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9일 류길재 통일부 장관(오른쪽)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에 “내년 1월 중 남북 간 대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왼쪽은 정종욱 통일준비위원회 부위원장.
#2 “최고위급 회담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신년사가 공개된 다음 날, 흥미로운 뒷이야기 하나가 북한 소식통을 타고 국내에 전달됐다. 신년사 발표 이틀 전인 2014년 12월 30일 김 제1비서가 당 중앙위원회 핵심 간부들에게 이른바 ‘조국통일대전’과 관련한 준비를 서두르라는 비공개 방침을 하달했다는 것. “외국투자 유치를 위해 당분간 남북관계 개선 공세를 펴겠지만, 근본적인 목표는 이를 통해 시간을 벌고 (전쟁 수행을 위한) 전략물자를 더 빨리 확보하는 것”이라는 게 방침의 골자라는 설명이다. 요컨대 신년사 내용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전쟁 준비에 주력하라는 메시지였다고 소식을 전한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분석했다.
#3 “솔직히 말해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준비한 프레젠테이션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느낌이랄까. 열의도 집중력도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상황에서 뭘 논의할 수 있을지 답답함이 앞선다.” 지난 연말 통일준비위원회(통준위) 회의에 참석했던 한 중견 전문가의 속내다.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는 등 활발한 행보를 거듭하는 통준위지만,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논의 체계나 추진력 모두 한계가 명확하다는 신랄한 비판은 한두 사람의 의견이 아니다. 한마디로 ‘뭔가 의미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이야기다.
미국의 ‘축복’이 없다면
새해 벽두부터 빠른 속도로 몰아치는 남북관계 개선의 시그널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비서가 주고받은 말들과 북한 관영언론의 누그러진 태도는 기대치를 끝없이 끌어올리지만, 냉정히 복기해보면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깊이 잠겨 있는 암초를 흔들 방법은 여전히 묘연하기 때문. 간만에 불어온 훈풍에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 이유다.
먼저 평양에서 보는 판은 이렇다. 중국과의 냉각기가 길어지자 러시아의 손을 잡으려 애썼으나, 모라토리엄 선언을 목전에 둔 모스크바는 제 코가 석 자다. 북한 내륙철도 현대화와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러시아 자본을 끌어들여 경제개발에 나서려던 평양의 계획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협상마저 납치자 문제에 막혀 갈 길을 잃은 상황에서 남은 것은 남한뿐. 서울과의 관계 개선을 ‘보여줌으로써’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활로다.
청와대는 어떨까. 세월호 사건과 정윤회 문건 파동으로 2014년을 떠내려 보낸 정권 핵심으로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하다. 남북문제는 ‘국가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과시해 국정운영의 추진력을 만드는 데 더없이 알맞은 카드다. ‘역사에 남는 통일 대통령’이라는 말이 갖는 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새해 3대 국정목표 가운데 하나로 ‘남북관계 개선’을 검토 중이라는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은 이렇게 해서 힘을 얻는다.
남과 북의 지도자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 이해가 맞아떨어지면 물살은 빨라지기 마련이지만,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속내는 또 다르다. 평양이 당분간의 유화 국면을 한반도 질서의 근본적 재편으로 이어갈 뜻이 없음은 명확하고, 남측 역시 전시효과를 만들어내는 일에 훨씬 눈길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언제든 사그라질 수 있을 만큼 ‘뿌리가 부실한’ 훈풍이라는 뜻이다.
현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암초는 워싱턴이다. 연말 쿠바와의 전격적인 관계 개선 이후 오바마 행정부는 공화당의 거친 공세에 시달리는 중이다. 한 미국 측 당국자는 소니픽처스 해킹 사건을 가리켜 “표현의 자유 문제와 직결된 ‘헌법적 사안(constitutional issu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어느 모로 보나 대북정책 변화를 꺼내 들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것. 남북이 뭘 하든 자유지만, 백악관의 ‘축복(blessing)’을 기대하지는 말라는 게 워싱턴 인사의 솔직한 말이다.
2015년 벽두 남북관계 전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이렇게 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미국의 축복 없는 남북 대화가 과연 박근혜 정부 안에서 얼마나 힘을 받을 수 있을까. 대통령 지지율의 기반을 이루는 보수층 유권자들의 여론 향배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청와대가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같은 민감한 이슈를 무리 없이 돌파해낼 묘수가 있을까.
영화 한 편의 나비효과
2014년 3월 3일 한미합동군사연습 키리졸브와 독수리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기지에 입항한 미 7함대 소속 핵추진잠수함 콜럼버스.
문제는 키리졸브 연습의 규모를 조정하는 일이 청와대 의지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점. 미 국방부 시각에서 보자면, 육·해·공 대규모 전력을 원거리 전장(戰場)에 신속히 수송하고 수용해 통합하는 입체훈련이 가능한 것은 전 세계를 통틀어 키리졸브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한 대북억제가 아니라 글로벌 군사 대비 태세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필수적이라는 것. 남북관계의 훈풍 같은 ‘작은 변화’ 때문에 양보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라는 뜻이다.
2월 초 의회 인준청문회에 서는 애슈턴 카터 신임 미 국방부 장관 지명자는 영변 핵시설 정밀 폭격론을 거듭 주장해온 강경론자다. 공화당이 점령한 의회와의 관계를 의식해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도 ‘썩 내키지 않는 카드’를 택했다는 게 미국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여기에 북한에 대한 반감이 비등점으로 치닫는 최근 워싱턴 분위기를 감안하면, 백악관이 국방부의 ‘팔을 비틀어’ 키리졸브의 규모나 구성을 조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한층 명확해진다.
“지난해 이맘때였다면 워싱턴의 태도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남북이 관계 개선 타이밍을 고른 셈이다.” 익명을 요청한 미국 측 당국자의 말이다. 그동안 뭘 하다 이처럼 곤혹스러운 국면에서 대화 제의가 오가느냐는 불만 아닌 불만. 지금의 훈풍이 미풍으로 끝날 공산이 커 보이는 결정적 이유다. 감독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영화 ‘디 인터뷰’ 한 편이 동북아 국제정치에 남긴 엄청난 나비효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