만 실제 언행은 익숙한 행동모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정조는 사를 버리고 공을 좇으라 이야기했지만 정작 자신은 가족 문제에서 사에 집착했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세종의 경우 아버지 태종이 사적인 문제의 여지가 있는 것을 대부분 제거해놓았습니다. 세종은 그 뜻을 받들어 억울하게 처형된 장인 심온과 노비가 된 장모의 복권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정조는 선왕 영조의 뜻을 거스르고 즉위하자마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한 뒤 아주 천천히, 그러나 치밀하게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추진해 관철해냅니다.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충(忠)과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孝)를 절묘히 절충한 결과입니다.” 

    정조를 비판한 노론 대신들은 이를 두고 정조가 사심을 추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충은 공이고 효는 사라는 관점을 사대부 나라인 조선에서 국왕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만큼 국왕은 철저히 공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만일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의 문제를 풀어내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사대부들의 조롱거리가 됐을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정조는 인간의 욕망을 중시해 사적인 동기(사심)가 무엇이든 그것의 공적인 결과를 토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사중지공(私中之公)’ 관점에서 국사를 추진해갔다. 수원 화성을 축성할 때 당초 10년으로 예상되던 공사 기간을 31개월로 단축한 것 역시 인간의 욕(欲)을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화성 축성 때 백성에게 부역을 시키는 대신 그날그날 일한 성과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성과급제’를 적용했다. 또 공사에 참여했던 일반 백성의 이름까지 다 기록하는 공사실명제를 도입했다. 공적 사업을 추진하면서 성취동기와 인정 욕망을 긍정한 것이다.

    조선의 모세, 조선의 예수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하지만 어린 나이부터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며 지독한 자기 관리로 점철된 인생을 산 탓인지 정조의 정신력과 체력은 갑작스레 악화됐다. 그와 함께 사중지공을 추구하는 균형감도 상실했다. 역모죄로 강화도에 유배 중이던 이복동생 은언군을 불러내 만나고 창덕궁 북쪽에 머물게 하는 등 불법적이고 자의적인 행동을 하면서 이에 대한 상소는 물론, 발언까지 금해버렸다. 신하들과 토론을 통해 국사를 결정한다는 공론정치의 실종이었다. 노론 벽파인 심환지에게 밀서를 보내 ‘아바타 정치’를 부활시킨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러다 결국 노론 시파인 김조순에게 세도를 위탁함으로써 조선 공론정치의 전통과 정조가 추진한 개혁프로그램이 좌초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정조 자신이 개혁정치를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세종과 비교하면 박복하기 그지없던 정조가 세종의 통치를 재현하고자 눈물겹도록 고군분투했던 사실만큼은 높게 평가해야 마땅합니다.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초인적 격무를 견디면서, 임금이 도덕성을 함양하면 나라는 절로 다스려진다는 성학(聖學)의 길을 버리고 근면성실하고 주도면밀하게 통치해야 한다는 성왕(聖王)의 길을 택한 정조의 인간적 위대함만큼은 지울 수 없으니까요.”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마지막 저서 ‘모세와 유일신앙’에서 의미심장한 테마를 꺼내 들었다. 유일신앙으로서 유대교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에 의해 살해됐으며, 이는 수많은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살해된 아버지’ 신화의 원형일 개연성이 크다고. 또 예수신화는 ‘살해된 아들’ 신화로 그 대척점에 위치해 있음을 갈파했다. 

    프로이트가 꿰뚫어본 이런 신화적 구조는 조선에선 역사적 현실로 되풀이됐다. 태종에 의해 정치적으로 거세된 태조가 ‘살해된 아버지’라면, 영조에 의해 정치적으로 타살된 사도세자는 ‘살해된 아들’에 해당한다. 그런 비극적 희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왕좌에 오른 세종과 정조가 조선 최고의 성군 반열에 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조평전’을 덮으며 떠오른 이 질문의 답은 시간을 갖고 천천히 구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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