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숨바꼭질’은 ‘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1%와 99%로 양극화한 자본주의의 신계급사회를 인류사의 막장을 향해 질주하는 열차의 머리칸과 꼬리칸으로 비유했다.
깊이나 규모는 달라도 신랄하기로는 ‘설국열차’와 동반 흥행하는 ‘더 테러 라이브’도 마찬가지다. 백주에 서울에서 일어난 폭파테러가 소재인 이 영화에서 대한민국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범인은 평범하고 가난한 건설노동자다. 수십 년을 흙을 이고 벽돌을 나르며 살아온 그는 동료들이 공사 중 사고로 무참히 죽어나갔는데도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범인은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며 자신이 지은 서울 마포대교 폭파테러를 감행한다.
죽음 부르는 부와 욕망의 표상
이들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반칙과 승자독식 사회’의 실상은 적나라하고, 대중의 분노와 박탈감은 맵고 쓰다. 관객은 양극화한 계급사회의 긴장과 갈등으로 가득 찬 영화에 온몸의 신경과 근육을 곤두세워 감정을 이입하고 환호를 보낸다.
‘숨바꼭질’(감독 허정)의 상상력도 이들 작품과 멀지 않다. 반칙으로 얻은 ‘가진 자’의 부(富)와 반칙으로라도 그것을 뺏고자 하는 ‘못 가진 자’의 탐욕이 죽음의 회로를 이룬다. 서로 끊임없이 술래를 바꿔야 하는 영화 속 죽음의 숨바꼭질에서 고리를 이루는 것은 ‘집’이다. ‘숨바꼭질’은 한국 사회에서 부와 욕망의 표상인 집을 소재로 한 공포 스릴러 영화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흉가 같은 재개발촌과 초호화 고층 아파트를 시종 대비하며 죽음과 살인을 부르는 아파트 공화국의 비극을 추적한다. 극한의 상상을 담은 영화의 살풍경이 익숙해서 더 무섭고 끔찍하다.
‘숨바꼭질’의 주인공 성수(손현주 분)는 성공한 사업가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아내, 어린 딸과 함께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나뿐인 형의 존재를 꼭꼭 숨기고 외면하며 살아온 그는 어느 날 형의 실종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나선다. 형이 살던 곳은 항구 부근으로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빈민이 서로를 경계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낡은 아파트. 철거와 재개발 풍문에 뒤숭숭한 흉가 같은 아파트에서 형의 자취를 쫓던 성수는 집집마다 현관 앞에 새겨진 이상한 암호를 발견한다. 그 집 주거자의 수와 성별을 기록한 표식이다.
형을 안다면서 경계와 두려움에 휩싸인 이웃 주민 주희(문정희 분)를 만난 후 성수의 혼란과 불안은 커져만 간다. 괴이한 암호와 이웃 주민의 증언, 형이 살던 낡은 아파트 속 허물어진 벽에 감춰진 비밀 통로는 유령 같은 불길한 존재를 암시한다. 그 존재는 과연 형일까. 그사이 성수의 고급 아파트 단지 각 집 현관에서도 표식이 발견되고, 단지 안에서 검은색 헬멧과 두툼한 외투로 위장한 괴한이 목격된다. 드디어 성수의 집과 가족마저 괴한으로부터 공격을 당한다.
영화 초반부, 긴장감을 팽팽히 당기는 것은 주인공이 간직한 형에 대한 비밀이다. 제법 잘살던 두 형제의 아버지. 그러나 어린 시절 파국적인 사건으로 형과 동생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일찌감치 아버지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전과 꼬리를 붙여가며 유령처럼 살 수밖에 없던 형의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면서, 동생이자 주인공인 성수가 가진 부와 알 수 없는 죄책감, 결벽증(극중 손현주는 항상 피가 날 정도로 손을 벅벅 씻는다)의 뿌리가 연결돼 있음을 관객들은 짐작하게 된다.
주거 수단에서 최후의 목적으로
형을 둘러싼 수수께끼가 조금씩 풀려가면서 오히려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은 영화 전체를 공포로 몰고 가는 또 다른 존재다. 주인공 가정을 위협하는 괴한은 과연 형일까, 아니면 제3의 존재일까. 영화는 정체 모를 적과 죽음의 숨바꼭질을 벌이는 주인공을 통해 스무고개 하듯 ‘집’을 둘러싼 비극적인 서사를 하나씩 축조해간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집’ 혹은 아파트가 의미하고 비유하는 비극적인 욕망과 연관된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집’의 역사였다. 일제강점기엔 전통 한옥이 대거 일본식 가옥으로 개축됐고, 해방 후엔 ‘적산가옥’이란 이름으로 일반인에게 불하됐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남은 낡은 적산가옥은 우리 현대사의 한 고비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지붕을 개량하고 초가집을 없애자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한국 근대화를 상징했다. 그사이 6·25전쟁을 겪은 많은 이에게 ‘집 한 칸’ 갖는 것이 꿈이 됐다. 근대화와 산업화 물결을 타고 도시로 이주한 이들에게 그것은 더 큰 열망이었다. 나날이 변모해가는 도시 속 한 귀퉁이에라도 몸 누일 곳을 마련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은 대한민국 서민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목표가 됐다.
그리고 아파트 시대가 시작됐다. 한반도 최초의 아파트는 1932년 일제가 세운 서울 충정로 5층짜리 아파트다. 해방 후 50년대 말과 60년대 초 서울 종암동과 마포에 근대식 아파트가 세워졌고, 70년엔 한강맨션 아파트가 중산층용으로 지어지면서 대한민국 집의 역사는 아파트의 역사가 된다. 이후 서울 땅은 속속 아파트 단지로 구획돼갔고, 80년대 후반엔 경기도를 비롯해 전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형성됐다.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논과 밭이 있던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찬 것도 이때쯤이다.
아파트는 도시인의 ‘평균적 삶’을 뜻했으나, 2000년대에 출현한 초고층 최첨단 주상복합 아파트는 주거 지역과 아파트 평형, 그리고 건설사 브랜드가 ‘신분’을 드러내는 ‘아파트 공화국’의 개막을 알렸다. 재개발, 뉴타운이란 이름의 아파트 건립 계획이 선거 판세를 좌우하고, 아파트 단지에 따라 지지정당이 달라지며, 아파트 분양 정책이 정권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초고층 최첨단 주상복합 아파트는 한국 사회에서 성공과 신분 상승을 의미하는 ‘욕망의 바벨탑’이 됐다.
집이라는 공간은 더는 주거 수단이 아니라 최후의 목적이다.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기 위해서 살아야 했던 대한민국의 집, 대한민국 아파트의 비극적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공포 스릴러 영화가 바로 ‘숨바꼭질’이다.