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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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꿈꾸는 은밀한 性愛

  • 입력2005-05-17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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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꿈꾸는 은밀한 性愛
    문단에서 입심 좋고 글발 좋기로 유명한 심상대씨가 완전히 발가벗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이번 소설집 ‘떨림’의 필명을 마르시아스 심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마르시아스는 껍질이 벗겨질 각오로 아폴론신에게 도전했던 피리의 명수. 결국 아폴론과의 대결에서 진 뒤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다고 한다. 그런 대단한 각오로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소년기부터 지금까지의 섹스편력이다.

    사실 8편의 단편은 수없이 많은 정사가 얽히고 설켜 마치 하나의 장편처럼 보인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황현상 교수(고려대)는 “한 섹스는 다른 섹스의 터전이 되고 한 기억은 다른 기억을 모방한다. 그리고 그 전체는 소설을 꾸려가는 힘이 된다”고 했다.

    장난기가 발동해 도대체 몇 번이나 했는지 세어 볼까도 했지만, 초장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의 ‘나’란 사람은 “서로의 동정과 순결을 교환한 갈래머리 여고생에서부터, 나보다 곱절이나 더 나이를 먹었던 커다란 젖꼭지를 가진 유부녀와, 그리고 하루에 한 줌이나 되는 골수염 치료약을 장복하던 말수 적은 접대부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여자들의 몸에서 하나하나 불꽃털을 훔쳐내고 그 불꽃털을 가지런히 모아 삼성미술문화재단에서 발행한 ‘조선상식문답’이라는 노란색 표지의 작은 책 속에 간직해 두고, 장차 소설가가 된다면 무엇보다 우선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쓰리라 작심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각 단편의 제목들-딸기, 샌드위치, 나팔꽃, 우산, 밀림, 피크닉, 베개, 발찌-은 ‘나’에게 그때의 정사를 떠올리게 해주는 장치다. ‘딸기’는 시골 소도시에서 술집 웨이터로 일하던 스무살 시절, 건너편 양장점에서 잔심부름하던 두 자매와의 싱거운 성관계를 그리고 있다. 밭에서 금방 따낸 딸기에서, 그리고 그것을 먹으며 “아주 시어, 좋아”를 연발하는 로리타(동생)에게서 그는 색다른 성욕을 느낀다. 그러나 자매와의 밋밋한 정사는, 같은 시기 유마담과의 격렬한-하룻밤에 3200회의 피스톤 운동을 하는-정사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샌드위치’는 비교적 얌전하게 학교를 오가던 고3 시절 하숙집 여주인과의 정사가 중심이 된다. 자위행위에 몰두하는 ‘나’와 그것을 은밀히 지켜보는 하숙집 여주인.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날 자위행위를 지켜보는 또 다른 인물-조숙한 주인집 어린 딸-이 있음을 알게 된 후 아쉽게 끝난다. 샌드위치는 그 여주인이 즐겨 만들어주던 음식. “그 유백색 빵이 아주 부드러웠고 빵에 싸인 야채도 아주 생생하여 이빨 사이에서 맑은 소리를 내며 씹혔다”는 묘사가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나팔꽃’에서 ‘나’는 소설가 수업이라 생각하며 이리저리 떠돌다 드디어 서울에 올라와 전문대학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룸살롱 아가씨들에게 몸과 마음을 의탁해 살아간다. 동거하던 남자를 감옥으로 보내고 사랑에 굶주린 룸살롱 아가씨와의 숲속 정사, 그리고 시간을 훌쩍 넘어 이혼 후 항구도시 독신자 아파트에 사는 작가가 되어 이번에는 주례를 맡기로 한 젊은 여성과 육체를 나누는 이야기다. 나팔꽃은 곧 바다요, ‘나’는 육체의 결합을 통해 수억만 송이의 나팔꽃이 피어나고 스러지고 다시 피어나는 것을 목도한다.

    ‘우산’은 짜증내는 연하의 정부(나)를 달래면서 서둘러 남편에게 돌아간 그녀(선배의 아내)가 빠뜨리고 간 물건이기도 하고, 20년 만에 재회한 어릴 적 친구 옥희가 차에 두고 내린 꽃무늬 우산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밀림’에서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진한 정사의 추억을 남긴 유마담이 다시 등장하지만, 사뭇 ‘성의 사회적 기능’ 강의를 듣는 듯하다. ‘피크닉’은 러브호텔을 배경으로 한 중년남녀의 연애담. ‘베개’는 서른 아홉 남자와 어머니보다 나이 든 예순넷의 여자가 벌이는 애절한 연애 이야기고, 마지막 ‘발찌’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처녀와의 만남을 다뤘다.

    일견 이 소설은 한 소년이 성에 눈뜨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내’ 곁을 스쳐간, 운이 좋으면 작가로부터 이름 석자라도 얻고 혹은 그 이름조차 받지 못한 여성들이다. 작가는 ‘나’의 시선을 빌려 ‘나’와 사랑을 나눴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이쯤 해서 독자들은 체험고백 형식을 띤 이 소설이 사실상 허구였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허구를 사실인양 포장하는 놀라운 기술,

    “나는…적어두지 않을 수 없다” “…했다는 사실을 여기에 밝혀두어야겠다”는 식의 고백적 어투나, “이제 이 글에서 밝히는 이름은 당연히 가명이라고 이해하여야 한다”는 작가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 가증스럽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한 남자의 은밀한 성애를 짜릿하게 공유하며, 현실보다 더 순백한 순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충분히 용서가 되지 않는가.

    떨림/ 마르시아스 심 지음/ 문학동네 펴냄/ 312쪽/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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