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행이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후 이순신은 이렇게 술회한다. ‘난중일기’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매우 강렬한 감정과 사건만이 건조한 문장 몇 줄로 서술돼 있을 뿐이다. 사실을 기록하는 게 가장 소중하다는 듯, 날짜와 날씨에 무척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감정은 그을음처럼 흔적만 남아 있다. 게다가 1597년이라면 그는 더는 영웅이 아니다. 임금은 이미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럼에도 그는 백의종군해야 한다. 1597년 음력 9월, 과연 진도 울돌목(명량해협)에서는 어떤 울음소리가 났던 것일까.
영화 ‘명량’은 기념비적이다 못해 미스터리한 승리로 기억되는 명량대첩을 소재로 삼았다. 열두 척 배로 그 열 배 혹은 서른 배가 넘는 왜선을 물리친 기적적인 방어전, 그 승리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순신을 감싸는 감정의 실체가 승리의 도취감이 아니라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깨물어야 했던 굴욕과 치욕이라는 점이다. 승리했으나 오히려 죄인이 돼야 했던 인물, 영화 ‘명량’은 이순신이 겪었던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에서 출발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순신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이가 왜적이 아닌 내부의 적이라는 사실이다. 이순신에게 피를 토할 만큼의 치욕을 전해주는 이들 역시 왜군 장수가 아니다. 심지어 왜적을 막으려고 건조한 구선(龜船·거북선)에 불을 지르는 이도 내부의 적, 배설이다.
감독 김한민은 ‘명량’을 두고 ‘난중일기’에 대한 착실한 해독일 뿐이라고 말했다. 해독은 이순신이라는 인물 캐릭터와 영화 전반의 톤에 대한 비유에 가깝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그 각박한 시절을 단 몇 줄의 비통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명령을 거부하고 이순신을 조롱하는 부하 장수들의 행태는 몇 줄의 기록이 불러낸 허구라 할 수 있다. 왕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부하로부터 멸시받는 장수, ‘명량’은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영화 ‘300’의 남성이 아니라 굴욕조차 기댈 바 없는 남자에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 ‘명량’은 크게 두 개의 호흡법으로 나뉜다. 느리고 고통스러운 전반부가 굴욕의 호흡이라면, 후반부는 사투로 요약할 수 있다. 불신과 부족, 패배의 예감 속에서 전반부는 무겁지만 매우 뜨겁게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른다. 이 굴욕의 활시위를 단단한 장력으로 당겨 화살을 대첩의 카타르시스에 조준하는 셈이다.
김 감독의 전작 ‘최종병기 활’이 주목했던 것도 지난한 굴욕의 시간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카타르시스가 치욕 속에서 인양될 수 있음을 잘 아는 감독이다. 김한민식 굴욕은 결말이 정해진 역사극의 특성과 기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어차피 승리할 것을 알기에 굴욕과 치욕은 달콤한 죽음충동이 된다. 어차피 승리는 정해졌기에 고통이 카타르시스의 교량이 돼줄 수 있는 것이다.
‘명량’은 영웅 이순신이 아닌, 고독한 반영웅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 절제된 반영웅의 고통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이다. 지금까지 에너지를 폭발하는 연기를 보여줬다면 ‘명량’에서 그는 삼키는 연기를 해낸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맛봤던 비장한 문체미가 최민식 연기에서 느껴진다. 책임 있는 남자의 매력, 굴욕이 뿜어내는 카타르시스가 장쾌하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후 이순신은 이렇게 술회한다. ‘난중일기’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매우 강렬한 감정과 사건만이 건조한 문장 몇 줄로 서술돼 있을 뿐이다. 사실을 기록하는 게 가장 소중하다는 듯, 날짜와 날씨에 무척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감정은 그을음처럼 흔적만 남아 있다. 게다가 1597년이라면 그는 더는 영웅이 아니다. 임금은 이미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럼에도 그는 백의종군해야 한다. 1597년 음력 9월, 과연 진도 울돌목(명량해협)에서는 어떤 울음소리가 났던 것일까.
영화 ‘명량’은 기념비적이다 못해 미스터리한 승리로 기억되는 명량대첩을 소재로 삼았다. 열두 척 배로 그 열 배 혹은 서른 배가 넘는 왜선을 물리친 기적적인 방어전, 그 승리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순신을 감싸는 감정의 실체가 승리의 도취감이 아니라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깨물어야 했던 굴욕과 치욕이라는 점이다. 승리했으나 오히려 죄인이 돼야 했던 인물, 영화 ‘명량’은 이순신이 겪었던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에서 출발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순신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이가 왜적이 아닌 내부의 적이라는 사실이다. 이순신에게 피를 토할 만큼의 치욕을 전해주는 이들 역시 왜군 장수가 아니다. 심지어 왜적을 막으려고 건조한 구선(龜船·거북선)에 불을 지르는 이도 내부의 적, 배설이다.
감독 김한민은 ‘명량’을 두고 ‘난중일기’에 대한 착실한 해독일 뿐이라고 말했다. 해독은 이순신이라는 인물 캐릭터와 영화 전반의 톤에 대한 비유에 가깝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그 각박한 시절을 단 몇 줄의 비통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명령을 거부하고 이순신을 조롱하는 부하 장수들의 행태는 몇 줄의 기록이 불러낸 허구라 할 수 있다. 왕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부하로부터 멸시받는 장수, ‘명량’은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영화 ‘300’의 남성이 아니라 굴욕조차 기댈 바 없는 남자에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 ‘명량’은 크게 두 개의 호흡법으로 나뉜다. 느리고 고통스러운 전반부가 굴욕의 호흡이라면, 후반부는 사투로 요약할 수 있다. 불신과 부족, 패배의 예감 속에서 전반부는 무겁지만 매우 뜨겁게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른다. 이 굴욕의 활시위를 단단한 장력으로 당겨 화살을 대첩의 카타르시스에 조준하는 셈이다.
김 감독의 전작 ‘최종병기 활’이 주목했던 것도 지난한 굴욕의 시간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카타르시스가 치욕 속에서 인양될 수 있음을 잘 아는 감독이다. 김한민식 굴욕은 결말이 정해진 역사극의 특성과 기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어차피 승리할 것을 알기에 굴욕과 치욕은 달콤한 죽음충동이 된다. 어차피 승리는 정해졌기에 고통이 카타르시스의 교량이 돼줄 수 있는 것이다.
‘명량’은 영웅 이순신이 아닌, 고독한 반영웅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 절제된 반영웅의 고통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이다. 지금까지 에너지를 폭발하는 연기를 보여줬다면 ‘명량’에서 그는 삼키는 연기를 해낸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맛봤던 비장한 문체미가 최민식 연기에서 느껴진다. 책임 있는 남자의 매력, 굴욕이 뿜어내는 카타르시스가 장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