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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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만 新국공합작 손익계산법

선거 승리 위해 중국공산당과 손잡는 국민당…反中 정서 파고든 제1야당 민진당 선전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15-05-11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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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공산당과 대만 국민당이 ‘공동의 적’에 대응하려 다시 손을 잡았다. 상대는 그간 대만 독립을 추진해온 민주진보당(민진당). 대만 제1야당인 민진당은 내년 1월 실시될 총통 및 입법의원(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할 개연성이 높다. 차이잉원 민진당 주석이 차기 총통이 될 것이라는 다소 성급한 전망까지 나온다. 지난해 11월 지방선거 참패 이후 지지도가 계속 하락하고 있는 국민당으로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마잉주 총통은 국민당 주석직을 내놨지만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1월 주리룬 주석 취임과 함께 전열을 정비한 국민당은 민진당의 집권을 막기 위한 비장의 카드로 중국공산당과의 ‘국공(國共) 영수회담’을 적극 추진해왔다. 그간 반중(反中) 성향이 강한 민진당이 집권할 경우 양안(兩岸·중국과 대만)관계가 크게 냉각될 것을 우려해왔던 중국공산당 역시 국민당과의 영수회담에 기꺼이 응했다.

    홍콩 민주화시위 후폭풍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5월 4일 베이징을 방문한 주리룬 국민당 주석과 영수회담을 갖고 양안관계의 발전 방안을 논의했다. 가히 ‘신국공합작(新國共合作)’이라 부를 만한 만남이었다. 국공합작이란 20세기 전반 중국공산당과 대만 국민당이 각각 북방 군벌 타도, 일본 침략 저지를 위해 맺은 두 차례의 협력관계를 말한다. 1924년 맺은 제1차 국공합작은 3년 만에 깨졌고, 이후 공산당 세력이 커지자 장제스 국민당 주석은 27년부터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10년간 내전을 벌여야 했다. 두 당은 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고자 제2차 국공합작을 맺는다. 그러나 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또다시 내전이 벌어졌고, 패배한 국민당이 49년 대만으로 도망가면서 본토는 중국공산당이 차지했다.

    이후 중국과 대만은 서로 통일과 본토 회복을 각각 내세우며 사사건건 대립했다. 특히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20세기를 통틀어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대만 집권당 대표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2008년 5월 28일 후진타오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우보슝 국민당 주석이 만나 양안의 교류와 협력에 합의했다. 양안의 집권당 대표들이 가진 첫 공식회담, 이름하여 제3차 국공합작이다. 후 총서기는 2005년에도 롄잔 국민당 주석과 분단 60년 만에 악수를 나눴지만 당시 국민당은 대만 제1야당이었다.



    제3차 국공합작 이후 양안관계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발전했다. 후 총서기는 2009년 5월 우 주석과 재차 만나 적대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특히 친중파인 마 총통은 ‘삼불(三不·불독립, 불통일, 무력불사용) 정책’을 선언했다. 전면적인 통상(通商), 통항(通航), 통신(通信)의 이른바 ‘대삼통(大三通)’ 교류도 중국에 제의했고 중국 역시 이를 수용했다. 대만은 또 2010년 중국과 일종의 자유무역협정(FTA)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했다. 중국과 대만은 2014년 2월 분단 이후 사상 처음으로 장관급회담도 개최했다.

    마 총통과 국민당 정부가 친중 노선을 추진한 것은 대만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안의 무역 규모는 지난해 1983억 달러(약 214조2200억 원)로 2002년에 비해 5배나 늘었다. 양안의 항공은 매주 840편 운항되고, 지난해 중국을 방문한 대만 관광객은 536만 명, 대만을 방문한 중국 관광객은 404만 명에 달했다. 양안의 교류와 경제협력 덕에 마 총통은 2008년에 이어 2012년 재선에 성공했다.

    명이 있으면 암도 있는 법. 마 총통과 국민당의 지나친 친중 정책은 대만 국민의 반발과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국민 중 상당수는 중국에 흡수통일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지난해 9월 발생한 홍콩 민주화시위 사태는 이러한 불안감에 불을 붙였다. 대만 국민 대다수는 “오늘 홍콩의 모습이 내일의 대만이냐”면서 중국 통일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중국은 그간 대만에 대해 홍콩과 마카오처럼 일국양제(一國兩制) 방식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하나의 국가에 2개 체제가 공존’하는 이 시스템은 중국이 1997년 7월 홍콩을 귀속하는 과정에서 ‘고도의 자치’를 허용하며 내세운 원칙이다. 그러나 홍콩 민주화시위 사태에서 나타났듯 중국은 행정장관 직선제 같은 민주주의 체제를 홍콩에 도입할 생각이 전혀 없음이 분명해졌고, 이를 계기로 대만 국민 사이에서 일국양제에 대한 환상이 깨진 셈이다.

    홍콩 민주화시위 사태 이후 대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양안 통일을 지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하다. 특히 젊은 층은 대만이 홍콩처럼 중국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는 것에 반대한다는 견해가 강하다. 게다가 이들은 경제가 중국에 예속될 수 있다는 점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중국인에게 일자리를 뺏겼다는 피해의식도 크다.

    사상 첫 여성 총통 탄생?

    국민의 이러한 반중 정서를 파고드는 민진당은 이를 활용해 내년 선거에서 정권 탈환을 노리고 있다. 차이잉원 주석은 “대만 국민의 미래는 대만 국민이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해왔다. 차이 주석과 같은 민진당 출신인 천수이볜 전 총통은 재임 시절 대만 독립 정책을 추진해 베이징과 첨예하게 대립한 바 있다. 차이 주석의 정책은 천 전 총통처럼 과격한 반중 노선은 아니지만 독립을 지향하는 것은 마찬가지. 차이 주석은 2012년 1월 총통 선거에서 마 총통에게 패배한 바 있다. 차이 주석이 당선하면 대만 사상 첫 여성 총통이 된다.

    중국은 차이 주석이 승리할 경우 양안관계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보고 이를 막기 위해 국민당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할 방침이다. 시 주석은 주 주석과의 회담에서 “양측이 손을 맞잡고 양안의 운명공동체를 건설해나가야 한다”며 ‘92 공식(共識)’과 ‘대만 독립 반대’가 양안관계의 기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92 공식’이란 1992년 양측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중국과 대만이 각자 해석에 따른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합의를 일컫는다. 이날 시 주석이 “양안 젊은이들이 좋은 동반자로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대만 젊은 층이 가진 중국에 대한 거부감을 감안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시 주석은 주 수석이 언급한 대만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요청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주 주석은 “국민당은 중국과의 점진적인 통일을 지지한다”고 화답했다. 이에 대해 차이 주석은 “양안관계는 양안관계일 뿐 국공관계가 아니다”라면서 신국공합작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내년 총통 선거를 노린 대만 주요 정치세력의 발 빠른 행보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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