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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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복수극, 금기의 한계 도전

  • 듀나/ 영화평론가 djuna01@hanmail.net

    입력2003-12-04 1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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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혹한 복수극, 금기의 한계 도전
    전작 ‘복수는 나의 것’이 그랬던 것처럼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올드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이의 신경을 긁고 불쾌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화는 사회적 금기와 불편한 폭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걸 일부러 피부 밖으로 끄집어낸다.

    그러나 비슷한 분위기의 ‘복수는 나의 것’과는 달리 ‘올드보이’가 흥행에서 선전하는 건, 관객들과 비평가들이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 박찬욱이 어떤 예술가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복수는 나의 것’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 작품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감독이 만든 뜻밖의 영화였으니 말이다(물론 그의 이전 필모그래피에 익숙한 관객들은 그 작품이 오히려 본류로 돌아간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동명의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한 ‘올드보이’는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어 15년 동안 사설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평범한 회사원 오대수(‘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란 뜻이라고 한다)를 추적한다. 그는 자신을 이런 고통 속에 빠뜨린 사람이 이우진이라는 남자라는 걸 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우진이 오대수를 그런 끔찍한 지옥에 떨어뜨린 것일까?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복수라는 행위에 대한 냉정한 탐구다. 영화는 관객들이 동일시하는 주인공의 복수를 통해 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생각 따위는 꿈에도 없다. 영화는 대리만족이라는 당의정을 ‘노골적으로’ 제거한 뒤 (또는 고의로 이것을 벗겨내 그 불쾌한 속살을 드러낸 뒤) 복수라는 파괴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메커니즘과 심리를 파헤친다.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직선적인 파괴와 처벌은 순환의 그물에 걸려 모두가 가해자이며, 모두가 피해자인 운명적인 비극의 무대가 만들어진다.

    ‘올드보이’는 얼음과 불로 이루어진 영화 같다. 드라마와 감정의 극단적인 과잉과 과장은 그것들을 다루는 냉철하고 매정한 영화적 접근법과 매서운 대조를 이룬다. 이 위태로워보이는 균형은 어마어마하게 ‘멜로드라마틱한’ 연기를 펼치는 최민식과 얄미울 정도로 냉정하게 조율된 유지태의 단선적 연기의 대결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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