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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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듯 배신하는 사회, 씁쓸한 정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아웃레이지’

  • 강유정 영화평론가·국문학 박사 noxkang@hanmail.net

    입력2010-11-29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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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먹듯 배신하는 사회, 씁쓸한 정의
    폭력에도 미학이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폭력을 일종의 미학으로 승격시켰다. 세계 영화계가 그를 주목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지독한 폭력 속에서 차가운 평정을 이끌어낸다. ‘분노’라는 말이 대부분 뜨거운 폭발을 연상시키는 것과 달리 그의 작품에서는 서슬 퍼런 칼처럼 차갑고 날카롭다. 기타노 다케시의 매력은 말하자면 차가운 일본도의 날과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한국 문화의 특징이 ‘남김’에 있다면 일본 문화의 특징은 ‘다함’에 있다. 일본 영화나 문학의 매력도 그렇다.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소진하고 죽을 때까지 짜낸다. ‘진(盡)’의 강렬한 에너지가 가득하다는 이야기다. 기타노 다케시의 폭력 미학에도 이 다함이 있다. 예를 들면 영화 ‘하나비’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와 늙은 형사가 보여주는 여정이 그렇다. 그들은 죽음까지의 시간을 유예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마음껏 탕진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한다. 기타노 다케시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조용하고 냉정하게 소진한다. 부산을 떨거나 과장하지도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조용함이 긴장을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폭발 직전의 긴장과 열기가 차갑게 충만해 있다.

    새 영화 ‘아웃레이지’는 오랜만에 기타노 다케시 스타일의 분노와 폭력을 보여준다. 치과 치료기기로 입 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파문한다는 두목의 말에 “손가락 하나 갖다 바치지 뭐”라고 웃으며 대꾸한다. 너무 끔찍한데 너무 태연하다. 영화는 아무런 음향이나 카메라의 조작 없이 무심히 손가락과 칼을 비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웃레이지’는 폭력적이지만 폭력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배신에 대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배신을 종종 다뤘다. 그런데 이번엔 배신에 대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배신으로 구조화돼 있음을 보여준다. 기타노 다케시는 꼼꼼한 솜씨로 배신이 어떻게 조직화되고 구조화되는지 그려낸다.

    문제는 이 배신의 조직도가 조폭의 계보에만 해당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노회한 두목은 체스판 위의 말을 움직이듯이 배신을 조작한다.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직을 관리해나간다. 그 관리법은 일본식 조경법과 닮아 있다.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가지치고 잘라내는 조경처럼 그들은 원하는 바를 위해 사람들을 ‘가지치기’한다.



    영화 ‘아웃레이지’의 세계에는 의리나 의협 따위는 없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의리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쉽게 짓밟혀버린다. 보스의 배신을 눈치챈 중간 보스, 오오토모는 자신이 아끼는 후배 미즈노를 숨겨두려고 한다. 하지만 적들은 숨겨둔 패를 더 모욕적이고 험악한 방식으로 처단한다. 이미 이 세계에서는 뭐가 옳고 그른지 알 수조차 없다.

    사람들은 종종 사회를 정글이나 동물의 세계에 비유한다. 그런데 정글에는 먹고살 만큼의 경쟁이 있지만, 사회에서의 협잡과 음모는 생계가 아닌 욕망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칼이 난무하는 정글엔 법칙이 없다. 원칙 없는 세계의 공포는 어쩌면 칼이나 피보다 더 두려운 것일지 모른다.

    ‘아웃레이지’에서 발견되는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는 이전보다 훨씬 차갑고 어둡고 비정하다. 비장미를 돋우던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사라진 것도 한 예다. 음향효과조차 절제된 ‘아웃레이지’의 공간엔 대사도 많지 않다. 그들은 들리지 않을 만큼 귓속말을 하고, 눈치껏 상황 파악을 해서 도망가거나 배신한다. 극 중의 형사는 오오토모에게 “살아남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다. 씁쓸하지만 어느덧 세상의 정의는 살아남아서 강한 자의 편에 서 있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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