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취역해 2009년 퇴역한 포항함. 한국이 필리핀에 기증하기로 한 포항급 초계함 초기형의 1번함이다.
문제의 군함은 5월 30일 서울에서 열린 한·필리핀 국방부 장관 회담에서 김관진 당시 장관이 올해 연말까지 무상 기증하기로 한 포항급 초계함(1220t) 1척. 한국 측은 이와 함께 다목적 상륙정(LCU) 1척과 고무보트 16척도 무상 공여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합의사항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필리핀 외교부는 6월 5일 관련 보도자료를 내고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발표 당일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것은 일본 ‘교도통신’. 일본은 이미 지난해 중국 견제용 다목적 대응함(MRRV) 10척을 필리핀에 판매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필리핀 해군에 ‘대박’ 함정
5월 30일 한·필리핀 국방부 장관 회담과 한국의 초계함 기증 소식을 전하고 있는 필리핀 외교부 홈페이지.
문제는 필리핀이 남중국해 도서 영유권 문제를 두고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실. 막대한 석유자원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스카버러 섬(중국명 황옌다오)과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군도) 등 두 나라 사이의 산호초 군락 섬들이 분쟁 무대다. 특히 지난해 이후로는 중국이 이들 섬 지역에 군사시설 건설을 강행하고 인근 해역에서 필리핀이 미군과 합동해상훈련을 벌이는 등 긴장이 정점을 향해 달리는 상황.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필리핀 국민의 93%가 중국과의 무력 충돌을 우려하고 있다고 응답했을 정도다.
미국과의 동맹에 국가안보의 상당 부분을 의존해온 필리핀은 자체 군사력이 극히 취약하다. 해군만 놓고 보면 미국이 제공한 퇴역 프리깃함 2척과 영국 등 미국의 동맹국들이 공여한 함정이 주요 전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형적 구조다. 한국이 제공하기로 한 포항급 초계함은 전체 필리핀 해군 함정 중 세 번째 크기인 셈. 한 군사 전문가는 “우리에게는 해체 비용을 걱정해야 하는 ‘불용군수물품’이지만, 필리핀으로서는 분쟁 수역 등 근해에서 작전을 수행하기에 더없이 유용한 무기체계일 것”이라며, “필리핀 해군 처지에서는 ‘대박’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함께 공여될 것으로 보이는 물개급 상륙정 역시 흘수선(함정이 물에 잠기는 깊이)이 낮아 수심이 얕은 산호초 군락 수역에서 운용하기에 이상적이라는 설명이다.
중국 측의 이례적인 항의는 이러한 상황과 관계 깊다. 현역 인민해방군 장성으로 알려진 주한중국대사관 무관부 대표는 관할부서인 외교부 동북아국과 국방부 국방정책실을 잇달아 방문해 고위관계자들을 면담하고, 한국의 군함 기증이 남중국해 분쟁 상황에 미칠 영향에 대해 장시간 항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판매가 아닌 무상 공여라는 형식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감을 표했다는 후문.
중국 측은 이러한 한국 측 행보가 미국의 대(對)중국 포위 전략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명시적 의사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최근 급물살을 타고 있는 우호적 한중관계에 직접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한중 정상회담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던 까닭에 양측 모두 사안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대신 수면 아래에서 논의하기로 했다는 게 익명을 요청한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한국이 퇴역한 무기체계를 제3국에 공여해온 것은 상시적으로 이뤄진 일이라는 게 군 당국의 설명이다. 포항급 초계함만 해도 2번함이었던 군산함이 2012년 콜롬비아에 인도된 바 있고, 필리핀에도 이미 퇴역한 참수리급과 학생급 고속정을 제공한 일이 있다. 이 밖에도 동티모르와 카자흐스탄 등이 한국 해군의 함정을 기증받아 운용 중이다.
무기 관련 이의 제기는 처음
전직 안보부처 관계자들에 따르면 포항급 초계함의 필리핀 기증도 이미 2011년부터 기획된 사안이었다. 당시는 필리핀이 기종 선정을 진행하던 경공격기 사업을 두고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FA-50이 치열한 마케팅전(戰)을 벌이던 시점. 필리핀은 올해 3월 한국으로부터 FA-50 12대를 도입하기로 최종 본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현재 필리핀은 4억1000만 달러 규모로 알려진 프리깃함 2척 구매 사업의 입찰을 진행 중으로, 이 입찰에 참여한 4개 회사 가운데 3곳은 한국 기업이다. 초계함 기증이 무기 수출을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7월 21일 ‘주간동아’는 국방부와 외교부 대변인실을 통해 중국대사관 관계자의 항의 방문에 대해 공식 질의했다. 외교부는 “해당 사안 전체가 대외비이므로 언급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고, 국방부는 “초계함 기증과 관련해 중국 측 당국자가 국방부를 방문한 것은 사실”이라고 확인하면서도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고 답했다.
전·현직 안보부처 관계자들에 따르면, 주한중국대사관 무관부와 국방부 사이 의사소통은 상시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한국의 무기 수출이나 공여와 관련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초유의 일이다. 더욱이 전해진 것처럼 공세적 어조로 항의 뜻을 전달하며 한국을 압박하는 일은 경험한 바 없다는 것. 양국 군사 당국 간 핫라인 설치 합의 등으로 무르익은 우호 분위기 뒤에 가려진 ‘국제정치의 민낯’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중국 전문가의 말이다.
“결국 이 문제는 5월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 이후 한층 목소리가 커진 베이징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작게는 남중국해, 크게는 아시아 전체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중국 측 전략은 앞으로도 한중 두 나라 사이에 비슷한 갈등을 계속 부과할 개연성이 크다. 한국에 대한 ‘상전 노릇’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정확한 원칙과 논리를 세워두지 못한다면 이런 일은 더 자주, 더 노골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